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2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40장>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6.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12.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13.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14.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6.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19.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20.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21.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22.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23.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24.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은 욥기 40장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앞에서 읽었어요. 이제 거의 다 끝나갑니다. 전체가 42장까지가 있는데 오늘 하면 딱 2장이 남네요. 특별히 38장부터 41장까지는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그 내용들은 거의 똑같은 이야기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전에 집사람이 말하기를 비슷한 건데 한꺼번에 하지 왜 한 장씩 하느냐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게 맞는 이야기이긴 한데요. 그리고 앞에서는 비슷한 걸 묶어서 한꺼번에 한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38장에서 41장까지는 비록 비슷한 이야기지만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오는 거라서 좀 반복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하나 꼼꼼히 짚는 게 좋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욥기를 일단 전체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 문서가 유대인들의 역사에 언제 나온 것이냐면, 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3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숫자로 이야기하면 까마득해서 여러분들이 잘 느껴지지는 않으실 거예요. 기원전 4세기, 굉장히 오래 전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하면 고조선인가요? 삼국시대 아주 초기 그 이전 정도의 아주 까마득한 때입니다. 4세기~3세기, 이 때가 고대 유대 역사에서 아주 큰 사건이 지난 다음이에요. 제가 몇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우리가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에요. 기원전 587년에 유대 나라가 망한 거예요. 북이스라엘은 이미 약 150년 전에 망했고 남쪽만 유다만 명맥을 유지하다가(남유다가 좀 작은 나라였고 북이스라엘이 훨씬 컸습니다. 그런데 정통성은 남유다에 있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다윗왕조가 계속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조금 아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 그런 것을 여기서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남유다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망해버려요. 그 전부터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1차, 2차에 거쳐서요. 이 바벨론에 의해서 몇 번 멸망할 위기가 있던 거예요. 그럴 때마다 항복을 거듭해서 겨우겨우 왕조가 망하는 것은 막았는데 급기야 기원전 587년에는 왕조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 사회적인 지도층 인사들이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완전히 망한 거예요.


그 때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죠? 자기들은 하나님을 나름대로 잘 믿는다고 생각 했는데,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방민족인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해버린 거예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다윗왕조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나라가 없어진 거예요.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나라가 없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작은 나라들은 주변의 제국에 흡수되거나 병합되고 언어까지 다 없어졌어요. 나라 자체가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사실 히브리인들, 유대인들,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는 이 사람들도 사실은 근동의 역사에서 없어지는 것이 당연한 거였어요. 그런데 어쨌든 살아남았어요. 사실은 살아남아도 살아남은 게 아니죠. 남유다가 아시리아의 위협을 받고(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망했고요.) 방금 말씀드린 대로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망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습니다만 결국엔 다 망해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말인 히브리어를 다 잊어버려서 사용을 못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제시대에 더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다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잊어버렸을 걸요. 언어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그 민족의 모든 정통성이나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이라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아주 고급 지식인들, 성경을 필사한다거나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만 아는 언어로 남아있었어요. 일반 민중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쓰는 말은,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오잖아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같은 거요. 이런 말들은 다 아람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 아람어를 쓴 거예요. 그런데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속사정이 있는 거고요. 그리고 아람어로 된 성경도 있어요. 헬라어로 기록된 복음서가 아람어로 번역된 거죠. 이렇게 그 당시 언어가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바벨론 사건 앞에서 이 유대인들이 받은 충격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거였어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왜 이렇게 됐나하는 깊은 회의,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기 민족을 지켜주신다고 믿었어요. 하나님의 백성은 지키시고 복주고 잘 해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벌을 내린다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었는데 바벨론 사건이 일어나니까 그게 다 헝클어진 겁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불구하고, 혼자 의로워서는 이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버텨낼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통에 대한 도전인 거죠. 앞에서 말한 지혜의 전통이에요. 하나님이 옳은 사람에게 복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는 지혜 전통이 내려오다가 바벨론 사건 이후에는 ‘이 세상이 그렇게만 돌아가는 게 아니구나. 죄가 없는 사람에게도 재난과 재앙이 임하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생각들이 나오게 된 거예요. 그게 이 욥기에 집약적으로 들어있습니다.


4장에서 31장까지가 이걸 주제로 해서 욥과 세 친구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나옵니다. 욥의 친구들은 당연히 지혜 전통을 계속 주장하는 거예요. ‘네가 재앙을 받은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 네 책임이다. 너의 죄 때문이다.’ 제가 욥기를 공부할 때 여러 번 말씀드린 거예요. 그런 주장 앞에서 욥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의 의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러니까 무죄한 자의 고난 앞에서 이 욥은 자기 스스로의 삶이 증거인데, 그 지혜 전통에 기대서 공격하는 친구들에게 저항했어요. 이게 참 외로운 저항이에요. 아무도 동조자가 없을 만한 상황에서 계속 그걸 붙들고 나갔어요. 그 친구들에게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도 저항하는 거예요. 이러한 욥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순된 존재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런 거예요.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거는 빼도 박도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한 거예요. 욥도 그러한 지혜의 전통에 서 있었어요. 지금도 사실은 그걸 붙들고 있는 겁니다. 욥이 그렇게 우리가 옆에서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저항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혜의 전통을 포기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지혜의 전통은 신약성경에도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관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심판하신다는 것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걸 바탕에 놓지만 현실에 들어와서 보니까, 욥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죄가 없는 사람을 벌하는 분이거든요. 욥이 처한 현실에서 볼 때는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죠. 그래서 욥이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 제가 책을 한 권 가져왔습니다. 일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에게 빌려서 본 책입니다. 제목이 ‘카인’이라는 책이에요. 주제 사라마구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썼는데 1922년에 태어나서 2010년에 돌아가셨고 노벨 문학상도 타셨어요. 지난 번 우리 대구샘터교회 책모임에서 같이 읽었던 책입니다. 제목이 ‘카인’이에요. 보통 우리 성경에는 가인이라고 돼있는데 본래 발음으로 하면 카인이죠. 이 책에서 사라마구가 말하려고 하는 입장이 방금한 이야기와 비슷한 거예요. 하나님이 모순된 거죠. 용납하기 힘든 겁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지, 그 사람의 잘못이든지 아니든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책임에는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있다고 이 책을 통해 사라마구가 주장합니다. 그런 입장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가 시작 되고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려는 욕망이 생기고 욕망 때문에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에 결탁해 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그리고 유대교의 구약성경에 근거한 죄에 대한 문제이지 않습니까. 이건 주일학교 아이들이 질문할 만한 건데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말지 왜 만들어가지고 인간이 죄를 짓게 하냐.’ 저자가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겁니다. 이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 소설가도 알긴 알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접근하면 안 되는 건데 하여튼 그렇게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 노아시대 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욥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 책임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제가 소설을 설명하면서 어떤 구도를 설명하는 겁니다. 여기 욥이 있는데 욥도 불안해요.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는 하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 용납할 수 없는 게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라고 따지고 있는 거고요, 이 사라마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 책임이야.’라고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은 이 사라마구가 꼭 신을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좀 다른 뜻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하나님을 만난 다음의 욥이 있어요. 그러니까 가운데에 고민하고 있는 욥이 있고 그리고 왼쪽으로 가게 되면 사라마구의 하나님 책임이라는 입장이 있어요. 이건 실존주의적인 무신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욥의 오른쪽에는 하나님을 경험한 다음의 변화된 욥이 있어요. 그러한 모순과 이해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는 고민하고 저항하고 따지다가,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욥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여태까지는 내가 귀로 들었는데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뵌다.’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세 가지 입장을 설명했어요. 이 세계의 상황은 똑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유 없이 죽는 사람들, 병에 걸리는 사람들, 태어나자마자 죽는 어린 아이들,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여기서 세 가지 구도가 있는 거예요. 사라마구의 입장에서는 ‘이건 도저히 사랑의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굴러가면 안 돼. 그러니까 당신 책임이야. (혹은)신은 없어.’ 이러한 입장이고 지금까지 욥의 입장은 저항하고 힘들어하고 고뇌하고 따지고 몸부림치는 거고요. 그 다음에 후반부로 와서 하나님을 경험한 욥의 입장은 똑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차원에 이르게 되는 거죠. 우리가 보통 맨 왼쪽에 있는 입장들은 기독교와 반대되니까 딱 알아요. 그 사람들은 휴머니즘적인 게 있어요. 인간을 끔찍이 여기다 보니까 신을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욥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그런 쪽에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왜 이런 건가.’하는 생각에 세상을 살기가 힘들어요. 그냥 나 혼자 복 받고 편안하게 잘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 벌어지는 고난, 여러 가지 모순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괴로운 거예요.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가 잘 돼요. 그러나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고 하는 욥의 상태까지 가는 것은 힘들어요. 이게 우리가 가야될 고차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이 욥기가 거의 끝나가지만 그 전에 거기까지 이르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욥의 친구들의 입장이 지혜 전통에 서서 욥을 계속 비판했고, 두 번째는 욥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하나님에게까지 따지는 것까지 했고요. 이제 세 번째 단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거죠. 그게 38장부터 41장까지입니다. 욥기 전체 구도에서 볼 때 후반부에 속하죠. 지금까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지 않고 이 부분에서 일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여호와의 말씀인 38장에서 41장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우리가 가야될 길이고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길인데 이거예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창조의 능력과 그 신비를 직시할 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재앙과 불행 가운데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욥기는 이걸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 신비를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할 때 욥이 번민했던 것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거죠.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신비라는 것을 한, 두 마디로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욥기는 계속해서 자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부활까지 이르는 모든 것들이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이건 생명의 문제입니다. 우주, 세계, 자연, 이런 것들이 다 생명과 연관되잖아요. 그러니까 생명의 완성이 부활이라서 이런 것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지금 용납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들을 뛰어넘어서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가는 거죠.


제가 오늘 이야기하다보니까 실마리가 조금 풀리는 것 같습니다. 저도 꾸준하게 그 부분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어요. 목사라고 해서 신앙이 완성된 게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신앙이 성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건 한 시도 쉬지 말아야 될 하나의 수행처럼 제가 가야되는 겁니다. 그게 멈추면 죽은 신앙이 되는 거죠.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분들에게 많은 걸 가르친다기보다도 내가 배우니까 즐거워서 하고 있어요. 집사람이 오다가 또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너무 적게 오는데 조금만 더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어요. 저는 괜찮다고, 사람이 오고 안 오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준비하고 적은 숫자라도 정말 즐겁게 하는 거니까(이건 솔직하게 그렇거든요.)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준비할 때도 즐거워요. 이게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을 혼자 읽을 때는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르치기 위해서 연구하다보면 어떤 세계가 더 들어오니까 이거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지 않습니까. 집사람이 지금 끄덕끄덕 했어요. 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신비가 단순히 자연이 아름답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걸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사건에서 그것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이 전반적인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을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면 욥기가 이야기하려는 실체를 더 가까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을 전제하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단락으로 나눴어요. 전체가 24절까지인데 1절~5절이 한 단락이고 6절~14절이 또 한 단락이고 마지막으로 15절~24절이 되겠습니다. 40장 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2절에,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2절에서 트집 잡는 자와 전능자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트집 잡는 자는 욥이고 전능자는 하나님이죠. 지난주에 ‘전능자’라는 것은 ‘엘샷다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이 38장~41장까지 오기 전에는 다 이 방식으로 하나님이 호칭됩니다. ‘엘’ 혹은 ‘엘샷다이’, 이건 ‘하나님’ 혹은 ‘전능자’로 번역이 돼요. 그런데 38장~41장에 이르러서 ‘여호와’라는 칭호가 나와요. 그리고 ‘전능자’와 교차하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두 단어, 트집 잡는 자와 전능자가 대비되는 게 참 재밌어요. 이 전능자 앞에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트집 잡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말씀인 38장~41장에 깔려있는 바탕이에요. ‘넌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고 있냐.’ 이런 식이죠. 욥은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는 거예요. 욥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이해는 돼요. 우리도 그럴 것 같아요. ‘왜 내가 이유도 없이 재앙을 당해야 되냐.’ 이런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건 따지는 거죠. 아주 근원, 핵심, 창조의 능력과 신비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가타부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겁니다.


그러자 욥이 뭐라고 하나요. 4절, 5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38장부터 쭉 말씀하셨는데 욥이 이제야 비로소 한 마디 하는 거예요.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욥이 이제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앞에서는 친구들에게 많은 말을 했어요. 계속 시시비비를 따지는 거죠. 따질 때는 따져야 되기는 한데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게 무의미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입을 다뭅니다. 제가 다른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도 입 다무는 게 능사라는 뜻으로 드리는 것은 아니고요. 하나님을 경험해도 따질 때는 따지고 이런저런 것을 당연히 해야 되죠. 그러나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침묵이에요. 모든 불평도 사라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실 겁니다.


이게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경험한 거라서 한 말씀드립니다. 어젯밤에 11시 반쯤 마당에 나갔어요. 가끔 마당에 나가요. 이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게 그런 점에서 조금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자연친화적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쉽게 현관문만 열면 마당이니까요. 아파트 생활해서는 조금 번거로운데 개인주택에서는 아주 편해요. 11시 반, 어제는 별 보기가 좋은 밤이었습니다. 별을 잘 보려면 두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돼요. 하나는 날이 맑아야 되고 두 번째는 달이 없어야 돼요. 달이 밝으면 별빛이 힘을 잃습니다. 어저께는 달이 굉장히 늦게 떴어요. 보름이 지나면 점점 늦어지잖아요. 오늘 낮에 보니까 반달이 떴더라고요. 오늘 새벽쯤 되가지고 올라와서 오늘 낮에 반달이 떴어요. 동요 중에서도 낮에 나오는 반달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이 반달은 거의 다 그렇게 낮에 뜨게 돼요. 하여튼 11시 반쯤에 나와서 하늘을 봤더니 오래간만에 별들이 잘 보였어요. 최근에 좀 흐렸지 않습니까. 그 중에 북두칠성이 굉장히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거의 머리 꼭대기로 해서 약간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여러분도 오늘 한 번 가서 보십시오. 오늘도 거의 똑같이 북두칠성이 뜰 겁니다. 일곱 개의 별인데 그 중에 몇 번째 별인가는 잘 안보일 수도 있는데 어제는 날이 맑아서 그런지 잘 보였습니다. 이 별들도 사람이 이름을 붙인 거죠. 서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별들인데 늘 그런 형태를 이루고 돌아가고 있어요. 사실은 지구가 도는 거죠. 그래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있습니다. 북두칠성만이 아니라 다른 별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별들을 보고 있을 때는 여러분들도 다 느끼겠지만 정말 아득하잖아요. 다른 불평, 불만이 다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부부싸움 했을 때 밤하늘을 보세요. 다 용서가 됩니다. 다른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 경험이 그와 같은 거죠. 우리가 못해서 그렇지 별을 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경험이 하나님인거예요. 그 별을 창조하고 우주를 완성할 그 분에 대한 영적인 시각이 열리는 거니까 어떻겠습니까. 욥이 ‘난 이제 입을 다문다. 더 말하지 않겠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 경험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나오는 고백입니다.


1절~5절까지 설명을 드렸고 다음 6절~14절입니다. 욥이 입을 다물겠다고 했기 때문에 끝나면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또 말씀하세요.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절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이렇게 쭉 가지요. 이거는 38장 1절~3절에 나온 것이 똑같이 반복되는 겁니다. 여기서 끝나도 되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반복되는 이유는 여기서 좀 더 확인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순히 욥의 논리가 ‘내가 지금 이유도 없이 고생을 해서 정말 힘듭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나를 공격하기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견디기 힘드니까 어쩝니까.’ 이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할 존재로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확인하려고 다시 한 번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입장이라는 건(앞에서 비슷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내가 당한 재앙에는 이유가 없다.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을 더 밀고나가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한 분으로 이해가 되는 거죠. 그러한 논리를 이 본문이 깨는 겁니다. 8절 보십시오. ‘네가 내 공의를 부인 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이게 그 이야기입니다. 욥은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회개하라.’고 하는 친구들의 논리에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는 옳다고 하는 것을 계속 강조했는데 그게 결국은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거죠. 여기에 대해 짚는 겁니다.


마지막 15절~24절이에요. 지금까지 중요한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15절~24절에서는 이상한 동물이 하나 나와요. ‘베헤못’이라고 하는데 성경의 각주에 보면 ‘하마로 볼 수 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동물인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다만 여기 묘사되어 있는 걸로 보면 하마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41장에는 또 다른 동물 ‘리워야단’이 나오는데 이건 악어로 볼 수 있다고 해요. 이 두 동물에 대한 이야기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락됩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는 38장~41장에 이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총괄하는 뜻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여기 15절~24절까지 하마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걸 제가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사실은 가나안땅에 하마는 없어요. 아마 악어도 없었을 겁니다. 이건 다른 지역의, 이집트의 나일강가라든지 그리고 바벨론 문명인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이 있는 큰 강에 그런 동물들이 있을 법하죠. 그래서 그런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문명이나 이집트문명, 근동의 여러 문명에서 하나의 전승된 형태로 많이 내려왔죠. 그걸 욥기를 기록한 사람이 차용해서 이 단락에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엄청난 힘을 가진 동물을 이야기함으로써 이 세계와 자연은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는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거죠. 지금 우리들은 성경을 기록했던 고대인들에 비해서 자연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아요. 심지어는 달에까지 사람이 갈 정도고 얼마 안 있으면 화성까지 가지 않겠습니까. 곧 우주여행도 할 것 같고요. 그래서 고대인들에 비해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뇌 과학도 많이 발전했어요. 그러나 아주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 생명, 자연, 우주, 이런 것들은 초월적입니다. 왜 그러냐는 것을 이 시간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건 다음 주에 조금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많이 해야 될 다른 주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세계의 초월성에 대해서요.


한 마디 힌트만 드리고 넘어가면 이렇습니다. 이 세계는 전체를 다 봐야만 비밀이 드러나는 거예요. 마지막 종말까지죠.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우리가 기다려봐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있는 것인데 그 때 가봐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아는 거예요. 이게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굉장히 과학적으로 알고 있는 여러 가지들 있잖아요. 뉴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어, 호킹 같은 사람 등등, 그 외에도 수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있잖아요. 그게 잠정적인 진리예요. 지금까지의 이 구도에서만 아는 거고 훨씬 미래, 몇 억년 뒤에는 이것의 근원적인 비밀을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제 설명이 조금 비약이 된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런 면에서 초월적이라는 거예요. 한 마디 더 해야겠네요. 우리가 흔하게 하는 말이 있어요. ‘물고기가 물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하는 철학적인 질문이 있어요. 물고기는 물과 일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물이 뭔지를 인식할 수 없는 거죠. 우리만 물과 물고기를 구분해서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물고기가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 세계에 들어가 있어서, 여러 사물을 구분하긴 하지만, 그것의 근원적인 실체는 우리를 뛰어 넘는 겁니다. 우리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물속에 있는 물고기와 비슷한 거예요. 죽음이 뭔지, 가족을 이루는 것, 나무와 동물의 차이는 뭔지, 왜 소나무이면서 민들레도 되고 고양이도 되는 그러한 생명체는 없고 각각 다른지 등등에 대한 모든 비밀은 종말에 드러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세계는 우리를 초월해있어요.


좀 딱딱한 이야기였습니다만 이 욥기를 기록한 사람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도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베헤못’, ‘리워야단’을 언급하면서 ‘네가 이걸 아느냐.’라고 하는데, 물론 겉으로 보면 저 동물이 뭔지를 알죠.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근원적으로 그가 어떻게 이 자연 속에서 그러한 힘을 발휘하고 번식하는지 아느냐. 이 세계는 우리 사람을 초월에 있다.’ 조금 신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우리를 끌어가고 있다.’ 그걸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인식하게 되면 무죄한 자의 고난과 부조리처럼 보이는 세상 가운데서도 그런 것들과 부단히 투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공부 처음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생겨서 이 욥기가 기록됐다고 말씀드렸죠. 바벨론 사건이요. 이건 하나님 백성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건 욥이 당한 재앙과 민족적으로 비슷한 차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신비로운 통치를 놓치지 않은 고대 성서기자들의 안목이 욥기에 빼곡하게 들어있습니다. 그 시각으로 오늘 현재 우리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현실의 삶을 버텨낼 수 있고 또 당연히 버텨 내야만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이제 시나브로 끝나가고 있는 욥기서 40장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이런 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늘 아는 것 같이 생각하던 말씀이 새롭게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 영혼이 정말 필요한 영의 양식으로 공급 받는 것, 바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에 온전히 기대서, 거기에 근거해서 우리가 숨이 붙어있는 동안 주님의 자녀들로 건강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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