38. 역사의 전환점 (행 15:1-35)        
9월12일

예루살렘 종교회의
저자 누가가 그런 편집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지 사도행전은 1-14장과 15-28장으로 분명하게 구별된다. 표면적으로 분량이 반 토막씩이라는 점도 있지만, 전반부에서는 예루살렘이 중심이었다면 이제 후반부에서는 바울에 의해서 선교가 이루어진 그리스 지역이 중심 무대로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연히 중심인물도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로부터  바울로 이양된다. 누가는 어쩌면 마음속으로 15장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 이야기의 단초가 곧 예루살렘 종교회의였다.
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된 동기는 이방 교회의 대표 격이라 할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벌어진 신학 논쟁에 있었다. 유다에서 안티오키아로 내려온 몇몇 사람들이, 누가는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지 않고 있는데,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 주장에 대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강하게 반대했다. 이런 논쟁이 쉽게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한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한 교회 대표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 사건을 직접 거론하는 걸로 보아 이 예루살렘 회의 건은 역사적 사실인 것 같다. 물론 그 저간의 복잡한 사정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안티오키아 교회 스스로 판단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것인지, 아니면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호출한 것인지 말이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바울과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관계가 별로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서 나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따로 만나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2절). 그는 사도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즉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므로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든 간에 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도 나에게 어떤 새로운 제언을 한 일은 없습니다.”(6절).
사도행전에서는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헬라파 공동체 사이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지만, 아마 실제로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의 제자들과 동생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로서는 유대교와 다른 걸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유대교 안에 안주하려고 했을까? 예수의 공생애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볼 때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교와는 물과 불처럼 상극처럼 보이는 데 말이다. 우리는 이런 선입관을 버려야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실상을 정확하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오늘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도 분명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초기에 ‘유대교적 기독교’라는 과도기가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과도기라는 건 역사를 의미한다. 기독교가 명실상부하게 기독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될 때까지 많은 우역곡절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메시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종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 결정적으로 예수의 부활 경험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과정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 곧 예루살렘 종교회의라 할 수 있다.

베드로
안티오키아 대표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사도들과 원로들을 비롯한 온 교우의 환영을 받았다는 보도는 과장된 듯 보이지만 누가의 시각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안티오키아 대표들은 그들이 이룬 이방인 전도의 성과를 보고했고, 왕년에 바리새파였던 신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할례와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사도들과 원로들이 공식적으로 회의를 열었다. 오랜 토론 끝에 베드로가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그의 변론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 단락으로 구별된다.
1) 베드로는 우선 자신에게 직접 이방인 전도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거론했다. 아마 행 10,11장의 ‘고르넬리오’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다.
2)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9절). 베드로의 고르넬리오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런 주장도 유대인들의 선입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3) “우리도 율법의 멍에를 감당하지 못했다.” 아마 이 말은 그렇게 진정성이 있다기보다는 누가의 생각이 반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독실한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멍에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랑으로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교회 지도자들의 딜레마가 있으며, 동시에 영적으로 민감해야할 당위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면서 목회 대상이 되는 청중을 어떤 인위적인 세계로 몰고 들어간다. 이런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간섭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할 수 있을까?
5) “유대인의 구원도 예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다.” 이게 곧 베드로의 결론인 셈인데, 아마 여기에도 누가의 생각이 깊이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사도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공동체도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예수의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야고보
베드로의 말을 듣고 온 회중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이어서 바나바와 바울이 자신들의 이방인 전도 상황을 보고했다.(12절). 이런 보도는 4절의 반복이다. 누가가 만약 완성도 높은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상투적인 말을 반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어떤 저술 목표를 향해서 약간 거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애받지 않고 그냥 밀고 나간 것 같다.
이 회의의 마지막 발언자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였다. 우리의 생각에는 베드로가 예수의 공생애 중이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그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도행전에 따르면 야고보가 한수 위이다. 어쩌면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와 친족의 대표인 야고보를 등장시켜서 이 회의 결과가 권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여기에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참고적으로, 예수의 공생애에 비교적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도 자리하고 있었던 예수의 어머니가 사도행전에는 왜 등장하지 않을까? 사도행전에도 부분적으로 여자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걸 보면 가부장제 하에 여자가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 문제는 그냥 질문으로 남겨 두고, 야고보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1) 야고보는 앞서 나온 베드로의 진술이 예언자의(암 9:11,12) 말과 일치한다고 거들었다. 구약성서를 직접 인용한다는 건 그의 말이 그만큼 비중이 있다는 뜻이다.
2)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히지 말자.” 그는 왜 여기서 ‘예수’라고 말하지 않고 ‘하느님’이라고 말했을까? 이미 그 당시에 예수의 신성이 확보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곧 크게 보아 유대교의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3)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율법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방인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규범을 편지로 알리는 게 좋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우상으로 인해서 더러워진 것은 우상에게 제사 드렸던 고기를 가리키며, 음란한 행동은 금지된 혈족 사이의 결혼을 의미하며, 목 졸라 죽인 고기는 의례적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이며, 피는 말 그대로 그 당시 이방 종교에서 횡행하던 습관인 피 마시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이방인들에게 제시된 이 네 가지 규범은 어느 정도로 역사적 신빙성이 있을까? 이 문제는 우리가 다루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접어두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규범들이 나옴직 한데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게 좀 의아하기는 하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한 신앙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거론되지 않았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 예루살렘 종교회의의 주요 아젠다가 할례였기 때문에 주로 도덕적인 규범에 관해서만 언급했을지 모른다. 이 네 가지 중에 세 가지가 먹거리에 관한 것이고 한 가지는 성에 대한 것인데, 그만큼 먹거리가 기독교인다운 삶의 기준으로 중요했다는 의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지 이 네 규범에 관한 연구가 앞으로 필요하다.

예루살렘 대표와 편지
야고보의 제안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예루살렘 교회 대표로 유다와 실라가 선택되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예루살렘 신자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가서 혼란스럽게 한 일은 교회가 시킨 일이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는 바나바와 바울을 극찬한 것이고, 셋째는 앞서 회의에서 결정된 네 가지 규범이다.
이 편지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약간 자연스럽지 못한 게 발견된다. 그건 이미 회의가 진행될 때부터 보였던 조짐이다. 원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심각하게 신학적 논란을 불러일으켜서 결국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열게 한 ‘할례’ 문제가 일체 거론되지 않았다는 게 그것이다. 왜 예루살렘에서는 이 할례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또한 편지에도 그런 언질을 주지 않았을까? 이에 반해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기 제자인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성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할례 문제를 그냥 율법이라는 광범위한 개념 안으로 포함시켜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예측은 누가가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자료를 별로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약간의 흠집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사도행전의 보도가 역사적 사실에 치중한다기보다는 누가의 신학적 고백에 비중을 둔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가가 이 사건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제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적 한계선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법적인 정당성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사도행전은 명실상부하게 새로운 선교 드라마를 향해서 도도한 발걸음을 옮겨놓게 되었다. 그 중심에 바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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