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리아와 마르다
-삶의 집중력-
본문 눅10:38-42, 요11장 참조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소설 <최후의 유혹>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등장한다. 아마 소설가의 상상력에 따른 것이겠지만 예수는 이 두 여자와 결혼했다. 그 당시는 자매들과의 이중 결혼이 별로 괴이쩍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 예수가 우리가 똑같이 완전한 인간이셨다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터인데, 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 두 자매의 오라비 나사로 사건(요11장)을 보더라도 그 저간의 관계를 알만 하다.

1. 신앙적 연대감
예수가 한 촌(베다니)에 들어가시자 마르다가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는 말씀을 보면 이 집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남자인 나사로나 여동생인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외로움과 피로를 알았는지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정성을 다해 먹거리를 준비했다. 이처럼 사심없이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더구나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이기적인 인간의 삶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마르다 자매의 이러한 따뜻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이 근방을 지날 때마다 잠시 들리시곤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면서 인간적인 정과 유대감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경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어야 하는데, 오늘 이 시대는 오히려 그런 틈을 더욱 높혀 가는 것같다. 즉 상대방을 서로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사실 경쟁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 경쟁의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이 경쟁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이런 질서가 문제다. 머리가 명석하지 못해서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순 노동뿐이다. 이런 사람이 오늘의 우리와 같은 천민 자본주의에서(또는 돌진근대주의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지 살펴보라. 장애인들이 또한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 일등은 교만하고, 꼴찌는 열등감과 죄책감, 또는 불만에 휘싸인다. 이런 기초가 해결되지 않는한 인간 사이의 정과 유대감은 진작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의 사회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할 본질적인 주제를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게 요구하고, 이 사회를 압박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와 교회의 연대감이 유지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일반 평신도들은 자기들의 교회 안에서 소박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며,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늘 이런 문제를 의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 나라의 교회처럼 교파별로, 교회별로 사분오열되는 교회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의도가 불순성, 둘 중의 하나다.

2. 분주한 마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 마르다는 예수님을 모신다는 마음에 상당히 쫓겼던 것 같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40)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려다보면 마음이 쫓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허둥대지만 그래도 보기에 좋은 모습이긴 하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지만 마르다가 예수에게 동생을 지적하면서 자기를 도와주도록 타일러 달라고 요청하면서 문제가 일어난다. 자기는 이렇게 동분서주하는데 동생은 천하태평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못마땅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자기만 고생하는 것같은 마음을 인간은 견뎌내지 못한다. 물론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마음이 쫓겼다는 것이야 십분 이해할만 하지만 동생을 자기 일에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주기를 바란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동한다. 특히 바리새인들처럼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심리가 훨씬 강하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한 불평은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경건하게 살았는데 당신 제자들은 왜 그렇게 멋대로냐?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당신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 오늘의 교회에서도 역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최소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측은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기도, 봉사, 충성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다. 다른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내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

3. 많은 염려
분명히 마르다는 선의로 마음이 분주하고 선의로 동생을 나무라고 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많은 염려 자체를 지적하고 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 지금 예수님이 마르다를 책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런 봉사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일 때문에 본질적인 것을 훼손당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요즘 집안 정리를 좀 했는데, 웬 잡동사니가 그렇게 많은지 다시 놀랬다. 인간이 이 땅에서 잠시 살아가는 데 그릇이나 옷, 이런 저런 생활용품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만큼 우리가 머리를 굴리며 산다는 게 아닐까? 없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조금이라고 편리하고 멋있게 살기 위해서 긁어모은다. 이런 거야 아주 자질구레한 것이니까 애교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너무 많은 것을 계산하다. 그런 게 인생이려니 하고 모두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정작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많은 게 아니라 “몇 가지뿐”, 또는 “한 가지뿐”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 한 가지를 가리켜 <화두>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게 뭐꼬?”라는 화두가 있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화두가 있다. 얼마전에 친구들 문제 때문에 벌써부터 염려와 근심에 빠지기 시작한 막내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 동네의 어린이들이 모여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두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놀다가 싸우고, 울고, 다치기도 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어서 어머니들이 부르니까 모두 그렇게 열을 내면 놀던 구슬치기를 버려두고 집에 들어갔다. 생각이 깊은 아이라면 구술치기를 열심히 하면서도 이게 자기 삶의 모든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거야.” 인생은 구슬치기 그 이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냉소적인 생각인가? 나는 배고프지 않으니까 그런 관념적인,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걸까? 어쨌든지 구슬치기를 하면서 온갖 걱정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단지 재미일 뿐이다.
4. 마리아의 좋은 것    
예수님은 자기 동생을 나무래 달라는 마르다의 요구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신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 요한복음11:1,2절에 보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기던 여자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죄인으로 낙인찍혔던(눅7:36-50) 여자라는 말이 된다.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 여자는 예수님이 집에 오셨는데 밥짓는 언니를 도울 생각은 없이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 여자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냥 그렇게 앉아 “있음”이 그녀의 존재방식이었다. 가장 크고 절대적인 세계가 바로 이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또는 이 존재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다른 일로 염려하지 않고 그것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것이 바로 예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존재의 힘을 경험했으며 그렇게 참여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인의 독특한 자기 실존이다. 존재를 예수와 그의 말씀에서 확보하는 길이 그것이다. 오늘의 교회 공동체도 역시 이런 길에 집중해야만 한다. 존재, 예수, 말씀이 일종의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되어서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힘을 발견하지 못한 교회는 끊임없이 프로그램과 이벤트에 매달리고 말 것이다. 내면이 허하면 외연이라도 온갖 장식으로 꾸미고 확장해야만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선택은 결코 남에게 빼앗기면 안 된다. 더구나 이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의 세계이다. 아무도 상관할 수 없는 그런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마리아는 꽤나 행복한 여자가 아니었을까?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흡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음악의 본질적인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역시 이런 경험이 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람이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외면적인 차원에서만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무리
우리는 대개가 마르다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한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긴하지만, 아무리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태도로는 남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실제로 봉사는 좀 적게 하드라도 근본적인 것에 모든 신앙과 삶을 집중시키는 마리아가 훨씬 좋은 것을 선택한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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