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로마에서의 선교
(28:1-31)      
6월19일

멜리데 섬에서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을 단지 신앙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항해술과 통솔력에서도 영웅으로 묘사했다. 바울에 의해서 276명에 이르는 승객과 선원은 무사히 멜리데 섬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멜리데 섬 이야기로부터 이제 사도행전은 바울의 독무대로 바뀐다. 그동안 바울의 호송 책임을 졌던 율리오를 비롯한 로마 군인들과 선원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 바울이 죄수라는 사실을, 특히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아야 할 중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전혀 느낄 수 없다. 여기서는 오직 바울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선교사이며 설교자이고, 영적 카리스마가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멜리데 섬에서 벌어진 사건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건은 차가운 비가 내릴 때 일어난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섬 주민들은 바울 일행을 위해서 불을 피웠다. 바울이 모아온 마른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져 넣자 독사 한 마리가 열기 때문에 튀어나와 바울의 손에 달라붙었다. 사람들은 바울이 신의 징벌을 받아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바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를 신으로 여겼다. 리스트라 전도에서도 바울과 바르나바는 헤르메스와 제우스로 칭송받은 적이 있었다.(행 14장) 그러나 그때는 그 신격화 사건이 즉시 교정되었지만 오늘 본문에는 그냥 넘어갔다. 이교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이런 장면을 누가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이유는 바울에게 주어진 특별한 카리스마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사건은 바울이 많은 병자들을 고친 이야기이다. 바울 일행은 섬의 촌장인 푸블리오의 초대를 받아 사흘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푸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렸다. 바울은 안수기도를 통해서 그의 병을 치료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멜리데 섬의 많은 병자들이 바울을 찾아왔고, 바울은 그들까지 모두 고쳐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바울 일행에게 많은 선물을 가져왔으며, 항해에 필요한 물건까지 배에 실어주었다.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바울이 죄수가 아니라 위대한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위에서 언급한대로 율리오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만약 사도행전이 일반적인 역사서라고 한다면 멜리데 섬에서도 역시 율리오가 어느 정도 지휘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또한 멜리데 섬의 촌장에게서 초대를 받은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다. 난파선에서 구조된 모든 사람인지, 아니면 바울과 그의 친구들인지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말이 없다. 오직 바울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누가에게는 그런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보였을 것이다.

로마 그리스도인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 바울 일행은 ‘디오스구로이’ 호라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서 떠났다. 그들은 이탈리아 본토와 시실리아 해협의 본토 쪽에 붙은 도시 레기움에 도착해서 하루 쉬고, 다시 남풍을 등지고 북쪽으로 항해하여 드디어 보디올리에 닿았다. 그곳에서 ‘형제’(아델포스)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이다. 바울 일행은 그들의 간청으로 이레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 죄수로 호송당하는 처지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하는 질문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누가는 바울이 위대한 선교사였다는 사실을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저자의 이런 태도는 그 다음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바울 일행은 보디올리부터 육로를 통해서 로마로 들어갔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로마에서 69km 떨어진 아피오 광장까지 마중나오거나, 53km 떨어진 트레스 타베르네 동네까지 마중 나온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먼 길까지 그들이 마중을 나왔다는 것은 로마 공동체가 바울을 중요한 인사로 인식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 로마 공동체 지도자들과 바울 사이에 아무런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런 이야기의 객관성은 유지되기 힘들 것 같다. 특히 바울이 앞으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면 이 문제를 로마 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누가는 마중 사실만 간략하게 언급할 뿐, 그 이외에 대해서는 노코멘트이다.
바울의 편지인 로마서에는 바울이 로마를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사실과 앞으로 방문하고 싶다는 희망, 그리고 결국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겠다는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로마에는 이미 바울과 관계가 없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로마 공동체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교회 공동체에 늘 따라다니기 마련인 지도자들이 본문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가는 지금 로마 공동체를 부인하지도, 그렇다고 인정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다. 그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선교사인 바울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로마의 교회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데에 있다. 가능하다면 로마 교회도 역시 바울에 의해서 그 체계가 잡힌 것처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40년대 말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알려진 로마 교회는 누구에 의해서 설립된 것일까? 이에 관해서 역사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우리는 고국을 방문했다가 복음을 전해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의 어떤 익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로마에 전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바울을 초기 그리스도교의 최고 지도자로 알리고 싶어 한 누가로서는 언짢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설립된 로마 교회는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를 거쳐, 아카이아의 고린토 교회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장자권을 물려받게 된다. 그 뒤로 로마 교회는 온 세계의 어머니 교회로 자리를 잡았다. 동서 로마의 분리로 인해 동로마의 수도인  비잔티움 교회가 로마교회와 쌍벽을 이루기는 했지만 대세는 로마교회에 주어졌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전제한다면 그리스도교의 발전은 유럽 정치발전과 맥을 같이 한 것인데, 이런 발전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는 훨씬 훗날에 밝혀질 것이다.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대화
누가는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형제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만 단신으로 전할 뿐이지 그들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대신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바울은 로마 교회 지도자들과 먼저 공식적으로 만나야만 했다. 선교 전략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만나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이었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야고보를 비롯한 사도들 및 원로들을 만난 것과 비교하면 이번 일은 의외이다.
어쨌든지 바울은 그곳에 모인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전했다. 1) 나는 민족과 전통에 거슬리는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2) 예루살렘에 붙잡힌 나를 로마인들이 놓아 주려고 있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했다. 3) 지금 내가 묶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인 그리스도에 관한 것 때문이다. 위의 주장은 사도행전의 입장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도 하고, 불일치하기도 한다. 불일치되는 부분은 주로 두 번째에 속한다. 로마인들이 바울을 놓아주려고 구체적으로 시도한 적은 없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 유다에서 당신에 관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또 형제들 가운데서 이곳에 찾아와 당신의 소식을 전하거나 당신을 헐뜯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종파가 어디서나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21,22)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은 정확한 진술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매우 예민한 유대인들이 이미 로마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설립된 그리스도교 교회에 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바울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한 누가의 편집의도에 가깝다. 바울이 그들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이제 선교사로서의 바울의 입지는 훨씬 확고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바울의 그리스도교 변증이 23절부터 시작된다.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설교한 내용은 주로 하나님의 나라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한 ‘예수’였다. 예수 사건이 곧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설교였다. “바울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끝내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24) 이런 표현에 따르면 결국 로마 선교에서도 바울의 설교가 관건임 셈이다.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이제 바울은 이사야 6:9,10절을 인용하면서 “구원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서 누누이 강조된 것이다.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결코 유대 민족을 배척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전통을 무시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구약에 근거해서 예수를 전한 바울의 설교를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결국 구약성서가 약속한 구원의 말씀은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을 향할 수밖에 없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30,31절은 다음과 같다. “바울은 셋집을 얻어 거기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아주 대담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누가는 바울 자체를 위대한 선교사로 그리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사명에 대한 해명을 목적으로 한다. 바울이라는 사람과 그의 사명은 보기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예수의 승천과 성령강림, 예루살렘의 전도로 시작하고, 바울이 중반부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주님의 선교 명령인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의 구체화가 바로 사도행전의 궁극적인 집필 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감당한 인물이 바로 바울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울은 로마의 셋집에서 2년 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한다. 이런 표현에는 모종의 복선이 깔려 있다. 바울은 순교당한 인물이며, 누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로마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누가는 이 사실을 명시할 수 없었다. 그는 바울의 재판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대신 그가 자유롭게 전도했다는 사실만을 간단하게 전한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여러 해석을 은폐하고 있는 미완의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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