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바리새인
-길을 모르는 길 안내자-
본문 눅11:37-54, 참조 15:1-7

오늘 본문의 경우와 똑같이 누가복음 7장36절 이하에도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한 걸 보면 그 당시 예수와 바리새인의 관계가 그런대로 우호적이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관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틈이 벌어지게 되고 급기야 바리새인들은 교권을 쥔 제사장들과 결탁해서 예수를 처리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 다른 길
식사 전에 예수가 손을 씻지 않자 바리새인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런 주제를 보도하고 있는 다른 성서에는 주로 예수의 제자들이 율법을 무시한 걸로 나와있는데, 여기서는 예수가 직접 경건하지 못하게 행동한 장본인으로 등장한다. 어쨌든지 이 바리새인의 눈에 예수의 행동이 이상하게 비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좀더 세심하게 들어야 보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할 여유나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해서 그들의 심성 자체가 “삐딱”하다고 보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당한 참혹한 시절에 자기 민족의 신앙적 동질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솔선수범하는 사람들이었다. 거의 모든 점에서 사회 지도층으로서 부족할 게 없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예수의 행동을, 예수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예수를 잘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또는 진리를 향한) 길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예 길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길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도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실제로는 길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데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무언가를 알려면 근본적으로 확실하게 알아야 하지 어중간 하면 근본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름대로 전문가인데도 불구하고 근본에 대해서 헛다리를 집는 이유는 그들의 태도가 진리에 대해서 열려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고정관념에 철저하게 묶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절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반복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자기 이외의 것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일종의 패권주의에 사로잡힌다.
아주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자. 며칠전 우리 집에 장판을 새롭게 깔았다. 그 일에 전문가인 한 사람이 조수를 데리고 와서 일을 했는데, 재단이나 칼질이 대단히 능숙했다. 그런데 그의 행위는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죽은) 기술에 불과했다. 아마추어인 내가 조언한 몇 가지 말을 흘려듣더니 바로 그 실수를 했다.
오늘의 종교전문가들에게도 역시 이런 낡은 사유가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인격적이고 명석한 사람이지만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문을 닫아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기가 아는 것만을 모든 세계나 모든 신앙이라고 절대화 하는 태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반복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형태를 보면, 교회가 지향해야 할 진리 자체보다는 이미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독점)한다는 전제 하에서 단지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온갖 기술만 난무하고 있다. 교회 행정에서 설교에 이르기 까지 온통 방법론만이 득세하고 있다. 흡사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세세한 항목을 지켜나가는 데 신명을 다 바쳤듯이 말이다.
이런 상태로 남아 있는 한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게토화(化)되고 말 것이다. 자기들끼리만 정서적으로 일치를 이루는 어떤 밀의적 소종파처럼, 이미 고정되고 설정된 어떤 사태를 화려하고 매혹적인 수단(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전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진리를 향한 “개방성”이다. 진리 자체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개방되어 있는 마당에 그 진리 앞에 직면해야 할 인간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영원히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지내고 말 것이다.  
  
2. 업적의(義)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 그 동기는 구체적으로 <업적의>에 있었다. 그들은 현실에 영합하는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목숨을 걸고 현실과 투쟁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애절한 종교적 특심은 인간이 이루어가야 할 어떤 업적에 토대하고 있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업적으로 쌓는가에 자기들의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자기의 몸을 불살라 바칠 정도로 용맹정진했다. 이런 인간의 수고와 노력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칠 수 밖에 없다. 오늘날도 40일 금식기도를 한 사람에게 대해서 어떤 경의를 보내는지 생각해보라. 또는 자기의 전재산을 종교단체나 사회에 희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바리새인들은 전적으로 이런 일에 자기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예수와 그의 처신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런 종교적이고 선한 일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보더라도, 또는 오리를 가자고 할 때 십리를 함께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더라도 인간의 이러한 태도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것을 상대화했을 뿐이다. 즉 율법의 상대화다. 율법(윤리)이 아무리 가치가 있고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그런 것은 경우에 따라서 이기심에 의해서, 또는 인간적 욕망에 따라서 분출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예수는 우리의 삶을 절대적인 지평으로 끌어올리셨다. 하나님의 차원에서만 우리의 삶이 참된 생명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결국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상대적인 율법을 정당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게 핵심이라면 바리새인의 길이나 예수의 길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손을 씻었는지 씻지 않았는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닐 수 있지만 이런 작은 행위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다. 율법을 절대화 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늘 사람을 의식한다.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교양있게 살아간다. 그래서 결국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한다”(43).

3. 지식의 열쇠
예수는 율법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52). 소위 사회적인 면에서나 종교적인 면에서 지식인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위에서 전문가의 배타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는데, 이것은 곧 지식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는 지식인에게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의 지식인은 참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전문 분야에 대한 정보를 비교적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떤 사태를 보는 시각이 어떤 부분에서만 심층적이지 실제로는 협소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차원에서만 어떤 사안에 접근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얼마전에 서울 대학교 지역할당제 건이 표출되었을 때 교육부장관도 한 수 거들고 나왔다. 그런데 하는 말이 “서울 지역의 학부모들이 반대하면 정원을 늘리면 됩니다”였다. 여기저기 눈치 보면서 곪을대로 곪은 우리의 교육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겠는가? 서울대 총장이 오죽했으면 지역할당제까지 언급했을까만은, 대학입시에서 내신성적의 비율을 파격적으로 상향 조정하면 이런 문제가 풀리지 않을까? 수능은 20%, 내신은 80% 정도로. 이렇게 되더라도 하향 평준화 되지 않을 것이며, 비록 그렇더라도 멀리 내다보면 국가 경쟁력에서 결코 손해볼 게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전문가 집단이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는 이 사회의 지식인들보다도 우리 교회의 종교 지식인들에 대한 문제가 훨씬 시급하다. 종교적인 지식의 열쇠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지식의 세계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남도 가로막는 상황을 말이다. 이런 상황은 의도적일 수도 있고 불가항력적인 면도 없지 않다. 의도적이라는 이유는 종교 전문가가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불가항력적이라는 이유는 종교전문가의 지식(앎)의 수준이 어느 범주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아무리 신자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만 가르칠 수 있을 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이나 철학같은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우선 선생을 바르게 선택해야만 했다. 명창만이 명창을 길러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예술의 세계가 독특하게 있어서 그 세계에 들어간 사람만이 제자들에게 그 세계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
예수는 바른 길을 지시하는 동시에 길 자체이기도 했다. 그는 진리를 지시하는 동시에 진리 자체이기도 했다. 그는 생명을 지시하는 동시에 생명 자체이기도 했다. 오늘 우리는 종교 전문가로서 예수 세계의 열쇠를 갖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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