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필립비에서
(행 16:11-40)         10월24일

리디아의 개종 이야기
오늘 본문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의 유럽 선교 여행이 시작된다. 트로아스에서 배를 타고, 에게 해 북쪽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바울의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바울은 한편으로 아시아에서 더 이상 설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땅에서 설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을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마음을 안고 이제 바울 일행은 필립비의 항구 도시인 네아폴리스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이제 육로를 통해서 북서쪽 11km 정도 떨어진 필립비로 갔다. 이 필립피에서의 활동이 명실상부한 유럽 선교의 출발이다. 누가도 아마 이런 역사적 의미를 감안한 탓인지 필립비가 로마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바울 일행이 그곳에서 안식일이 될 때가지 며칠 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마 필립비에는 평소에 유대인들의 활동이 별로 원활하지 못한 것 같다. 만약 필립비에서 유대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굳이 안식일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안식일이 되어 우리는 성문 밖으로 나가 유대인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13절). 누가의 이런 진술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바울이 왜 유대인들의 기도처를 우선적으로 찾아야만 했을까 하는 질문이다. 예루살렘 사도들의 유대교에 보인 미온적인 태도와 바나바에게서도 여전히 나타나는 율법적인 태도로 인해서 더 이상 아시아에서 설교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유럽으로 건너왔다면, 이제 유대인들의 모임과는 완전히 담을 쌓는 게 옳지 않았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어쩌면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눕는다는 말처럼 유대인들의 기도처가 아니면 필립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는지 모른다. 다른 하나의 질문은 이 기도처에는 왜 여자들만 모였을까(13절) 하는 것이다. 아니면 남자들도 모였지만 여자들에게만 말씀을 전했다는 것일까? 이런 진술만 본다면 종교적 성향이 강한 여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기 가장 좋다는 뜻이다. 아니면 누가가 필립비에서 최초로 신자가 된 리디아를 알리기 위한 사전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리디아는 자색 옷감 장수였고,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여자였다. 오늘 본문은 그녀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설명한다. 비용이 적지 않게 나가는 일이었을 텐데도 그녀는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에서 숙박하게 한다. 필립비 공동체에서 그렇게 중요한 여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록한 필립비서에는 리디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학자들이 몇몇 가능성을 제시했다. 필립비서 4장2절에 나오는 유오디아나 신디케가 바로 리디아였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심지어 바울이 리디아와 결혼했다고 보는 학자(르낭)도 있을 정도이다.

축귀 사건
리디아 집에 머물며 전도하던 바울 일행이 어느 날 점보는 소녀를 만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처녀보살’ 쯤 되는 이 소녀는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벌이를 해주며 살았다. 이 소녀가 바울 일행을 따라오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분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받는 길을 선포하고 있소.”(17절). 이런 외침은 복음서에도 자주 등장한다.(막 1:24, 3:11, 5:7, 눅 4:34, 41, 8:28). 매일 이런 외침이 반복되니까 바울은 급기야 이렇게 외치면서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지 그 여자에게서 썩 나가거라.”(18절).
이 이야기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점치는 소녀가 바울 일행을 특별히 괴롭힌 것도 아니고, 또한 그녀의 말이 복음을 옹호하는 것이었는데도 바울이 괴로워했다는 게 오늘 우리의 생각으로는 일단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소녀가 진심이 아니라 귀신에 들려서 외친 것이며, 또한 그것은 바울 일행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빈정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본문은 이 외침에 그런 흑막이 깔렸다고 진술하지 않으며, 그런 뉘앙스를 풍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바울은 괴로움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누가의 관심은 점치는 귀신이 쫓겨났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단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서 약간의 흠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간 것 같다.

감옥 안의 바울과 실라
점보는 귀신이 쫓겨남으로 인해서 이제 상황은 매우 현실적인 차원으로 변했다. 점치던 소녀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던 이들이 이제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고, 이 사건을 맡은 치안관들은 지역 유지들과 군중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바울 일행에게 위법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인지 결국 감옥에 가두였다.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깊숙한 감방에 집어넣고 발목을 차꼬로 단단히 채워 두었다.”(24절). 이 구절에서 우리는 바울과 실라의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추정할 수 있다. 깊숙한 감방인 곧 지하 감옥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목에 차꼬로 채워졌다는 것은 요즘 형사들이 범인을 호송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발목과 간수의 발목이 쇠사슬로 연결되었다는 의미이다. 누가는 지금 바울과 실라가 이런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지진이 일어나면서 감방 문이 열리고 발에 묶인 차꼬가 풀렸다는 본문 25-34절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감동적으로 읽힌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읽는다면 어이없어 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전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진으로 인해서 차꼬가 풀어졌다거나, 더구나 간수의 차꼬까지 풀어진 것처럼 묘사한 것, 그런 상황에서 간수가 즉각적으로 자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좀 과장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당시에 자신이 지키던 범인을 놓치면 간수가 그만한 처벌을 발아야 하겠지만, 지금 바울과 실라가 사형수도 아닌데 간수가 자살하려고 했다는 건 지나친 표현이다. 이런 다급한 상황 가운데서 간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30절) 하고 물었다는 것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다. 누가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바울과 실라가 간수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31절). 누가는 바울 일행이 그날 밤 세 번이나 간수의 집으로 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32절에 “간수와 그 집안 온 식구들에게” 말씀을 전했으며, 33절에 간수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고, 이어 세례를 받았으며, 34절에 또 다시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도대체 감옥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누가의 창작인지 끊어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성서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문서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편지에서 필립비 선교를 언급한 적이 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전에 필립비에서 고생을 겪고 모욕을 당했으나 여러분에게 가서는 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살전 2:2). 여기서 바울이 고생했다는 말만 했지 감옥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바울은 늘 감옥을 안방 드나들 듯 한 사람이니까 이런 진술이 곧 사도행전의 이 감옥 사건이 없었다는 실증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묘사처럼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언급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이렇게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일까? 누가는 현대의 역사학자가 아니라 2천 년 전 사람이라는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당시에 역사학자들은 사실과 허구를 그렇게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과 허구를 적절하게 배열함으로써 독자들을 가르치고, 감동을 주려고 했을 뿐이다. 사도행전도 그런 문서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이렇게 비약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해방하는 능력
비록 사실(facta)과 허구(ficta)가 혼재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경전인 사도행전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게 아니다. 요즘도 사실 언어가 아니라 상징 언어로 쓰인 시(詩)를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그 당시의 글쓰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충실했던 누가의 사도행전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의 독자는 사도행전의 보도를 무조건 사실 언어로 읽지 말고 해석된 언어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가는 이 필립비에서의 사건 보도를 통해서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미 점치는 귀신이 소녀에게서 쫓겨났다는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해방의 능력’이라는 것이 이 보도의 핵심이다. 이것은 곧 억압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 실존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구조적인 억압 상태이다.
본문에서 예수의 이름은 점치는 악한 영을 추방시키는 능력으로 지시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영은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도 똑같이 활동한다.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악한 영은 도대체 무엇일까? 악령은 성령과 대립하기 때문에 악령을 말하는 것보다는 성령을 말하는 게 옳은 순서일지 모르게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고, 종말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다. 이것과 반대되는 영의 활동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악령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생산과 소비에 인간을 묶어버림으로써 생명의 열린 세계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악령이다.
또한 인간이 해방되어야 할 사회 구조적인 억압상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해방하는 복음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어떻게 소외되고 있는지 소상하게 밝힌 적이 있다. 오늘 성적 마이너리티인 동성애자들이 겪고 있는 사회구조적 억압상태도 역시 해방의 능력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악한 영과 악한 사회 질서는 서로 소통된다. 성서가 사회개혁을 근본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뿌리가 되는 악한 영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이런 역사적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