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바울의 설교(2)
-아레오파고- (행 17:16-34)   11월7일

철학과 신학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등, 이름만 들어도 기세가 등등한 철학자들의 도시인 아테네는 로마에 의해서 함락된 이후 몰락의 길을 걷다가, 바울이 방문한 이 시기에는 겨우 5천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매우 썰렁한 도시였다고 한다. 과거의 추억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현재의 쓸쓸함이 훨씬 진하게 몰려오는 것 아닌가. 그런 탓인지 누가는 이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21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은 새 것이라면 무엇이나 듣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비해서 현재의 모습이 초라하긴 하지만 아테네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도시이다. 유럽철학의 뿌리가 그들에게 있으며, 신학도 역시 이들 헬라 철학에게 빚진 게 적지 않다. 테오스와 로고스의 합성어인 ‘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헬라 철학의 산물이다. 플라톤의 저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신학이라는 단어는 원래 신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헬라 철학자들은 이런 신화가 과연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기준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곧 철학의 출발이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은 역사적으로 앞선 신학을 전제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신학의 진리론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철학은 신학을 부정하는 한 그 근본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오늘의 (서양) 철학은 이런 원래의 자리를 상실한 채 이 세상의 부분적인 현상을 해명하는 데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방향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신학이 염두에 두어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라 할 신학은 자신의 정당성을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의 철학에 의해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신학적 주장도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해명에 의해서 검증받아야 할 것이다. ‘천당’에 간다는 말도 역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론적 구도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무조건 철학에 의해서만 그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신학은 철학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시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해명이 철학적으로 보증 받아야만 해석학적인 토대를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에는 대표적인 두 학파가 제시되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가 그것인데, 이 두 학파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에피쿠로스가 기원전 307년에 아테네로 와서 설파하기 시작한 소위 ‘쾌락주의’는 인간의 삶에 흥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 세계를 우연의 장으로 간주한 삶의 예술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삶의 흥미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삶의 흥미와 우연성을 강조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제논은 인간이 ‘로고스’에 의해서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런 주장이 곧 스토아학파의 핵심 개념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바로 이 스토아학파의 핵심 개념에 영향을 받은 요소이다. 요약적으로, 에피쿠로스가 인간을 자연적 본성이라는 구도로 보았다면, 스토아학파의 태두인 제논은 이성에 의해서 스스로 제어하고 움직일 수 있는 합리주의적 관점으로 보았다.
이런 일련의 철학적 전통 안에서 살아가던 아테네 사람들과 바울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절에 의하면 이런 논란을 즐기는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아레오파고 법정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들이 바울의 주장을 법적으로 문제를 삼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논쟁을 벌였다는 것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의 설교 후에 큰 말썽이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후자에 가까운 상황이 아닐까 생각된다.

창조의 하나님
바울은 이제 철학의 도시 아테네의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연설을 시작한다. 이 말은 곧 바울이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에서는 주로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반면에 여기 아테네에서는 유대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만을 대상으로 설교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는 신앙심이 좋은 아테네 시민들이 만들어 놓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신은 곧 세계 창조자이신 하나님이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24절). 바울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첫 설교라 할 수 있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13:13-41)에서 행한 설교에서는  이집트 사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총괄했지만 여기서는 창조 사건을 핵심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바울의 연설을 듣고 있는 대상이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처럼 종교다원적인 사회에서는 창조론 중심의 설교가 매우 중요한 설교 방식이 될지 모르겠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창조의 하나님을 몇 대목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1)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신전 안에 살지 않는다.(24). 바울은 아테네 도시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여러 신전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그 신전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2)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채워 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다.(25a). 이 세상이 바로 그분이 만드신 것이며, 이 창조 사건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창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창조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옳다.
3)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신다.(25b).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생명과 호흡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변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의 설교가 어떤 자리에 놓여야 하는가 하는 점을 알려준다. 이 세계에 작동하고 있는 생명과 호흡의 차원을 심층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명해 나가는 작업이 우리 설교자들에게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아래는 요르크 칭크의 영적 산문집에 나온 글이다.
  
“저는 숲 가장자리로 걸어갑니다. 저는 나무들 사이의 빈 곳으로 가서 땅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생명이 약동하는 이른 아침일 때도 있고 만물이 고요해지는 저녁일 때도 있습니다. 들판과 초원, 길과 꽃 그리고 집들이 제 앞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저 홀로./ 저는 저의 뼈와 발바닥으로 서서 제 무게를 느낍니다. 저는 나무처럼 꼿꼿하게 서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집처럼 굳건한 바탕 위에 서 있고 들판처럼 폭을 갖고 있음을 느끼고 있지요, 제 발 아래에는 반석 같은 굳건함이 있지요. 신뢰감. 저는 서 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저의 발아래에는 지속적인 것, 움직이지 않는 것, 곧 땅이 있어요. 중력은 아래로 향하지요. 그리고 저는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으로 그것에 응답하지요. 중력은 저에게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 굳건함을 주지요. 저는 굳건함과 지속성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곳이 바로 나의 자리입니다.”(Jorg Zink,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32).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단순히 자연 안에 깃든 하나님의 능력만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이 세상의 장엄함을 노래하긴 하지만 그것은 자연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창조론의 긴장이 있다. 이는 곧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의 피조성을 하나로 엮어내는 세계관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창조론이 이 세계를 대상으로 담론을 펼치는 모든 학문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지속가능한 생태 환경을 위해서 투쟁하는 생태학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런 생태 환경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그런 생태환경이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그런 생태론자들과 구별된다.

부활
바울의 설교는 바로 이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연신학적으로 “더듬어 찾기만 하면”(27절) 만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기술로 만든 예술작품을 신으로 섬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29절).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믿는 이 우상숭배를 하나님은 심판하신다.(31절).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심판자라는 점을 정확하게 진술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범재신론이 아니라 그 자연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시는가? 이 심판의 기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31절) 온 세상을 바르게 심판할 날을 정하셨다는 말은 예수의 재림이 곧 세계 심판의 날이며, 그 예수가 심판의 준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직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말일까?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면 무죄한 자가 여전히 고난 받으며, 자연재해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일이, 거꾸로 불의한 자의 운명이 잘 풀리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종말론적으로 실행된다고 믿는다. 가난하고 우는 사람들이 복되다는 산상수훈의 팔복 말씀도 역시 이런 종말론적 차원에서만 옳다. 간혹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게 잘 된다는, 소위 ‘삼박자’ 축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건 기본적으로 기독론적이지도 않고, 종말론적이지도 않다. 심판의 현재성이라는 것은 종말에 일어날 그 최종 심판의 선취적 성격을 의미한다. 저주의 심판이 하나님 없는 세계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오늘에도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것이 곧 그런 심판의 선취인 셈이다.
이런 종말론적 심판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바울은 세상을 창조한, 그리고 심판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31절) 살리신 사건이 바로 그 심판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창조론과 종말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이런 주장은 옳다. 왜냐하면 창조나 종말이나 결국은 생명의 문제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생명의 시작이며, 종말은 생명의 완결이다. 창조는 생명의 시작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완결인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생명의 시작인 창조와 그것의 완결인 종말을 이어주는 사건이 곧 예수의 부활이다. 우리는 결국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완전한 생명 사건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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