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정녀 마리아
-모정과 신앙 사이에서-
본문 1:26-56/ 참조 2:19, 2:35, 51

동정녀 탄생
예수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복음서 중에서 마태와 누가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겠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해본다면 복음서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는 아직 이 동정녀 탄생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출생 이야기에 대해서 별로 듣지 못했을 것이며,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은 이 사실을 비록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관심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다른 고대의 역사적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도 역시 기자들의 신학적 판단에 따라서 여러 이야기가 취사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출생에 관한 똑같은 이야기인데도 마태와 누가의 전개과정이 약간 다르다. 마태는 아버지인 요셉을 중심으로, 누가는 어머니인 마리아를 중심으로 이 사건을 보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사가 요셉을 찾아가서 아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전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를 찾아갔다는 사실에서 이 두 복음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흔히들 말하듯이 마태복음은 유대교적 전통을 중요시 하지만, 누가복음은 여자나 어린아이 같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 차이는 예수 탄생 사건을 제일 처음으로 인식하고 찾아온 이들이 누구냐 하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마태복음에는 그 당시 최고의 현자인 동방박사였지만, 누가복음에는 가장 민중적인 목동들이었다.
그런데 마태나 누가나 모두 마리아가 처녀로서 남자 아이를 출산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 무엇이 사실인가? 도대체 마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무리 비과학적이라고 해도 성서에 기록된 말씀이니까 반드시 사실로서 믿어야만 신앙적인 태도인가? 아니면 이런 보도는 고대인들의 신화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트만이 말하는 대로 탈(脫)신화화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인가? 참으로 곤란하고 답변하기 힘든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정통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초자연적 사건이기 때문에 남자와의 관계없이 이루어진 마리아의 임신은 사실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이 세상 모든 현상들이 과학이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에 성서의 사건을 이렇듯 과학과 자연현상보다 상위 개념으로 설정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리고 경솔하게 역사비평이나 자연과학적 논리로 성서 사건을 재단하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그러나 교회 안의 많은 지성인들은 마리아의 동정녀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이들은 성서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 당시의 자연 이해나 풍습에 제한 받는 보도가 적지 않게 있다.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는 보도나 남자를 여자의 머리라고 하는 진술은 아무리 근본주의적인 성서관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문자적으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지성적인 신자들은 이 사건을 믿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도 못하는, 일종의 뜨거운 감자처럼 옆으로 밀어놓은 채로 어정쩡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에 기록되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모든 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으려는 입장이 정당하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성서 사건을 폄하해버리는 태도도 역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동정녀 출생 설화에 담긴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의 원래구조는 성령을 주어로 하는 문장과 마리아를 주어로 하는 문장이 원래 하나로 묶여 있었다. 사도신경의 이 한 구절에는 기독교 사상이 걸어온 여러 전승 역사가 담겨있는데, 이 자리에서 그런 과정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지만, 단 이 신앙고백이 말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이 마리아 동정녀라는 내용이 이렇듯 신앙고백에 들어가고, 더 나아가서 마태와 누가복음서에 개입된 이유는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이단이 초기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즉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은 하나님 자체인 예수가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이 세상에 왔을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신과 불완전한 인간을 하나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는 인간과 똑같은 육체가 아니라 그림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이단들 앞에서 기독교 정통 교부들은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예수가 허공에 뜬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체로 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를 일컬을 때 동정녀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초자연적 출생 설화를 위대한 인물과 연결시키는 헬라적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다. 복음서 중에서도 마가와 요한은 동정녀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사도바울도 역시 그렇다(갈4:4). 즉 초대교회에서 동정녀 문제는 신앙의 본질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 마리아가 동정녀있는지, 아니었는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결코 아니다. 성서와 초기 기독교의 관심은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마리아 찬송
누가복음은 이종 사촌간인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그 유명한 마리아 찬송(47-55)을 부른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51-53). 그 당시 일반적인 풍습에 따르면 대략 12살 정도의 소녀에 불과한 마리아가 이런 노래를 직접 불렀다고 본다는 것은 무리이다. 아마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이 이렇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마리아 사건을 통해서 자리를 잡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듯 어떤 사건이 한번 발생한 것으로 모든 계시가 완료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후대에 해석되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어 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도 여전히 성서가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또한 교회의 권위가 성서보다 우위라는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서는 일종의 문자로서 완전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인 마리아 찬송은 그야말로 마르크스와 엘겔스에 의한 공산당 선언에 못지 않은 혁명적 역사이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을 끌어내리고 낮은 사람들을 높인다는 이 고백이 로마 체제 하에서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기득권자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만약 이런 마리아 찬송이 우리의 신앙에 체화되어 있다면 오늘의 이 공연한 경쟁질서에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끌어내릴 권세에 자기 목숨을 걸 미련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마리아의 찬송 이후로 2천년이 흘렀는데도 역시 이 세계는 늘 이런 높은 자와 낮은 자의 위계질서가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투쟁이 과열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자칫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고 해도 늘 약속으로만 끝나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또한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말만 앞세우는 하나님이라면 참으로 무능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서를 읽은 우리의 시각을 좀더 심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마리아 찬송은 인간의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추구하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오늘 우리는 이 현실을 예민하게 들어야 보고 분석해야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듯이 우리가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이루어낸 그 자리를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것 자체가 이미 밑으로 끌려 내려온 것이다. 무엇을 이룸으로써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 그 욕망과 교만은 실상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또한 참된 생명은 우리가 성취하려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 마리아의 찬송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해서 프롤레타리아가 그 이전에 기득권이 누렸던 모든 권력을 쟁취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그것 자체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그 혁명이 성공한 순간에 또 하나의 권력 집단이 성립될 뿐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20세기의 공산주의에서 여실히 보았다. 성서 기자들이 보는 혁명은 근본에 대한 인식을 전혀 다른 데 두는 것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부활 생명이야말로 그 어느 것으로도 능가될 수 없었던, 이 세상의 악한 권세를 허물어 버린 하나님의 혁명이며, 하나님의 승리였다.

모정과 신앙 사이에서
다시 인간 마리아에게로 돌아가 보자. 마리아가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말이 없다. (마리아의 인간적 고뇌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볼 것). 어린 예수에게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마음에 새겨두었다(2:19, 35, 51).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를 믿어야 할 모든 인간들 중의 하나였다. 신앙이 모정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혈육이 있다. 이러한 가족이 험악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토대가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신앙적인 차원에 들어 있다. 우리 가족 사이에서 신앙 문제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 교회 안에서 신앙 문제가 본질로 잡리잡고 있는지. 아니면 이런 저런 인간적인 끈끈한 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지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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