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풍병자
-죄의 용서와 몸의 치유-
본문5:17-26, 참조17:11-19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임하는 일이 있다. 혹은 이 중풍병자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눅4:40-41) 듣고 자기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청했는지도 모른다. 예수는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그의 병을 고친다.

1. 질병(고난)과 죄
복음서에는 왜 그렇게 많은 장애자, 환자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다른 종교의 경전과 비교해 보면 아주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 문제는 아마 그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 이해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질병과 죄를 동일시했다. 이미 욥의 친구들이 제기한 논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 임한 고난과 질병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예수의 제자들도 선천성 시각장애인을 보고 “누구의 죄냐?”라고 물기도 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는 몸이 병들었다는 사실 자체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 때문에 훨씬 심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보인 반응은 두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이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비난하는 목소리이다. 병들고 무식하고 가난한 게 죄일까?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또 다른 반응은 이 중풍병자를 향한 동정심이다. 원인이야 어쨌든지 참 불쌍하다고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은 이런 주변의 동정심으로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정심에도 함정이 숨어 있다. 중풍병자를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늘 틈이 놓이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중풍병자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도덕심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2. 죄의식의 문제
중풍병자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몸이 병들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정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문제가 훨씬 심각할지도 모른다. 몸이 병들었기 때문에 마음도 병들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에 몸도 병들게 되는 것인지, 또는 이 두 증상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왜곡된 죄의식이 우리 인간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독교의 종교성은 죄의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는 신자들에게 죄의식을 강화시켜 나갔다. 툭 하면 “너는 죄인이야!”라고 욱박질렀다. 그게 극단적으로 신자들의 의식을 사로잡게 되어서 교회에 나와 기도하기만 하면 눈물을 흘린다. 성찬식에 참가하기만 하면 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는 시늉을 한다. 인간에게는 <매조키즘>이라는 심리요소가 있기 때문에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정화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 죄 문제가 왜곡된 상태에서 여전히 신자들의 의식에서 작용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서 회개는 기본이며 본질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적 죄성을 깊이 인식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는 늘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이런 죄의식의 강화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3. 죄의 용서
사람들이 지붕의 석가래를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방안의 예수 앞에 내려놓자, 예수는 이들의 믿음 보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20).
우선 중풍병자의 입장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들어보자. 이 사람은 자발적이었든지 친구들의 강권이었든지 이제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 앞에 등장했다. 그곳에는 이미 병과 죄를 인과율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신학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결정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는 그 신학자들 앞에서 이 중풍병자는 아마 자신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죄가 용서받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실제로 당하는 육체적 질병보다 훨신 감당하기 힘들었던 마음의 병을 제거해주는 소리였다. 이 사람이 예수의 사죄선포를 듣고 그대로 믿었는지 아니면 얼떨떨해 했는지 성서가 묘사하고 있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의 병이 실제로 치유된 것을 보면 우선 마음의 병이 씻겨졌다고 보아야 한다.
“사죄 선포”는 예수의 독특한 권한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런 권한을 위임받은 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이다. 병든 사람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한 사람은 예수뿐이었다. 그가 이렇게 그 이전에 없었던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아버지라고 일컬었던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자기 공동체로부터 구별해버리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전통에 근거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뜻에 자기를 던질 수 있었다.
사실은 이 중풍병자의 몸이 치유된 결과보다는 사죄선포를 받고 마음의 병이 씻겨진 게 오늘 사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건강은 영의 건강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선언이 이제 중풍병의 치유에서 증명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를 잘 믿으면 이렇게 병이 낫는다고 설명하는 건 핵심에서 비껴나느느 일이다. 사람들은 성서를 읽을 때 늘 그런 것에만 호기심을 나타낸다. 예수가 호수 위를 걸었다면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면서? 동정녀가 아기를 낳았다면서? 이런 일들은 경우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일은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고 어떤 사건은 자연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런 성서의 내용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데, 단순히 <호기심 천국> 정도의 생각에 머물러 버린다면 성서의 깊이를 놓치는 셈이다.    

4. 신성모독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선포가 있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절).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발할 때의 죄명이 바로 <신성모독>이었다. 유대교의 이론에 전문가인 서기관(교법사)과 실천에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에게 예수의 이 사죄선포는 신성모독으로 비쳤기 때문에 예수는 이제 제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예수의 일이 어째서 신성모독인가? 예수가 사죄를 선포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위의 죄를 용서한 나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삼하12:13) 이미 예언자들은 이런 사죄를 선포했다. 아마 서기관들은 예언자의 시대가 끝났다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서 예언자도 아닌 예수가 사죄를 선포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하나님의 대언자요? 예언자요?”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참람>(신성모독)이라는 단어로 시비를 걸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나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할 때 적용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예수 당신은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켰오.”였다.
하나님의 일과 신성모독은 예리한 칼날로도 구별해내기 힘들 경우가 많다. 동일한 사건인데 보는 관점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신성모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신성모독이 하나님의 일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두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준거점은 무엇일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전통(율법)을 기준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생명을 기준으로 보았다.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예수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5. 일어나 걸어가라.
중풍병자는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는 말씀을 들었다.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은 이 사람에게 또 다시 들려온 말씀은 보기에 따라서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지가 마비되었던 사람이 그 자리에 일어나 제발로 걸어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의 마음이 변화된 상태에서는 이런 일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사실은 예수만이 아니라 우리의 많은 명의들 중에서도 이렇게 숨넘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 이들이 있었다. 이런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경우에 마음의 치유가 몸의 치유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중풍병자에게는 이제 몸의 치유는 이차적인 문제였다는 점이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이제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것은 장애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차별(왕따)이다. 중풍병이 치유되기 전에 이미 예수는 그를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으로 보았다. 죄인이 아니라.

묵상주제
서기관들은 장애인의 상황을 종교적인 전통으로 재단했지만, 예수는 단지 치유할 뿐이었다. 예수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닫혀진 전통의 논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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