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므온
-신앙과 기다림-
본문 2:21-35

정결의식
오늘 본문에는 예수와 관계된 유대교적 세 가지 의식이 그 배경에 놓여 있다. 첫째, 예수가 출생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다(21). 둘째, 예수는 장남으로서 정결의식에 참여해야 했다(23). 셋째, 출산 이후의 여자는 정결의식을 치러야한다(24, 레 12:18참조). 종교 의식이라는 것은 굳이 여기서만이 다루어지거나 유대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모든 종교는 이런 의식을 통해서 어떤 종교적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특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런 종교의식은 실제적인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대교의 예를 들자면 할례, 정결의식, 먹거리의 구분이 모든 실제적인 삶의 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유대 남자 어린이들은 태어난 지 팔일만에 성기의 끝부분을 잘라내는 할례 의식을 행하는 데 이것은 위생학적으로 열악한 중동 지역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엄격하게 구별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건강을 지켜나게 된 것이다. 예컨대 돼지고기는 지방질이 많아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중요한 영양분이기는 하지만 부패하기 쉬운 고기일 뿐만 아니라 유행병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아예 종교적으로 단절시켜 놓은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잘된 조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의식은 오늘 “아기를 주께 드린다”(23)는 구절에도 있듯이 인간의 생명을 거룩하게 여기는 발상과 연결된다. 생존이 보장된 현대가 오히려 생명을 기계적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거룩성을 상실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시므온이라는 선지자는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의 정결의식을 드리고 있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그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25-32).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감격하여 찬송(29-32)을 부른다. 이 모습을 본 마리아와 요셉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시므온에게서 축복을 받는다(33-35). 시므온은 예수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예언한다. 하나는 예수가 사람들에게서 비방받는 표적이 되며, 다른 하나는 예수가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드러내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림
외면상 시므온이 유아기의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은 늘 그럴만한 사연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증언이 바로 이런 사연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으로서 오늘의 사건을 경험할만한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진리 경험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게 아니라 대개의 경우에는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서 일어난다. 물론 그 준비라는 것이 우리가 설계하고 예상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또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사 40:1이하 참조). 즉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아마 이 시므온은 낡은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에온)가 오기를 기다리는 유대의 묵시문학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외적인 힘의 질서에 의해서 움직이는 제국의 틈바구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이런 정치적 힘이 아니라 초월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그 때를 기다렸다. 특히 묵시문학적 전통은 유대 민족이라는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우주론적 새로운 질서를 희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사상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사상이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신학계의 일반적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 신앙으로 각인된 기독교는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꾸려 가는 복지사회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지평에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것의 신화적 표상이 곧 재림사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할 때와 똑같이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이 생각이 비록 신화적 형식이긴 하지만 그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본질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초월적인 힘이 인간와 이 우주의 역사에 개입해서 이들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시작한다는 기독교의 기본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하듯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은 오늘의 시대를 미완성으로 본다는 말이다. 이는 곧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로는 완전한 위로를 얻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삶이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지속되기를(status quo) 바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음
시므온이 한평생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릴 수 있었던 힘은 성령에 있었다.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 것도 역시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25-27절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한다. 말하자면 성령의 현상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주관적 심리상태가 아니라 이런 인간적 경험을 훨씬 뛰어넘는 영적 실제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길을 우리가 예측할 수 없듯이 성령의 활동도 역시 그렇다. 다만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완성시키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생명현상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시므온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시므온의 찬송
성전에서 예수를 본 시므온은 “내 눈이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본 사람만이 사실을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시므온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므온의 고백은 시므온이라는 한 인격체를 뛰어넘어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된다. 예수를 만나본 사람은 구원을 본 것이다. 시므온의 입을 통해서 이제 예수를 통한 구원이 설명된다. 즉 예수는 곧 이방(어둠)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지금 낮만이 아니라 밤에도 전기를 통해서 빛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리 그런 빛으로 밝힌다고 해도 역시 진리가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은폐의 드러남인 진리(알레테이아)는 그냥 자연상태에서 우리의 인식론적 통찰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자기를 열 경우에만 드러난다. 우리 기독교인은 진리가 바로 예수에게서 드러난다고, 즉 계시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시므온의 찬양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고백된다. 이방의 빛은 곧 이스라엘의 영광(신비)이다. 이제 예수에게서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가 진리의 세계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기다림의 정체
어릴적 예수에게서 이미 구원을 선취적으로 경험한 시므온의 기다림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 말은 곧 우리의 기다림이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기다림의 정체는 매우 불안하다. 목사들도 역시 교회성장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자기 목회 역량이 드러나기 때문에 매우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다림은 그것이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오늘 시므온과 같은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니체가 말하듯인 “초인”의 미래를 기다리거나, 베게트 희곡집 제목처럼 허무의 늪에서 무언가 막연한 “고도우를 기다리며” 살아가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구체적으로 나사렛 예수, 그의 부활 생명을 기다린다. 이런 기다림이 실제로 우리 삶의 근본이 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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