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유대인들의 음모 앞에서
(23:12-35)        5월8일

바울의 생질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파견대장이 소집한 산헤드린 의회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자중지란에 의해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바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에게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바울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곧 바울을 암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였다. 산헤드린 의회와 유대교 에서 실제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바울을 분명하게 옹호한 상황에서, 곧 이어 유대인들이 바울을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구성이 아니다. 그러나 누가는 자신의 글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진행되는가보다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서 바울을 변증하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이런 논리적 비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누가는 바울을 살해하기로 서원한 일단의 유대인들을 자신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이 4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원로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계획을 전했다. 바울을 파견대장이 주둔하고 있는 안토니오 성 밖으로 나오게만 해준다면 자신들이 죽이겠다고 제안했다. 누가는 그 제안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그 자가 이곳에 이르기 전에 죽여 버릴 준비를 다 해 두었습니다.”(15b) 우리는 지금 이런 누가의 보도가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로마의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는 마당에 로마의 고위 관료인 파견대장이 관여하고 있는 송사 문제를 암살이라는 극단의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유대인들의 발상은 그렇게 개연성이 높지 않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위험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다는 건 분명하며, 그래서 그들이 바울을 제거하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는 예측은 가능하다.
이들의 살해 음모는 시도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울의 생질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생질은 감옥의 바울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고, 바울은 생질을 파견대장에게 보냈다. 예루살렘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이 파견대장은 바울의 생질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파견대장은 그 청년의 손을 잡고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나에게 전하겠다는 말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19절) 생질은 파견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전한다. 그것도 좀 장황하게 전한다. 좋은 글쓰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반복을 피하는데, 누가는 지금 그런 글쓰기의 기초를 무시하고 있다. 바울의 생질은 유대인들의 음모를 전하면서 파견대장이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할 방식까지 자세하게 지시한다.
갑자기 등장한 바울의 이 생질에 대해서 누가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어떤 신약학자는 이 생질을 바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누이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누이는 바울 가족이 길리기아 다소로 이주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결국 다소로 가지 않고 그냥 예루살렘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뒤늦게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어렸을 때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 누이 집에 거처했다.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고 볼만한 근거는 별로 없다. 우리는 바울의 생질이 왜 이 순간에 등장했는지 알 수 없으며, 누가의 편집의도에 따르면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누가는 지금 폭력적인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도 바울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을 사도행전의 집필 목표로 삼고 있다.
우리는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생질을 통해서 바울과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추정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청년이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 계획을 전해 들었다는 건 유대인들이 이 계획을 공개적으로 추진했거나 아니면 이 청년이 유대교의 고급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전자의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분명히 로마의 치안을 허무는 범법 행위에 관한 모의를 그렇게 쉽게 노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생질이 유대교의 고위 당국과 깊숙이 연결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은 곧 원시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대교의 고위 집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까지 암시하고 있다. 유대교 고위 인사들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비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 청년을 통해서 바울을 도운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의 이런 추정은 학문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니까 이런 정도로 넘어가자.
예루살렘의 파견대장은 바울의 생질로부터 유대인들이 꾸미고 있는 살해 음모 사건을 전해 듣고, 그 청년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한다.(22절) 사실 누가의 이런 묘사도 글쓰기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무의미하다. 삼촌을 살해하려는 고급 정보를 파견대장에게 전달한 이 청년이 그 사실을 떠벌릴 리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파견대장이 이 청년에게 입단속을 지시했다는 식으로 이 글을 끌어간다는 것은 누가의 편집의도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즉 누가는 지금 유대교의 태도와 로마 관리들의 태도를 비교하는 중이다. 유대교는 바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면서도 적대감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데 반해서, 로마 관료는 바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그는 이제 바울을 열광적인 유대인의 음모로부터 안전하게 가이사리아에 있는 펠릭스 총독에게 인계하기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펠릭스 총독에게로
파견대장은 백인대장 두 사람을 불러서 바울을 호송할 병력을 준비시킨다. 그가 준비시킨 보병 2백 명, 기병 70명, 투척병 2백 명의 병력은 예루살렘 치안군의 절반에 해당된다. 누가는 이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과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파견대장이 상황을 적절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또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소심하게 반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아무리 유대인들의 살해음모에 대한 정보를 알았다 하더라도, 도합 470명의 병력을 이런 일에 사용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파견대장이 바울의 안전에 최선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파견대장의 이런 태도는 그가 펠릭스 총독에게 보내는 공문서 내용에서 두드러진다. “글라우디오 리시아는 총독 펠릭스 각하께 삼가 문안드립니다. 호송되어 가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살해당할 뻔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해 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이유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아보려고 그를 유대인의 의회로 데리고 갔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그가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을 당했을 뿐 사형을 받거나 감옥에 갇힐 만한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구미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저는 그를 각하께 보내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도 각하 앞에서 직접 그를 고발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26-30)  
우리가 앞에서 누가의 편집의도를 언급하면서 몇 번 확인 것이지만, 이 공문서의 내용은 누가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누가는 바울이 유대교로부터 당하고 있는 부당한 박해로부터 바울을 변호하는 걸 궁극적인 목표로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이런 목표는 예루살렘 그리스도교와 바울 사이에 놓인 갈등 해소에도 적용된다. 공문서에서 누가는 바울에게 사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만한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곧 80년대의 헬라파 그리스도교 교회가 처한 삶의 자리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유대교와 헬라 그리스도교 교회는 서로 간에 적대적으로 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이런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상황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 군인들은 그날 밤 즉시 떠난다. 그들은 야간 행군으로 예루살렘에서 62km 떨어진 안티바드리스까지 갔다. 거기서 보병들은 돌아가고 기병들이 바울 호송의 책임을 맡는다. 기병들은 계속해서 그곳에서 32km 떨어진, 즉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94km 떨어진 해안도시 가이사리아에 도착해서 바울을 펠릭스 총독에게 인계했다. 그런데 하룻밤에 보병들이 62km를 걸었다는 건 아무리 상황이 급박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누가가 팔레스틴의 지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한다.
펠렉스 총독은 바울에게 어느 지방 출신인가, 하고 기초적인 심문을 한다. 그는 바울에게서 길리기아 출신이라는 대답을 듣고 더 이상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를 가두었다. 이 장면에서 길리기아 출신이라는 사실이 왜 적시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길리기아는 갈라디아 지역의 동남쪽의 한 지방을 가리키는데, 그 지방에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길리기아는 큰 의미가 없다. 누가는 펠릭스 총독의 처리방식이 아주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점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다. 바울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전혀 없었던 펠릭스 총독은 앞으로 바울의 공판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점들이 펠릭스의 초기 심문에 대한 묘사에 암시되어 있다.
누가에 의해서 헬라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제시되고 있는 바울은 지금 두 거대한 집단 사이에 놓여 있다. 하나는 파견대장과 펠릭스로 대표되는 로마 관리들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교 산헤드린 의회이다. 로마 관리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아주 공정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반면에 산헤드린은 적대적인 입장을 보인다. 누가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관리들은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교에 도움이 되는 집단이지만, 유대교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누가의 견해에 따르면 유대교와의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의 원인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유대교에 있다. 누가는 이런 기조로 사도행전을, 특히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소동으로 인해 체포된 이후의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로마정권이라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 필자가 보기에 초기 그리스도교는 두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하나는 가능한 주변 세력들과 공연한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될 경우에 전투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은 주로 전자의 성향을 보이지만 유대교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를 향한 바울의 실제적 태도는 후자에 가깝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도 역시 주변 세력과 이런 긴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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