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부자
-영생에 대한 질문과 그 출처-
본문 눅18:18-30


질문하는 사람
예수에게 와서 질문한 사람이 마태복음 19장에는 ‘청년’으로, 마가복음 10장에는 단순히 ‘한 사람’으로, 히브리인의 복음에는 ‘부자’로 거명되는데, 누가복음에는 유다의 지도자로서 부자라고 묘사되어 있다. 어쨌든지 이 사람은 삶의 근원에 대해서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는 이 사람의 질문은 인류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도 잊혀지지 않은 주제이다. 인간에게 사유의 능력이 주어진 이후로(호모 사피엔스) 모든 인류의 문명이 추구한 그 세계는 곧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유한하고 허무하다는 사실을 약간만이라도 직관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예술, 문학, 정치 행위를 이런 유한성의 극복, 즉 구원의 지평에 놓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인류역사는 피상적으로는 정치, 사회사(史)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종교사다. 아무리 오늘처럼 첨단 물리학이 우리의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계속해서 자기 초월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 내면은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이런 종교적 표상을 망각한다. 이게 바로 인간의 모순이자, 숙명이다.
이런 점에서 일상성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생(구원) 문제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늘 이런 단어들을 친숙하게 들으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단어들이 어떤 형태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이 문제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고 다른 것(교회의 여러 행사)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흡사 일반인들이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고 이미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확보하려고 자기의 모든 삶을 소진하듯 말이다.
오늘날 교회의 구원론이 진부해진 이유는 교회 구성원들이 게으르거나 세속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그 구원의 세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 범주와 전혀 다른 세계에 자기를 비추어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들이 이 영생(구원)에 대해서 모든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데, 그것이 곧 교회의 존재론적 근거라 할 수 있다.

행위의 한계
그런데 이 관원의 질문은 기본적으로 방향이 잘못되었다. 그는 율법적인 방식으로 질문하고 있다. “제가 무엇을 해야 ... ”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무엇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철저하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영생의 문제도 역시 그런 기준으로 접근하고 있다. 영(원한)생(명)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의 존재론이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의 노력으로 그것을 만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늘 자기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다는 착각 가운데서 살아간다. 심지어 그것의 무력을 증거 해야할 종교마저도 이런 식이다. 교회를 흡사 기업처럼 운영하는 그런 교회는 접어두고, 약간 지성적이고 세련된 교회에서도 역시 기본 노선은 기독교인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그럴듯한 일을 모색하다가 스스로 지쳐버린다. 이러한 의도적 행위보다는 오히려 노자가 말하듯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가 훨씬 복음에 가까운 게 아닐까?  
예수는 이 사람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십계명에 나오는 다섯 가지 윤리규범을 거론하면서 그 사람의 방식으로 답변하신다. 예수가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앞부분은 생략하고 인간 관계인 뒷부분만 언급한 이유는 이 사람이 영생을 어떤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이 사람이 영생 문제의 차원을 바르게 알고 있었다면 아마 앞부분을 언급했을지 모른다.
이 관원은 자신 있게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이 사람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으로 대꾸하신다.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 ” 자기가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윤리적이며 종교적으로 살았다는 이 사람의 호언장담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처음 출발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시간이 갈수록 근본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이 사람도 역시 어려서부터 자기의 모범적인 행위에 매달려 살다가 결국 근본에서 멀어졌다. 겉으로는 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 같지만 그게 모두 자기 만족이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인간의 자기 만족감과 참된 신앙적 경험을 구분해야 한다. 세속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자기 성취감이나 만족감에 도취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에만 의존하는 삶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것 이외에는 교회가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 물론 이 문제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자기 성취감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태도는 아주 쉽게  실망으로 변한다. 자기 스스로 그런 성취감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주변에서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게 되면 실망과 불만과 분노로 변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때 정당한 비판과 반론이 아니라 감정적인(정서적인) 불평불만이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심하는 사람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모범적으로 살아온 이 사람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무척 마음이 괴로웠다.” 예수는 이 사람을 보시고 그 유명한 낙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은 비교적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이 말씀을 문자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일단 옳다. 어느 정도의 재물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소홀하게 하는지 끊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지나친 부는 개인과 사회를 부패시키기 마련이다. 이런 말씀에 의하면 부자 교회는 구원받기 힘들다는 말도 되며, 미국이나 독일 등 부자 나라도 역시 구원받기 힘든지 모른다. 오늘의 말씀을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킨다면 부자 교회는 자기의 부를 철저하게 가난한 교회에 나누어주어야 하며, 미국은 자기의 부를 방글라데시에게 나누어 준 다음에 구원을 언급해야 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소위 기독교 국가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이런 차원에서 지금보다 훨씬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현재 미국 대통령 부시는 자신들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통해서 힘이 약한 나라를 압박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가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단서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량살상부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작은 단서로 발견하지 못한 채 이라크와의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 전쟁이 시작된 지 만 일년이 지났지만 그들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부시는 자신의 전쟁이 정당했다고 연일 선전해대고 있다. 이게 과연 기독교 국가로서 정신이 있는 짓인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가 정작 말씀하려는 근본은 단지 ‘무소유’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말씀을 우리의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요구 앞에서 늘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또한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과 관계없다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수도 역시 재물 자체를 악하다고 보거나 가난을 미화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에 있다. 재물을 자기의 삶에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비록 가난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있고, 재물을 늘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은 비록 부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다.

영생의 출처
오늘 본문에 서술된 일련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베드로는 예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가정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생각할 때 상당히 파격적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28-30). 예수의 이런 진술에는 가정 해체나 무정부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나타난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출가하거나 탈속해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앞서 재물을 나눠주라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이 말씀이, 즉 가정생활을 포기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큰 보답이 있다는 이 말씀이 근본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27절)는 말씀에서 암시되어 있듯이 영생은 오직 하나님에게 의해서만 가능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이것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관원처럼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율법과 윤리적 실천에서, 재물에서, 가정에서, 국가에서, 또는 학문과 예술의 성취에서 이런 절대적인 생명을 이루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우리 인간과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빛이 반사되어야 할 거울이지 빛 자체는 아니다. 그럴 능력이 없는 대상에게서 영생을 모색하게 되면 위선에 사로잡히거나 실망한다. 기독교인들은 대개 가시적인 교회를 통해서 이런 구원의 절대적인 세계를 꿈꾸는데, 여기에도 큰 함정이 놓여 있다. 교회는 구원받아야할 공동체이지 구원을 베풀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구원을 얻어보려고 허황한 기대를 갖는다면 어떤 결정적인 사태에 직면할 때 오늘 본문의 관원처럼 근심에 싸여 진리를 외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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