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손 오그라든 사람
-오그라든 손, 오그라든 마음-
본문 눅6:6-11, 참조13:10-17

이제 6장에 이르러 누가복음의 분위기가 전투적으로 바뀐다. 그 계기는 안식일 논쟁이 주도한다.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이 주로 할례에 집중되었다고 한다면 복음서에서는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이 주로 안식일에 집중되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에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사건 때문에 한바탕 격론이 벌어졌다. 이제 다른 안식일에 또 하나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 오그라든 사람
예수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쳤다는 사실을 보면 그는 기존의 질서를 무조건 부정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를 펼칠 수 있는 좋은 체제가 있다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게 훨씬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체제가 정당하지 못할 경우에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그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예수가 차츰 회당에서 쫓겨나듯이 말이다.
예수가 가르치는 바로 그 곳, 그 시간에 손 오그라든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외경에 의하면 이 사람은 석수였다고 한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 걸려 있는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다는 사실은 경쟁력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처한 형편 보여준다.
이 문제는 인간의 고난과 불행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 말이다. 선천적으로 장애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이 땅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불행 앞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하나는 내게 그 불행이 닥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태도다. 우리의 삶을 조금만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런 기능성에 늘 노출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다른 하나는 불행 당한 사람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태도이다. 장애, 고난을 돕겠다는 마음은 우리 인간이 상실하지 말아야할 휴매니즘의 토대이긴 하지만, 이런 마음도 근본적으로는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고난당한 사람을 구제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애에 대한 편견을 언제나 극복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장자의 글에 보면 도(道)에 이른 장애인들이 다수 나온다. 그들은 장애를 장애로 여긴 적이 한번도 없다. 자신의 장애를 잊고 살아감으로써 장애에 대해 편견을 갖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확인하고 책잡을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손 오그라든 사람을 안식일에 회당에 데려다 놓은 것도 바로 이들이 파놓은 함정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들은 예수가 결국 손오그라든 사람을 치료하자 “분이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했다.”(10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심보가 사나운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는 인격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유독 안식일 문제에서만큼은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가 엄격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이렇게 극단적으로 반응하게 된 책임은 일차적으로 예수에게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에게 있다. 예수의 책임은 아주 명확하다. 손오그라든 사람을 하루 늦게 고친다고 해서 이 사람에게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안식일 당일에 그를 고쳤다. 아마 그 당시에 제삼자가 이 문제를 논평하라고 했으면 예수의 책임을 더 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의 이런 사건들을 접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 갈등의 핵심에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에 자기의 모든 삶을 던진 분이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그를 따라야 했다. 어떤 절대적인 세계에 직면했을 때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건 없이 절대의 세계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선택에는 그 어떤 상황, 상식, 윤리가 개입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아주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이었다. 상식이라는 것은 늘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준에만 타당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담아낼 수 없다. 상식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이 적당한 선에서 요령껏 살아간다. 물론 상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무 때나 파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대개의 경우에는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며, 그 상식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가 훨씬 많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절대적인 세계 앞에서도 여전히 상식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절대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를 혼동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긴급성에 자신을 맡기고 산 예수의 그 삶이 바로 오늘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나 세련된 종교 상식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 하나님 나라의 긴장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간다. 바리새인들처럼 오랜 전통을 보수하는 일이 바로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매달릴 뿐이다.

예수의 질문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고 손 오그라든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다짜고짜로 묻는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9절). 그리고 보아란 듯이 그의 손을 고치셨다.
보기에 따라서 예수의 이 질문에는 약간의 모순이 담겨 있다.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이 대비되어 있다. 예수의 이 말은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지 않는 게 악이며, 죽음이라고 전제한다.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 사람을 고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안식일만은 피하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는 그들의 요구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변경시켰다. 이런 상황을 예수가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안식일 문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즉 안식일이 바리새인들에게는 그것에 딸린 규정들을 문자적으로 지켜나가야 할 일종의 목표였지만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담아내는 형식(수단)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안식일을 꾸준하게 생명문제와 결부시켜나갔다. 역사적으로도 안식일은 창조와 출애굽전승과 연관된다. 즉 안식일은 생명과 자유를 드러내는 도그마였지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여기서 벌어지는 갈등은 바리새인들에게는 도그마로서의 안식일 자체가 중요했지만 예수에게는 생명과 자유로서의 안식일이 중요했다는 사실에 있다.
오늘의 기독교도 역시 이런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향해서 질문해야한다. 우리의 모든 도그마(전통)가 생명을 지향하고 있는지, 반(反)생명적인지 말이다.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모든 전통과 도그마를 파괴시키자는 게 아니라 그것의 근본을 놓치지 말자는 뜻이다. 구체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우리나라에 있는 교파주의는 거의 신경증적인 상태에 이르고 있다. 주일에 먼 곳으로 출타했을 때에도 많은 경우에 장로교인은 장로교회에, 성결교인은 성결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긴다.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물론 이렇게 자기 교회와 교파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게 도를 넘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마 천국에 가서도 같은 교파신자들끼리 모여 앉아있을지 모른다. 이런 분파현상은 교회의 일치가 세계의 일치를 드러내는 징표라는 사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까닭이다. 손 오그라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안식일을 지키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처럼, 그래서 하루쯤 연기하는 게 지혜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처럼 말이다.  

마음 오그라든 사람
이런 점에서 볼 때 손 오그라든 사람과 대비되는 바리새인은 마음이 오그라든 이들이었다. 손의 증상은 누구에게나 보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의 문제는 숨겨져 있기 때문에 훨씬 심각하다. 종교가 오히려 인간의 마음을 그르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테니스를 예로 설명해보자. 테니스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몸에 힘을 빼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을 강하게 치겠다는 마음으로 힘을 주고 라켓을 휘두른다면 정확하게 가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볼의 힘이 오히려 약해진다. 대개의 아마추어 테니스 동호인들은 처음부터 이런 훈련을 철저하게 받지 않고 적당하게 하다가 결국 힘을 주는 나쁜 습관에 젖어버린다. 테니스 엘보는 거의 이런 습관에서 온다.
마음의 손이 오그라든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자신들이 모든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낼 것처럼 힘을 주다가 결국 예수를 이해하지도 못하게 된다. 운동이나 신앙, 그리고 삶에 이르는 모든 배움은 나중에 고치는 게 훨씬 힘드니까 처음부터 잘 배우는 게 낫지만, 이미 잘못된 상태에서는 더 늦기 전에 바른 신앙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이런 이들은 자기의 신앙연륜만 자랑한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걸 견뎌내지 못한다.

묵상주제
2천년 전 자기들이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던 바리새인들처럼 오늘 우리도 생명에 관한 문제를 전통과 상식의 문제로 대체하거나 격하시키면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예수 사건인 진리 앞에서 분노하고 그것을 제거할 길을 모색했던 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 안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오히려 진리를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더 묻자. 우리는 마음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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