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바울의 변증(1)
(22:1-21)      
4월10일

유대인 바울
이제 사도행전은 저술 목적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는 국면으로 돌입하고 있다. 유대인 군중의 폭력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었던 바울이 로마 파견대장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다음, 그 군중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바울의 이 해명(아폴로기아스)은 곧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신학이며 기독교 변증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바울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훨씬 후대에 살았던 헬라파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들의 역사 해석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아주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 것으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간다. 이게 곧 누가의 역사해석인 셈이다.
1) 누가는 바울이 히브리말로 연설을 시작하자 군중들이 더욱 조용해졌다고 한다. 히브리어는 바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2) 이 연설의 첫 마디가 “나는 유대인입니다.”라는 사실에서도 역시 누가의 강조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는 그 내용을 자세하게 언급한다. 3) 바울은 다소 출신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다. 바울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는 없었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제 바울이 팔레스타인 유대인 못지않게 유대적인 전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전달된다. 4)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다. 가말리엘은 주후 25-50년에 활동한 율법 학자였다. 5) 기독교인을 박해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6) 기독교인들을 잡아오라는 의회의 공문을 갖고 다마스쿠스에 갔던 적도 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들은 크게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반드시 사실에 근거한 것만도 아니다. 1)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랐다는 말은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니다. 2) 특히 (불트만에 따르면)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3) 바울은 율법에 정통하기는 했지만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랐다. 누가는 바울에 관한 연대기적인 자료를 갖고 사도행전을 집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강조점에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누가가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가 하는 점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은 곧 위에서도 언급했고 앞으로도 반복되겠지만, 바울이 유대교와 크게 대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더 나아가서 그의 신앙이 유대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친 유대교적 성향은 이제 다마스쿠스 도상의 사건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반전된다. 그렇지만 반유대주의로의 반전은 아니다.

바울의 회심
사도행전에 바울의 회심 사건은 9장, 22장, 26장에 각각 세 번에 걸쳐 진술되어 있다. 9장은 3인칭으로 다루고 있고, 22장과 26장은 1인칭으로 다루고 있다. 만약 사도행전이 일반 문학작품이라거나 단순한 역사책이라고 한다면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으며,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쓴 사람이라고 한다면 삼류 저술가일 것이다. 아마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반복했을 것이다. 그 의도는 사도행전의 독자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밝혀질 수 있는데, 지금 우리는 그걸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거칠게라도 설명한다면, 앞부분은 바울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며, 뒷부분은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형편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본문도 역시 바울의 회심 사건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바울의 회심 장면에 대한 9장의 묘사와 22장의 묘사가 큰 틀에서는 같지만 작은 부분에서 다른 점들이 눈에 뜨인다. 다마스쿠스를 향해서 가고 있던 바울 일행에게 일어난 이상한 현상은 하늘에서 내리는 찬란한 빛과 예수가 말하는 소리였다. 바울은 이 빛과 소리를 모두 인식했지만, 일행은 좀 달랐다. 9장의 일행은 소리만 들었고 빛을 못 본 반면에, 22장의 일행은 빛은 보고 소리를 듣지 못했다. 26장에서는 그런 자세한 언급이 생략되었다. 누가는 지금 바울의 일대기를 작성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모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이 회심 이후에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 대목(17절)도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갈 1:17).    

아나니아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빛과 소리로 예수를 경험한 바울이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9장과 22장이 똑같이 전한다. 26장에서는 이 이야기가 빠졌다. 9장의 아나니와 바울은 소극적인 관계로 설명되지만 여기 22장에서는 훨씬 적극적인 관계로 묘사된다. 누가는 아나니아의 됨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거기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거기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12절). 이런 묘사는 9장에 없던 것이다. 아나니아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으며,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건 곧 바울도 역시 그런 율법, 유대인과 우호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편집의도이다. 이런 편집 의도는 그 뒤로 계속된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뜻하신 바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 없으신 분을 알아보게 하시고, 또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당신을 택하셨습니다.”(14절). 이런 설명을 읽은 독자들은 바울이 바로 유대인의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은 곧 바울이 유대인들과 대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뿌리에서 시작했다는 뜻이다. 누가는 거듭해서 바울이 유대적인 전통과 깊이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변호하고 있다.
누가에 따르면 바울의 선교활동은 유대인의 하나님에 의해서 그 정당성이 확보된 것이다. 바울은 이제 자신의 체험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6b절에 따르면, 그 당시 선교활동의 핵심이 정확하게 요약되어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리시오.” 예수의 이름, 세례, 사죄가 곧 복음 전파의 알맹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복음이 결코 반유대교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가는 바로 그걸 전하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앞에서 한번 지적한 것처럼 바울은 다마스쿠스 회심 이후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누가는 그 사실을 외면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몇 번 왔었는지, 그리고 바울의 신비로운 경험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에 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쨌든지 그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과 그의 신비체험을 연결하고 있다. 이 신비체험은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사건일 것이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교인 하나가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 채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고후 12:2).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신비체험이 성전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회심 이후 3년이 지난 다음에 아주 조심스럽게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다. 겨우 보름 동안 지내면서 오직 한 사람 야고보만 만나고 왔다.(갈 1:18 이하). 그리고 14년 후에 다시 디도를 데리고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 방문이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종교회의일 것이다. 그 당시에도 바울의 예루살렘 활동은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오늘 본문이 설명하는 바울의 성전 체험 이야기는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누가에 의해서 합성된 셈이다. 누가가 이렇게 편집한 이유도 역시 바울의 가르침은 유대교와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 놓여 있다.
성전에서 바울은 주님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어서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가거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를 증언하는 네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18절).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대교를 배척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명령은 무조건적인 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그 사실에 근거한다.
누가로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정도로 유대교에 투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바울이 변절자 같겠지만 누가 시대에는 여전히 유대교의 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유대교를 부정한 사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누가는 이런 갈등을 해결한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연설을 마쳤다. “나는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낼 터이니 어서 가거라.”(21절)
바울이 죽음을 겨우 모면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 것은 원래 성전 모독이었는데, 그는 이 변증에서 그것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고 대신 주로 다마스쿠스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집필할 때는 이미 성전이 파괴된 이후라서 성전 모독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전파괴 이전과 이후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설정하려는 누가의 해석학적 긴장이 바울의 연설에 담겨 있다. 지금 누가의 관심은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 공동체가 크게 다르지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에서는 그의 기대와 달리 기독교와 유대교가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누가는 바울에 의해서 토대가 잡힌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파악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 누가의 역사해석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역사적 진리 앞에서 절대적일 수 있는가!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