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카에서
필립비 감옥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다음에 바울 일행은 대략 150km가 넘는 여행을 강행했다. 그들은 중간 기착지인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그곳에서 선교했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는다. 실제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누가가 그곳에서의 일을 모르고 있었는지, 또는 선교를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지 지금 우리가 그걸 판단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필립비에서의 소동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지역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걸 목표로 중간의 두 도시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지금 누가가 바울의 전체 일대기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에 의해서 자리가 잡힌 기독교 공동체와 연결된 부분만 강조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 역사가의 눈에는 기독교 공동체가 자리를 잡지 못한 지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울 일행이 그리스 지역에서 구체적인 선교의 열매를 맺은 두 번째의 도시는 데살로니카였다. 바울은 세 주간에 걸쳐 안식일에 모이는 유대인들의 모임에 가서 성서를 중심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다고 한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평일에는 전도하지 않고 안식일에만, 그것도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아마 평일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했을 가능성이 높다.(참조, 살전 2:9). 일정한 선교비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여행을 수행하던 바울 일행은 자신들의 호구지책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을 것이다. 필립비에서 가끔 전달되는 선교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긴 했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만약 평일에 노동해야만 했다면 그들에 주어진 선교의 기회는 안식일밖에 없었으며, 그날을 지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바울이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자 여러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 또한 귀부인들도 감동을 받아서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고 한다. 누가는 지금 어떤 사실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큰 윤곽만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설교했던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무슨 논란이 벌어졌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대목에서 그의 사도행전 기술 방식은 바울이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아주 간략하게 전하고, 이어서 이 말씀에 대한 상당한 호응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말씀 선포와 그 결실이 바로 사도행전의 집필목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첨가한다면 바울에게 가해지는 유대인들의 압박이었다. 필립보에서 바울 일행은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이제 데살로니카에서는 그를 도와준 야손이 피해를 입는다. 이 야손은 필립보의 리다아처럼 바울 일행의 생활을 돌봐준 인물인 것 같다. 5절 말씀은 이렇다.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바울로 인행을 찾아 민중 앞에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한 그들은 대신 야손을 치안관에게 끌고 가서 이렇게 고발했다.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던 자들이 여기까지 들어 왔습니다. 그런 자들을 야손이 자기 집에 맞아 들였습니다. 그자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카이사르의 법령을 어기고 있습니다.”(6,7절). 이런 본문만 따른다면 유대인들이 매우 비열한 사람들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흔들린다는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대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논란 중에서 그들이 치안관에게 고발한 내용은 그 당시 기독교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첫째는 복음이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누룩처럼 변혁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현실유지(status quo)에 집착하는 집단들에게는 시끄러운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1992년의 다미선교회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 역사에서 혹세무민을 일삼았던 수많은 열광적 소종파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움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새로운 생명 세계를 위해서 벌어지는 충돌은 역사발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왕으로서의 예수
둘째는 초기 기독교가 예수를 왕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카이사르만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자로 군림했지만, 기독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로 이 대목이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 설정에서 우리가 예민하게 정리해야 할 부분이다. 예수를 왕으로 믿는다는 사실과 이 세상의 정치권력 사이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자리에 서야하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왕이라는 이 사실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물론 예수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왕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메시아라는 점에서 왕이라는 표상은 예수에게 어울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이사르를 무조건 배척해야만 한다는 말일까?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부분에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들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정통의 기독교는 세속 권력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가 유럽을 나눠갖기 식으로 통치하던 중세기처럼 종교가 일종의 권력집단으로 세속의 권력에 참여하는 것도 옳은 길이 아니다. 기독교는 정치권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누가가 앞부분에서 바울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는 구절이다. 바울은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과 그가 곧 예수라는 사실을 전했다.(3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이 세상 권력과 대립해서 전해야 할 예수의 왕되심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주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귀신 들린 사람 앞에 십자가 모형을 보인다거나, 로마 가톨릭 교인들처럼 손으로 십자가 성호를 그음으로써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 잠들기 전에 십자가 목걸이를 손으로 붙잡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도대체 예수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게 무엇일까? 여기서 긴 이야기는 접고, 간단히 이렇게 정리해야겠다. 십자가는 인간적 실패다. 그 당시에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십자가는 실패한 삶의 실증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믿는다. 이 예수의 부활은 전혀 새로운, 동시에 여전히 은폐된 생명 사건이다. 그 어떤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로도 이룰 수 없는 그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서 발생했다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경험하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사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사건이 예수가 왕이라는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나? 로마의 카이사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긴 했지만 구원론적 차원에서의 생명 사건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수는 있었지만,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이 새롭게 탄생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에 반해서 예수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으로서, 그래서 급기야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칠 수밖에 없었지만 완전하게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생명과 전혀 이질적인 부활의 실체가 되었다. 예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왕이 되셨다. 즉 그는 생명 세계의 왕이 되셨다.
이런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완전히 접어야 하는 걸까? 궁극적인 생명은 예수의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실현되겠지만, 아직 중간 시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종말에 성취될 그런 생명의 세계에 상응해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소금과 빛과 누룩처럼 말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카이사르와 투쟁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영적인 수준에 따라서 본인이 해결해야 할 고유한 몫이다.

베레아에서
오늘 본문으로만 본다면 바울이 데살로니카에서 단지 3주간만 머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여러 달 체류했을 개연성이 높다. 필립비 4:16절이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해준다. 필립보 교우들이 “내가 데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한두 번 보내 주었습니다.” 헬라어 원의에 따르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 150km 이상이나 떨어진 필립비에서 데살로니카까지 선교비를 보내기 위해서는 그 모금에 필요한 기간도 그렇고, 여행에 필요한 기간까지 감안한다면 바울이 데살로니카에 오래 머물렀다고 보아야 한다. 야손이 고발당한 날 밤에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카를 떠나서 베레아로 왔다.  
베레아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카 사람들과 달리 “마음이 트인” 사람들이라서 바울의 설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날마다” 성서를 연구했다는 표현(11절)을 보면 그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 중에서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건 데살로니카에서 일어났던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데 데살로니카 유대인들이 베레아까지 와서 해방하는 바람에 결국 바울은 여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닷가로 피신하게 되었고, 배를 타고 아테네로 갔다.
우리가 앞에서 본 필립비와 데살로니카, 그리고 베레아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 눈에 뜨이는 이들인 귀부인이다. 특히 필립비에서는 리디아라는 이름이 거명되었다.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이 제법 많았다는 복음서의 진술들과 이런 본문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누가는 이런 구절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에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이들이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어쨌든지 우리가 2천 년 전 복음이 시작되던 그 시절의 교회를 현실적인 눈으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공동체로의 약점을 그대로 안은 그런 공동체를, 그러나 동시에 예수에 대한 깊은 신앙의 실체를 그들에게서 발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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