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율법사
-이웃 공동체를 향하여-
본문 눅10:25-37, 참조 마22:35-40

대학 교수의 권위는 그가 교수라는 직책을 가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교수로서의 능력이 있을 때 유지되는 것처럼 예수도 역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으로서만이 아니라 그런 자로서의 능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만 마음을 많이 쓰지만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다. 그 능력 중의 하나는 그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이 확보되어야만 기독교의 진리는 보편성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다. 그 예수의 생각이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가장 명쾌하게 드러나곤 했다. 오늘 말씀에도 율법사와 예수 사이에서 현격하게 구별되는 영생, 율법, 사랑, 이웃, 자비 등등의 주제가 등장한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율법사
어떤 율법사(신학자)가 예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한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런 질문 자체는 참으로 바람직하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에 매몰되어 버리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종교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본질적인 종교적 관심이 아니라 어떤 가시적인 성과물만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 이 율법사는 좋은 질문을 하긴 했지만 그 동기가 아주 불순했다. 마태복음22:35절에도 기록되었듯이 우선 그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했다(25). 이미 이 사람은 스스로 답변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예수가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시험해볼 요량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판단해야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태도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시험하는 이유는 대개가 자신이 훨씬 정당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두 번째 질문을 했다(29). 그런데 이 질문도 역시 자기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그는 내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역시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당연히 유대인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방인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자신이 자기 민족을 위해서 애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그럴 정도로 모범적인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의 이 율법사처럼 자기의(自己義)가 강하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시험하려고 하고, 자기의 정당성을 확인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오늘의 이 사회 제도는 온통 그런 것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다. 교육과 노동을 포함한 모든 인간 행위가 이런 기준에서 운용된다. 이번 한일 월드컵 현상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4강 신화에 도취되어 있다. 우리의 옮음, 능력, 정당성을 한껏 올려놓는다. 단지 축제로서의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으로 끝나야 할 문제를 애국심과 자기 정당성으로까지 상승시켜나가고 있다.
이 율법사는 자기 질문에 대해서 자기 입으로 답변하게 되었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처럼 간혹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셨기 때문이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7절, 신6:5).
이미 이 율법사가 늘 가슴에 새기고 있던 구약성서에 답이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영생을 얻으려면 사랑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그 사랑은 곧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한다. 아마 이 율법사는 자기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욕망이며 집착이었다. (율)법의 실천이나 선한 행실을 사랑으로 오해한 것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데서 출발한다.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는 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겉으로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 결국은 자기 집착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게는 아예 사랑할만한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한 말이다.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니까 힘이 들어가고 남에게 확인시켜주려고 애를 쓰게 된다.

2. 율법을 넘어서
자기의 정당성을 보이기 위해서 율법사가 질문한 이웃 문제에 대해서 예수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는 다시 율법사에게 물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가 싫었던 탓인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변한다. 예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이 율법사의 질문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답변하셨다. 이 율법사는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 반면에 예수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이었다. 나의 이웃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이웃의 이웃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는 말이다. 그게 곧 사랑이었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과 이웃 중심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얼마나 이웃들에게 선한 일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이차적이다. 만약 사마리아 이야기를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윤리적 규범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율법이 될 뿐이다. 만약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만 한다면, 그래야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불행하게 만드는 함정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문제는 사실 기독교 윤리와 우리의 구체적인 신앙생활에서도 아주 예민하게 작용한다. 예컨대 노동착취를 당하고 재해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면 우리는 집을 팔아서라도 그들을 도와야 할지 모른다. 노숙자가 여전한 가운데서 우리가 따뜻한 잠자리에 든다는 것은 아주 비윤리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수술비가 모자라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우리는 당장 마이너스 통장이라고 그들에게 주어야 할지 모른다. 이런 논리를 어디까지 적용시킬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직 확실한 답변을 제시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죄 많은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쏟아 붓자 어떤 제자가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예수는 이렇게 답변하신다. 가난한 사람은 늘 너희와 함께 남아 있겠지만 이제 나는 곧 떠난다. 이 여자의 행위는 오히려 기리 기억되어야 한다. 즉 박애행위만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따라야할 실천적 규범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예수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고 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예수는 이 율법사가 갖고 있었던 이웃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깼다. 유대인들이 볼 때 하찮은 사람들인 사마리아 사람이 제사장이나 레위사람보다 훨씬 옳았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적인 법규보다는 자비가 훨씬 가치 있는 태도였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비껴간 이유는 그들의 비인간성이라기 보다는 율법적인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율법적인 의무감보다는 참된 인간관계를 높게 평가했다.

3. 이웃 공동체를 향하여
위에서 설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명기서 말씀의 해석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병렬화 되어 있다고 해서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기독교 비판가들이 기독교를 향해서 하나님만 사랑하지 인간에 대한 휴매니즘이 부족하다고 했다. 우리가 이런 비판을 받을 만 하긴 하지만 이웃 사랑 자체가 하나님 사랑은 결코 아니다. 때로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이웃에 대한 집착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관계로 인해서 절대적인 세계로부터 멀어진다는 말이다. 자식에 대한 집착, 부부사이의 집착이 그렇게 작용하기도 한다. 단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긴 사람에게는 이 두 요소가 똑같이 나타나는 건 분명하다. 그는 사랑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사랑의 하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자기 욕망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웃 관계는 그렇게 바람직한 상태에 있지 않다. 갑작스러운 산업화와 도시 집중, 물질만능주의, 지나친 경쟁 등으로 인해 사랑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생존경쟁의 정글처럼 여겨진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동창회, 동갑계, 회사, 종교에서 어떤 단단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토대는 매우 허약하다. 거의 이익집단처럼 어떤 공동의 이익이 맞아떨어질 때만 유지되지,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경제적 척도로만 작동되는 오늘의 세계 속에서 바람직한 이웃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에서 그 해결책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물고기가 지금 1m짜리 그릇에 담겨 있었다. 물고기의 숫자에 비해서 그릇이 너무 작아서 물고기들은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주인은 계속 물을 갈아주느라고 바쁘고, 물고기들은 서로 깨끗한 물을 차지하느라고 야단들이었다. 넓은 호수에 풀어놓으면 간단한 일인데도 좁은 통 안에서 서로 애를 쓰고 있었다. 하나님이라는, 또는 그의 사랑이라는 넓은 호수나 대양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참된 이웃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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