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디모데의 할례 사건
(행 16:1-5)        
10월10일

리스트라에서
지난 공부에서 우리는 바나바와 바울이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검토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1차 선교여행 시에 처음으로 방문했던, 자신의 고향인 키프로스로 떠났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1차 선교 여행 시 끝마무리에 방문했던 지역으로 떠났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데르베와 리스트라가 바로 그곳이다. 물론 15장41절에는 훨씬 넓은 지역이 소개되고 있긴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16장1절에 적시되어있는 리스트라가 중요한 장소이다. 14장8-20절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과 바나바는 이곳에서 선천성 앉은뱅이를 치료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기자 그곳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은 헤르메스 신으로 모시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제 바울은 바나바 없이 혼자 이 리스트라를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실라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단락이 6-10절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유럽의 관문인 빌리보에서 바울과 같이 감옥에 수감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물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앞에서 바나바와 갈라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던 실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누가는 여기서 디모데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바울이 실라와 동행했다면 굳이 디모데라는 청년을 또 다시 데리고 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빌립보에서 실라가 다시 바울의 선교 여행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놓고 소설을 쓰듯이 추정해본다면 이곳 리스트라에는 실제로 바울이 혼자 왔으며, 그 전에 실라를 빌립보에 사전 답사시켰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는 전혀 신빙성 있는 게 아니고, 단지 동행인 문제가 2차 선교문제에서 큰 이슈로 부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실라에 대한 언급이 규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이제 본문으로 직접 들어가자.

디모데
리스트라에 디모데라는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도는 유대인 어머니와 그리스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그대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또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도 지금 그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딤전 1:5). 이 편지는 디모데의 외가 쪽으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만 언급되고 친가 쪽으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걸 보면 누가가 설명하고 있는 대로 그들이 그리스 사람이라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참고적으로 학자들에 따르면 이 당시에 디모데의 어머니가 이미 과부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디모데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개연성이 높지만 외할머니까지 그렇다는 건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단순하게 그 외할머니도 역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일지 모른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디모데는 리스트라와 그곳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이고니온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본문만 갖고는 그의 믿음이 좋다는 것인지 인격이 좋다는 것인지 판단하기는 힘들다. 아마 이런 두 부분을 모두 포함한 젊은이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 시에 세례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디모데를 눈여겨본 바울은 이제 다시 만나서 그를 데리고 떠날 생각을 했다.
신앙과 인격이 원만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매우 좋은 조건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한 교회가 부흥하려면 대개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성 교인들의 성품이 일단 괜찮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새로 들어온 교인들과 기성 교인들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아서 결국 교회가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교회 신자들의 인격은 매우 중요하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교양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떨어지는 것도 문제가 적지 않다. 모두가 스스로 인격자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인격과 품성은 궁극적인 생명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공동체를 유지, 관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아마 디모데는 이런 인격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부분도 꽤 괜찮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디모데의 할례
그런데 여기서 약간 석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 그 이유는 그 지역 사람들이 디모데의 혈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할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책잡힐 일이 아닐까 염려해서 그렇게 조치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누가의 추측 보도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울은 이런 할례파와 적극적으로 대결한 인물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할례당이 안디오키아에 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제 새로운 각오로 2차 선교여행을 나서는 마당에 지역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는 건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물론 바울이 비록 할례파들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려면 그 이외의 일로 힘을 분산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고 볼 수도 있다. 바울에게 이와 비슷한 경우는 3차 선교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도 또 한 번 있었다.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다는 소문으로 바울이 난처한 입장에 빠진 것을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권고한다. 하나님에게 맹세한 네 사람의 정결 의식을 바울이 주도하면 유대인들도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라고 말이다. 바울은 그들의 말을 따랐다.(행 21:17 이하).
그러나 앞에서도 한두 번 인용한 바울의 편지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이런 설명들은 무의미해진다.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울은 이미 그리스 사람으로 알려졌던 디도에게 할례 받게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그런 압력이 가해졌지만 바울은 그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갈 2:4,5절). 그런데 이제 와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는 것은 그렇게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니다. 더구나 리스트라에서는 아무도 그걸 강요하지 않았고, 단지 혹시 말썽이 날까 생각해서 이런 일을 행했다는 건 바울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그렇다면 디모데 할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누가가 매우 적은 정보에 의해서 이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행전에는 정확한 전승들이 있고, 때에 따라서는 정확하지 못한 전승도 있으며, 또는 누가의 추측 보도도 들어 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디모데 할례 보도는 정확하지 못한 전승을 누가가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한다.
그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할례를 선포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한 사람이다. “형제 여러분, 만일 내가 여전히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면 왜 내가 지금까지 박해를 받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하고 있다면 내가 전하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례를 주장하여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그 지체를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갈 5:11,12).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에 바울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바울의 할례를 인정했다는 소문을 여기저기에 퍼뜨린 것 같다. 이런 소문이 전승되어 누가의 손에 들어온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전승을 그대로 인용했을 뿐이라는 말일까? 지금 우리가 그 당시에 일어난 속사정을 모두 파헤칠 수는 없다. 일단 누가는 자기 손에 들어온 전승의 진위 여부를 가릴만한 능력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수없이 많은 구전과 문서전승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예수가 어렸을 때부터 초능력을 행했다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온갖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그런 모든 전승들을 정확하게 가려서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교회는 4세기 후반에 가서야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 39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진 여러 문서 중에서 27권만을 경전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80-85년 사이에 누가가 바울의 잘못된 전승을 정확하게 가려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의 판단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누가의 관심은 바울을 태두로 하는 그리스 지역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유대인들을 고려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는 이 전승을 그가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누가는 선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누가가 예루살렘 교회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4절에도 나온다. 누가는 바울 선교 여행에 별로 깊은 관계가 없는 한 구절을 여기에 삽입시켰다. “바울 일행은 ··· 예루살렘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도그마)들을 전해주며 지키라고 하였다.” 객관적인 역사가의 눈으로 평가한다면 바울은 이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뒤로 이어지는 선교에서 그가 이런 도그마를 전한 예가 없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을 예루살렘 주류와 연결시킴으로써 그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누가의 입장에서는 바울과 예루살렘의 연합으로 인해서 “교회들은 믿음이 점점 더 굳건해졌으며 신도의 수효는 나날이 늘어갔다.”(5절)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은 누가가 많이 비난받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역사적 한계를 지닌 사람이니까 그런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문자의 차원에서 무조건 고수될 게 아니라 늘 진리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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