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24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욥기는 39장입니다. 거의 다 끝나갑니다. 욥기가 전체로 42장이에요. 아주 짧은 건 아니죠. 가장 긴 성경도 아니지만 적당한 길이의 성경입니다. 전체 구조를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정리 해보세요. 가장 큰 대목이 가운데 있는 거예요. 욥과 친구들의 대화, 대화라기보다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게 4장부터 31장까지예요. 42장 전체 중에서 가운데 부분, 4장부터 31장까지가 욥과 욥의 친구들,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 세 친구예요.) 이 사람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세 번에 걸쳐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여기 나와요. 가장 크죠. 분량으로 볼 때 핵심입니다. 그 다음 욥기 32장에서 37장까지는 욥의 친구는 아니고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엘리후의 말이에요. 우리가 공부할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대목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편집됐을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라고 했어요. 어쨌든 이 부분, 욥기 4장부터 37장까지에 이르는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까지 포함한 이 이야기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양적으로 볼 때는 이 부분이 가장 많아서 핵심인 것 같은데 그러나 욥이 이 친구들의 대화에서 어떤 대답을 얻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게 목표도 아니에요. 서로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만 욥은 사실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대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할 뿐이고 하나님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 욥의 문제의식이 뭐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엄청난 재난과 불행을 당한 것이 아니냐.’는 공격 앞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그에 합당한 죄를 지은 게 아니다.’ 이러한 자기의 변호를 했지만 사람들에게서 이해받을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한 궁극적인 문제들은 하나님만 줄 수 있는 거예요. 이거는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목사와 상담을 할 수 있어요. 꼭 목사만이 아니더라도 선배나 스승과 상담을 하면서 어떤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즘 흔한 이야기로 하면 멘토와 멘티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건 필요하기는 합니다. 어떤 삶의 지혜와 경험들, 그리고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대답을 해줄 수 있지만 그러나 근원적인 것은 사람에게서 대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얻는 대답은 잘못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거예요. 아무리 큰 스승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한계 안에 있어서 사람을 다 모를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습니다만 소위 말하는 선생이나 목사나 두루두루 섞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런 사람들이 늘 모든 면에서 건강한 건 아니에요. 생각이 늘 똑바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전공 영역, 생물학이나 철학, 경제 등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할 말이 많이 있고 우리가 배울 게 많이 있겠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굉장히 약해요. 총체적으로 지식과 인격과 품성, 기독교적인 영성을 포함해서 두루두루 다 원만하게 준비돼야 멘토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드물거든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사람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거죠. 옆의 사람의 말은 참조용, 참고하는 정도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대답을 찾아야 되는 거죠. 오늘 여기 욥을 보면, 옆에 있는 이 친구들이 얼마나 원로급 되는 스승들입니까. 욥을 포함해서요. 그렇지만 어떤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그 사람들에게서 해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인간의 실체적인 모습이에요. 아주 절체절명의 근원적인 문제에서는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욥이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깨끗하게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상태였습니다.


먼저 이 욥이 당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를 앞에 나온 몇 구절만 잠시 확인하고 지나가겠어요. 욥이 당한 문제는 ‘언제 이사하는 게 좋겠나.’라든지 ‘노후설계를 위해서 어떤 걸 하면 좋겠냐.’라든지 ‘자녀 대학 가려고 하는데 어디를 선택하면 좋겠냐.’와 같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영혼에 관계된 문제, 자기 운명 전체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대답을 찾을 수 없었고 아주 어려운 상황 가운데 빠져있는 겁니다. 그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서 앞에 나와 있는 몇 구절을 우리가 공부한 내용입니다만 네 군데만 짚어보겠습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제가 네 군데를 인용했어요. 6:4, 10:22, 13:3, 19:21입니다.


먼저 6장 4절을 찾아보세요. 제가 인용해 놨습니다만 그래도 성경을 직접 찾아보시죠. 앞에 돌아가서 우리가 복습하는 뜻으로 확인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엘리바스가 처음 욥에게 충고한 것에 대해 욥이 대답한 내용이에요. 6장 4절, 같이 읽겠습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며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이런 말을 고백하고 있는 욥의 심정이 어떤지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전능자라고 되어 있어요. 지난주에 하나님 호칭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38장부터 여호와라는 말이 나오고 그 앞은 여호와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엘 혹은 엘샷다이라고 했지요. 여기서 전능자는 엘샷다이예요. 엘만 나왔을 때는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했고요.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며’ 문학적으로 표현이 아주 강해요. 전능자니까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분이죠. ‘화살이 내게 박혔다.’ 화살이 몸에 들어가면 뺄 수 없습니다. 화살촉의 방향이 움직일수록 더 깊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꼼짝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예요. 왜 이렇게 표현하는지 욥의 상황을 이해하시겠죠. 자기에게 당한 운명은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기보다도 그 자체만을 가지고 욥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병들고 자식들을 잃은 것은 정말 끔직한 일들이고 모든 사람들이 당한 재앙, 불행을 한 몸으로 받은 거와 같은데요. 그 자체도 힘들지만 욥에게 더 힘든 것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주신 징벌이라는 것, 죄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전능자의 화살이 내 영혼에 박혀서 내가 꼼짝할 수 없구나.’라고 말하는 거죠. 그런 표현입니다.


그 다음, 10장 22절 보시죠. 함께 읽겠습니다.‘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자기가 처한 형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네요. 세상이 흑암과 같은 거죠. 해는 떴지만 그러나 흑암과 같다고 하는 것, 이런 경험을 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게 뭔지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실 거예요. 이럴 때에 빛으로 나오는 기쁨을 알게 되는 거죠. 여러 가지 끔찍한 불행과 재난, 그런 것도 당연히 어둠이죠. 욥이 그런 어려움을 당했는데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어둠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뜻인지 아마 아실 겁니다. 한마디만 보태면 이런 거예요. 이 세계가 우리에게 아직 자기를 다 드러내지를 않았어요. 그러니까 깜깜한 거예요. 이러한 표현들이 탁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조금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은 아직까지 다 비밀입니다. 이 역사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그거를 우리가 아직까지 다 몰라요. 아주 작은 사물부터 시작해서 아주 큰 우주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들이 다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라고 하는 것을 어둠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죠. 그러한 어둠을 경험하면 빛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돼요. 빛은 드러나는 거니까, 알게 되는 거니까 그 때는 기쁜 거죠. 그 답답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게 빛을 경험하는 거고 그게 바로 구원인 거죠. 여러분들이 아마 그런 걸 다 경험하실 거예요. 이런저런 일들로 답답할 수 있어요. 아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삶이 답답할 수 있습니다. 허무할 수도 있고요. 어두움이에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경험하게 되면 완전히 세계는 다르게 보이는 거죠. 어쨌든 지금 욥은 ‘땅이 어두워서 흑암 같다.’ 그러한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두 군데 더 보겠습니다. 13장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중요한 구절이에요.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대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대답을 듣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마음이 어땠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요. 신학적인 걸로 대답을 찾을 수 없고 자기의 지식이나 교회 전통으로 대답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욥의 심정인 거죠. 그것을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이 욥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를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저도 간혹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살아있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다 모르니까요.(이게 표현하는 게 조금 쉽지 않은 건데 그래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리라 생각하고 말씀드립니다.) 죽어야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잖아요. 살아있을 때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죽음이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니다. 불행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죽음이 막상 닥치면 두려워할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극복하고 그 길을 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게 이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다는 욥의 말과 연결되는 거라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나님과 변론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직접 듣고 싶고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사람의 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거죠. 더 이상 해봐야 공소(空疏)해요. 계속해서 쳇바퀴 도는 것처럼 되잖아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할 걸요? 사람들하고는 아무리 대화를 해도 한계가 있죠?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대화를 하더라도 그런 거예요. 속 시원하게 모든 걸 다 들어도 사람에게 듣는 말들은 늘 한계가 있습니다. 계속 질문이 나오게 돼요. 하나님과의 대면이 최선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기는 하지만 그건 보는 건 아니에요. 죽음이 하나님을 보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점에서 비록 겁나기는 하나 우리가 용감하게 대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저도 가끔 합니다. 욥의 심정이 잘 나타난 구절인거예요.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마지막으로 네 번째 19장 21절을 보시죠.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하나님의 손이 나를 쳤다고 하는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앞에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욥이 느꼈던 심정을 제가 몇 가지 구절을 인용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상황이 정말 처절합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돼요. 이건 친구들이 이상해서가 아니에요. 친구들이 한 말이 다 틀렸기 때문도 아니에요. 친구들은 상당히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당시로써는 최선이었어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자기의 영혼이 설득되지는 않아요. 오늘 제가 설명을 하다보니까 조금 더 욥의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사람들의 말은 아무리 논리적이고 깊이가 있고 전통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멘토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 이걸 전제하고 살아야 되고 또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욥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향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서만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거죠. 이게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이게 어떤 건지 여러분들이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만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의 말은 참고하는 거예요. 목사의 말도 참고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해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이 그러한 영혼의 갈급함을 갖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준비가 되어있는 거죠.


욥이 친구들과 논쟁할 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어요. 하나님의 침묵이에요. 중간 중간에 나오셔서 말씀을 좀 하셨으면 도움이 됐을지 모르는데 하나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친구들끼리만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했다고 하는 건 전체 구조로 볼 때 분명한 거잖아요. 그것에 대해 잠깐 생각을 해봤어요.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을까 하는 거죠. 중간에 잠깐 끼어들어서 '엘리바스 네가 한 말은 이게 잘못됐어.', '욥아, 너도 이 부분에서는 미처 생각이 부족했다.' 이런 중재를 하셨으면 조금 나았을지 모르는데 전혀 그런 것 없이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어요. 욥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의 시시비비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친구들의 논리가 완전히 잘못된 것도 아니고요. 욥이 그 말에 설득당하지도 않고 욥의 말에 친구들이 수긍하지도 않고요. 사람들의 말은 쳇바퀴 돌듯이 계속 돌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즐거워요. 그런 경험이 많이 있어요.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하는 거예요. 말을 위해서 말을 하는 것, 이런 경우가 많아요.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이웃이나 친지들 모여서 이야기할 때 그런 경험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사람들의 한계예요. 저도 그럴 경우가 있어요. 이야기하다가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진리의 영이 인도하는 것에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말 해놨으니까 이걸 물리면 지는 것 같아서 계속 밀고 나가고 거기에 논리적으로 무장하려고 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정치나 종교에서도 많이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말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야 될 겁니다. 평상시 하는 말들도 그렇고 아주 엄격하다는 과학언어, 과학적인 논리들을 말하는 것도 사실은 진리 자체를 붙들고 있지는 못한 거예요. 그것도 시시비비예요. 옳고 그름이 계속 논란이 될 뿐이지 정말 궁극적으로 옳은 것을 붙들고 있어서 그런 것을 말하는 경우가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한 거예요.


이제 친구들 사이에서 시시비비가 끝났어요. 엘리후 이야기도 끝났어요. 이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서로 논쟁은 실컷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답도 없고 정말 공소한, 혹은 공허한 시시비비가 계속 반복됐고요. 아주 그럴듯한 말들의 향연들로 계속됐습니다. 이제 38장에서 41장 사이에서 욥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38장은 우리가 지난번에 했고요. 오늘은 39장입니다. 오늘 서론이 길었죠. 그거는 38장과 39장이 비슷한 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문 내용을 자세하게 보지는 않겠어요. 38장에서 41장까지가 하나님의 말씀인데 전체 구조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제가 말씀드린 거예요. 그래서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여기 39장도 38장과 크게 다르지 않게 '자연의 신비를 인간이 뚫어볼 수 없으니 입 좀 다물어라. 너무 말이 많다.'는 뜻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함께 이 말씀을 읽으실까요? 39장 1절에서 30절까지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욥기 39장>

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3.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7.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8.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

9.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11.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13.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38장과 내용이 비슷하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질문 형식으로 나옵니다. '네가 이걸 봤냐. 이걸 아느냐.' 계속 그래요. 39장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짐승을 열거하면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는 대로 일곱 종류입니다. 1절 이하에는 산염소와 암사슴, 5절 이하에서는 들나귀, 9절에서는 들소, 13절에서는 타조예요. 여기 들소가 그 당시 팔레스틴에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타조는 없었어요. 그런데도 여기 나온 것은 편집한 사람이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를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용이 좀 정확하지 않아요. 13절 이하를 보세요. 이 타조가 좀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날개를 퍼덕퍼덕 하긴 하는데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곱지 않다는 거죠. 별거 아니라는 거예요. 14절, 15절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좀 이상하죠. 타조가 알을 낳아서 막 버려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들짐승이 밟아 버리는 것도 모르고 타조가 알을 낳아서 버려둔다고 하네요. 16절,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묘사 돼있는데 타조가 좀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타조는 자기방식으로 자식들을 잘 살아가게 하는 거예요. 타조가 거기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큰 문제는 아니에요. 결국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동물의 세계도 다 하나님이 하신 거라는 것이기 때문에 약간 잘못된 묘사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9절 이하에서는 말이 나와요. 아주 멋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6절 이하에 매, 마지막 27절 이하에는 독수리가 나옵니다. 30절에 나온 이야기는 하나의 속담처럼 나온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성서주석을 보니까 마태복음 24장 28절에 나오는 속담과 연관된다고 하네요. 마태복음 24장 28절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비슷한 속담이죠. 이게 그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속담인 것 같습니다.


39장 1절에서 30절은 여기에도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신비한 이야기들이 쭉 나열되어 있어요.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깨달으라는 이야기겠죠. 욥기만이 아니라 다른 데도 많이 나옵니다. 시편에도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저도 자연에 대해서 공부도 좀 했고요. 다큐도 좀 보고 동물이나 식물, 우주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 많이 보곤 했습니다. 오늘 그래서 다큐 하나하고 책 하나를 소개하려고 강의 요약문에 적었습니다. 하나는 독일어 방송이에요. 3SAT라는 방송국이 있습니다. 여기서 얼마 전에 다큐를 하나 봤어요. 제목은 'Das Genie der Natur'라고 '자연의 천재성', '자연의 뛰어난 것'이라는 제목입니다. 여기에 진화과정을 거친 자연의 신비로움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곤충, 새들, 짐승들이 나와요. 이것들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요. 예를 들어 90도 되는 벽을 올라가는 동물들이 있어요. 그 녀석들의 발판, 발이 벽에 딱 붙는 거죠. 그래서 90도라도 마음대로 올라가는 것이 진화를 통해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구리들은 완전히 거꾸로 된 유리 천장에 붙어서 평지처럼 가요. 그 녀석들 발 끝부분이 발꿈치처럼 둥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게 착착 달라붙는 거죠. 그걸 전자 현미경으로 확대 해보면 그 안에 수백 개, 수천 개의 작은 주머니 같은 게 있어서 천장에 붙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곤충의 세계에서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우리가 그냥 지나가는 것들도 아주 엄청난 생명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네요.


어떤 한 장면은 이런 것도 나와요. 사람도 진화되어 왔잖아요. 사람의 몸도 굉장히 뛰어납니다. 동물이나 곤충에 비해 약한 부분도 있지만 굉장히 뛰어나요. 기계체조를 하는 여자 선수를 한 명 보여주는데 평균대 위에서 손을 짚고 넘어서서 똑바로 서는 것을 기계체조 선수들이 하지 않습니까. 로봇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그런 것은 못할 거예요. 지금 로봇을 많이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어요. 인간과 곤충과 모든 생명체들이 자연 안에서 진화해온 과정을 통해서 생명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고 그 방송이 말을 하고 있더군요. 어떻습니까. 앞으로 인간이 만든 로봇이라든지 인공지능이 자연을 능가하게 될까요? 뉴스에 보니까 3월 9일부터 구글의 자회사인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요. 그게 알파고라고 합니다. 여태까지 바둑 둔 것을 많이 입력을 해서 이 인공지능 알파고가 사람하고 시합을 하는 거예요. 그게 3월 9일부터 다섯 번에 걸쳐서 우리나라 이세돌 선수와 시합을 합니다. 그 이세돌 선수의 말은 자기가 5대 0으로 이기거나 혹시 한 판을 질지도 모른다고 말을 했고 중국에 있는 이세돌과 버금가는 어느 선수는 이세돌 선배가 겸손하게 말해서 그렇지 5대 0으로 분명하게 이긴다고 말을 하더군요. 인공지능이 체스에서는 사람을 이겼어요. 프로체스는 오래전에 인공지능에게 졌습니다. 그런데 바둑은 수가 무진장하게 많아서 아직까지 인공지능이 사람을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많이 따라온 것 같습니다.


앤드류 놀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어요. '생명, 최초의 30억년'입니다. 제가 매일묵상에 소개한 책입니다. 거기 259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와요.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선캄브리아 시대의 진화를 매듭짓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그것과 결별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캄브리아기가 언제냐면 지금부터 10억 년 전을 이야기해요. 그 때 지구상에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답니다. 이 앤드류 놀에 따르면 그 이전과 이후는 연결이 되기는 하지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격변의 생명현상의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볼 때는 이 세상이 만날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길게 보면, 지구가 45억년이니까 한 20억년, 30억년 긴 시간으로 보면 이 세계가 정말 완전히 다르게 변하는 거예요. 마치 무로부터 창조가 되었듯이 이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우리를 초월하는 거죠. 캄브리아기 이전과 이후는 연결은 되지만 어떤 초월적인 힘이 개입하지 않으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변혁이 일어났다고 앤드류 놀이라는 유명한 고생물학자가 이야기합니다. 저는 바로 그 초월의 능력, 자연 발생적으로 차근차근 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구별되는, 그리고 결별되는 사건으로 나왔기 때문에 초월적인 힘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는 그 사실에서 놓고 볼 때 바로 이 초월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제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많이 보기보다는 그 이외의 것들을 제가 참고적으로 많이 말씀을 드렸어요. 그거는 39장이 38장과 이어지는 비슷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 제가 오늘 말씀의 마지막 방향,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직접 대면해서 듣고 싶다는 욥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시네요. 계속해서 그렇죠? '네가 가진 문제의 답은 여기 있어.'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거 아느냐. 이거 보았느냐.' 계속 그런 말씀만 하시는 거예요. 자연의 깊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깊이, 아주 아득한 깊이와 넓이만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게 성질이 급한 사람은 답답할 거예요. '빨리 뭐라도 답을 줘야지 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까.' 할 겁니다. 그런데 결국 욥은 42장 5절에서 '이제는 내가 주를 눈으로 뵈옵나이다.'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직접 대답을 듣진 않았는데 어떻게 욥이 이러한 고백을 하는 상태에 이르렀을까요? 이게 우리가 욥기에서 얻어야 될 결론입니다. 우리가 볼 때 여기 어떤 비약이 있는 것 같아요. 직접 답을 듣지 못했는데 결국은 꼭 필요한 대답을 했어요. '여태까지는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뵌다.' 그러니 더 이상 가타부타, 지지부진한 친구들의 대답과 같은 것들이 아예 필요가 없어요. 그냥 대답을 얻어버린 거예요.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어요. 어떻게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우리에게도 그게 핵심인 거예요. 하나님 경험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거죠. 답을 아세요? 제가 언젠가 대답을 했나요? 대답은 조금 더 미뤄놓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오래 전 욥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를 중심에 놓고 벌어진 고대 유대인들의 신학적인 논쟁을, 그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주님, 정말 까마득하게 오래된 그 때의 그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오다니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고 짧은 시간이지만 그 말씀을 나눌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일들, 혹은 그러한 경험들, 혹은 그러한 시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욥기를 통한 공부가 하나의 단순한 성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캐내서 아는데 머물지 않고 욥의 고백처럼 '주를 눈으로 뵈옵나이다.' 하는 절정에 신앙에까지 이르도록 저희를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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