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몬 베드로
(사람 낚는 어부)
본문5:1-11, 참조9:18-21, 22:54-62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오늘 우리에게 베드로는 종교적인 거인으로 다가오지만 원래 그는 아주 평범한 어부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이 된 데는 아주 특별한 분과의 만남이 있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게네사렛(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평범하지만 그가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고기만 잡고 인생을 사는가, 아니면 사람을 낚는 일(생명)로 방향이 전환되는가 하는 문제가 이런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이 사실의 보도를 너무 독립적인 것으로만 바라보면 안 된다. 성서의 보도는 어떤 맥락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생략한 채 거의 단순 보도에 머물기 때문에 독자들이 인간 행동의 비약을 그들만의 특이한 신앙적 행위라고 보거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물론 역사는,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신비한 힘에 이끌려 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합리적 사고방식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늘 그럴만한 이유를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그 행간을 잘 짚어내면서 따라 읽어야만 한다.
오늘 이야기의 무대는 게네사렛 호숫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곳으로 모여들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몇몇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끝내고 그물을 챙기고 있었다.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말인데, 아마 베드로 일행도 그런 소문을 듣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직업의 특성상 이런 말씀 듣는 일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 같은 장면이다.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회당에서는 설교의 길이 막힌 예수가 이젠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장면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도 역시 영국 성공회에서 설교할 수 없게 되자 길거리로 나왔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비공식적인 방식으로도 전달된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예수는 말씀을 마친 후에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이르신다. 시몬은 이미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그날따라 헛수고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낯선 선생의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그물을 던졌다(요21참조).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영적인 교감이 있었단 말인가?
그물을 끌어 올려보니 그물이 찢겨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 동료 어부에게 도움을 청하여 함께 그물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고기가 두 배에 가득 찼다. 우리는 이게 어떤 현상이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어떤 주석자는 예수의 통찰력이 고기떼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러한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이다.
이 현상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기를 많이 잡았으면 그것으로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됐을 텐데 왜 떠나라, 죄인이다 운운하는 것일까? 아마 베드로는 그물을 챙기면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을 듣고 이미 영적인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고기잡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아주 평범한 어부였지만 예수의 말씀이 갖는 구원론적 무게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룩한 체험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자신의 유한성(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은 전율한다. 그것이 때로는 시, 그림, 음악으로 표현된다. 예술가들은 그런 새로운 세계 경험을 어떤 형식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늘 놀라워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 말이 죄의식에 의한 불안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생명)의 세계에 대한 충격이다.

사람을 낚는 사람으로!
예수는 시몬에게 이렇게 이르신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나님(존재) 앞에서 갖게 되는 놀라움은 단지 그것으로 마감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철학적 사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의 전환을 요청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람을 낚는 과업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선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만을 선교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 교회에 한정된 일은 아니다.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생명을 일구어나가는 영의 활동이 곧 선교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이런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내버려둔 채 예수를 좇았다. 참으로 소중한 일을 발견한 사람은 그 이외의 사소한 일은 완전히 접어두게 마련이다.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이 한 가지 사실로 집중된다는 뜻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산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따르고, 사람을 낚는 일에 집중하는 걸 배워야 한다.
7,80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리챠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은 친구 갈매기들과 달리 비상(飛翔) 훈련에 집중한다. “높이 나르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 결국 유한한 인간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상의 가시적인 것만을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런 것이 상실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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