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행 15:36-41)        
9월26일

실라
사도행전 역사에서 전환점에 해당되는 소위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원만하게 처리된 다음에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곧 1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누가의 이런 이야기 진행은 누가 보더라도 자연스럽다. 독자들은 아마 초기 기독교의 위대한 두 지도자가, 그들이 비록 공식적으로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 못지않은 권위를 확보한 인물들이었는데, 의기투합해서 선교활동을 전개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의외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사소한 일로 다투고, 결국 서로 제 갈 길을 가고 말았다. 누가의 이런 보도가 과연 실체적 진실일까? 아니면 그 이면에 다른 사연이 담겨 있을까?
많은 평신도들은, 물론 목사들 중에서도 평신도와 비슷한 수준에서 성서를 읽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성서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믿어야지, 그 이면에 대해서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소박한 마음이야 높이 살만하지만 진리는 단지 소박한 마음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소박한 마음은 진리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아니다. 소박한 마음으로 성서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될 경우에 그것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기 마련이다. 그런데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보고 일체의 합리적 사유와 질문을 폐쇄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소박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완고하게 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이다.
그들이 성서에 대해서 완고한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불안감에 놓여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자기의 존재 전체를 걸어두었다가 그것의 토대가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 앞에서 일체의 문제의식을 포기하고 원래 알고 있던 것에 집착하는 현상이 곧 그것이다.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천동설을 믿고 있던 기독교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당시 교회가 진리를 향한 열린 마음이 있었다면 지동설에 대해서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을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언쟁에 관한 오늘의 본문이 어떤 실체적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지, 혹은 숨기고 있는지 검토하려면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도행전이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술한 게 아니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논리적 모순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중의 하나가 ‘실라’에 관한 것이다. 새로운 선교여행을 앞두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고, 바울은 마가 요한이 1차 여행 도중에 돌아갔다는 사실을 빌미로 바나바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일로 크게 다투었고, 결국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났으며, 바울은 대신 실라를 데리고 독자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태 진행에서 약간 의아한 것은 바울과 동행하게 된 실라가 언제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예루살렘 회의 결과를 직접 안티오키아 교우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인물이었다. 행 15:33에 따르면 그는 안티오키아에 와서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이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그가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는 말이 없다가, 갑자기 바울의 선교 동반자가 되었다는 건(40절)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이런 사태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 하나는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33절에는 유다와 실라가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어떤 사본에는 “실라는 거기에 머무르기로 작정하였다.”(34절)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 구절이 개역판이나 공동번역에는 난외주로, 루터 역본은 괄호로 묶여 처리되어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실라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안티오키아로 다시 돌아왔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지지할만한 성서 구절은 물론 없다.
그런데 사실 누가는 지금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된 이유를 나름으로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이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앞서의 설명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모순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성서 앞뒤로 나오는 모순을 억지로 해결할 필요는 없다. 이런 모순을 침소봉대하여 성서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태도나, 또는 그런 모순을 견강부회의 방식으로 처리하여 성서를 절대화하는 태도도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지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여기서 저자 누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관해서만, 더 나아가 그것의 신학적 정당성만을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마가 요한
누가는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게 된 이유가 마가 요한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요한은 1차 선교여행에 따라나섰다가 밤빌리아에서 무슨 이유인지 설명은 없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행 13:13). 그의 몸에 병이 들었는지, 마음의 병인 노스텔지어에 빠졌는지, 아니면 원래 성실하게 못한 사람인지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의 행동은 물론 책잡힐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나바가 2차 선교여행에서 그를 데리고 갈 생각을 했다는 걸 보면 그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더 나아가 1차 선교여행에서는 피치 못할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성서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요한이 바나바의 친인척이어서 바나바가 그를 끝까지 옹호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에서 훨씬 심각한 문제는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결별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져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 가 버렸다. 한편 바울로는 실라를 택하여 주님의 은총을 비는 교우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티오키아를 떠났다.”(39,40절).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이방 세계로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다. 바나바는 다소에 은둔하고 있던 바울을 안티오키아로 데리고 와서 사역을 함께 감당했으며,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에도 안티오키아 교회를 대표했다.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인지, 아닌지 문제로 결코 상종하지 않을 것처럼 심각하게 다투었다는 건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못한 이야기이다.
물론 바울이나 바나바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 작은 일로도 마음이 상하고, 서로 다툴 수 있다고 볼 수는 있다. 그렇게 싸우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런 논리를 바울과 바나바에게 적용하는 건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가 요한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문제가 여기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율법과 복음 논쟁
우리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바울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이런 크고 작은 모순들, 또는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바울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아주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 내용을 우리가 여기서 소상하게 검토할 수는 없으니까 한 가지만 짚자. 그것은 바로 바울이 그 당시 최고의 석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원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 바울 같은 지식인은 없었다. 예수를 경험하고 믿는 게 중요하지 지식이 무슨 대수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의 토대가 어떻게 잡혀지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만약 바울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나사렛 예수는 단지 배타적이었던 유대교를 포용적인 종교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인물로 끝났을지 모른다. 이런 내 표현이 오해를 살만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게 기독교의 진리를 위해서 중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뿐이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사건이 사람들에게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체계로 발전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의 이행이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쉬프트’는 당시 최고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바울에 의해서 그 기초가 잡힌 것이다. 물론 소위 ‘예수 세미나’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이 바울에 의해서 헬라화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있지만 만약 기독교 역사가 이 헬라화라는 학문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수많은 열광주의적 종교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역사에 잠간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소멸하고 말았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신학을 대립적으로 몰아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이 단지 마가 요한 때문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 때문이라는 단서를 바울의 편지인 갈라디아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암시하는 예루살렘 방문에 관해서 설명하면서(갈 2:1-14) 자신이 베드로나 야고보와 대등한 입장으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뿐만 아니라 더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베드로와 바나바를 심한 말로 책망했다는 것이다. 그 일은 안티오키아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베드로, 바나바, 그리고 바울과 여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터줏대감이라 할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 그 곳에 들어오자 베드로와 바나바까지 그들을 두려워해서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파와 함께 물러 나갔고 심지어 바르나바 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갈 2:13). 이제 바울은 예수의 사도들은 물론이고, 자기의 절친한 동료인 바나바에게서도 여전히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고, 결국 바나바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마가 요한이 아니라 원시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율법과 복음에 관한 신학적 논쟁의 결과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옳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바울에 의해 복음의 새로운 지평이 분명하게 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본문을 읽는 우리 앞에도 역시 이런 역사적 해석과 결단이 놓여 있다. 한국교회는 그런 역사의 맥락을 눈치 채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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