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시각장애인
-아는 것만큼 보인다-
눅18:35-43, 참조 요9:35 이하

복음서에 서술된 여러 사건들 중에서 과학적 실증주의 시대에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적지 않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 같은 것들이야 우리가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이해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거나 오늘 본문에 기록되었듯이 지체장애가 치료되는 사건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어떤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목격자가 오해한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보도는 목격자의 오해라 할 수 있다. 성서에 기록된 말씀이니까 일단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무조건 믿는다는 것이 늘 정당한 것은 아니다. 요즘도 심심치 않게 죽어서 하늘 나라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좋게 생각해서 죽었던 게 아니라 잠시 임사(臨死) 상태에 머물렀다고 회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예수에게 발생한 부활은 종말의 선취이기 때문에 이런 보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무엇을 보는가?
오늘 본문에서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여리고 성 입구에서 구걸을 하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거듭해서 외쳤다. 예수는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이 사람은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예수는 이 사람에게 “보시오.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 사람의 눈이 열려져 보게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는 일단 이 보도를 사실 그대로 믿을 수 있으며, 어쩌면 그래야만 할지 모른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예수에게는 보통 인간에게 없는 신적인 초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가능하다. 이 말은 원칙적인 면에서 옳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체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흡사 마술을 부리듯이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걷고, 병든 자를 고쳤다고 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주술적인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태도다. 예수에게는 지금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이유와 동기가 있을 경우에만,, 즉 메시아적 징표가 드러나야 할 경우에만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마술적인 초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예수에게 있는 극진한 사랑의 능력으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구걸을 하던 이 사람의 곁을 지나가면서 이 사람의 시각장애가 단순히 생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런 방식으로 치료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음의 병은 육체의 병까지 불러오는 법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정신적인 갈등과 긴장 가운데 빠져 있다가 급기야 시각장애를 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또는 매우 심각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서 겉으로는 보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느낄 수 없는 상태였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현상들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일어날 수 있다. 정신병원에서 벌어진 이야기인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에 보면 거짓으로 청각장애인 노릇을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결국 자신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동료를 통해서 이 시각장애를 벗어난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오”라는 예수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시각장애가 단순히 생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는 점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 여기서 이 사람의 믿음은 무엇일까?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보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염원인가? 사실 평생 동안, 아니면 오래 동안 시각장애로 살아온 사람은 그것을 자기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졸지에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예수는 이 사람의 태도를 보고 ‘믿음’ 운운했다. 무엇이 이 사람의 믿음이란 말인가? 많은 주석학자들은 이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고 주변에서 잠잠 하라는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절실한 소리로 외쳤다는 사실을 중요한 요소로 지적한다.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의 믿음이란 말인가? 우리가 이 자리에서 그 상황을 다시 복원해낼 수는 없지만, 이 사람의 믿음은 단지 육체적인 시력을 회복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시력을 찾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지 모른다. 흡사 선악과가 이브에게 매혹적으로 보였듯이 오늘 이 세계는 늘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작게는 우리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조금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런 것만을 보고 살아간다. 우리에게 실제로 보이는 이런 것들이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려 있다. 예컨대 우리의 젊음이나 건강이라는 것도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라 얼마 지나면 곧 늙고 해체된다. 이런 현상은 누구의 눈에나 확실하게 보이는 부분이다. 안개가 사라지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것만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본다고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 9장에도 시각장애인이 등장한다. 바리새인들이 이 치료행위가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시비를 걸자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 이어서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느니라”(41)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봄’과 ‘못 봄’은 어떤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했다. 예수는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는 분이다. 상식적으로만 말하면 종교 전문가인 바리새인이 보는 자이고 일반 민중은 못 보는 사람인데 예수에 의해서 이런 상황이 반전된다. 이 말은 곧 보는 행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근원을 못 보는 이유는 자신이 쌓은 학문적 업적이나 사회적 업적으로 인해서 그런 시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너무나 많은 것으로 채웠고, 지금도 그렇게 채우는 것만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으니까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 진리와 만날 수 있도록 그 길을 안내해야할 교회마저도 자신의 업적에 도취하거나 그것에 대한 갈망 때문에 못 보기는 매한가지다.

무엇이 보지 못하게 하는가?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거지 시각장애인을 향해서 앞서 가던 사람들이 입을 닫으라고 꾸짖었다는 설명이 있다. 아마 예수의 제자들이거나 아니면 여리고의 지체 높은 분들이었는지 모른다. 이들은 예수와 함께 길을 걸으면서 깊은 종교적 가르침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또는 여리고에 들어가서 누구를 만나며 어디에 기거해야할는지 의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삶에 이 시각장애인의 태도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근원적인 것을 보려는 노력은 늘 귀찮은 일로 취급된다. 왜냐하면 ‘봄’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은 한 인격체 안에서도 일어난다. 우리의 여러 삶 중에서 영화, 운동, 돈벌이, 또는 친구들, 이런 저런 노동과 취미생활은 우리를 절박하게 만들지만 생명과 죽음, 존재와 시간, 무와 유 같은 본질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는 우리를 귀찮게 만든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는 훨씬 예민하게 작동된다. 장애인들의 통행권을 보장하라는 시위에 대해서 이 사회는 잠잠 하라고 윽박지른다. 이 사회는 양심수나 장기수를 석방하라는 절규를 못마땅해 한다.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자는 외침도 역시 찬밥 신세다. 사실 교회는 이 사회가 잠잠 하라고 강요하는 그것을 부단히 외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성립되지,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고, 단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으로 합법화하는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끝으로 제기하는 질문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어떻게 예수를 바르게 보고, 이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을까?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과 연결해서 설명하자면, 우리가 예수를 아는 것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를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에서는 더욱더 이 아는 것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한다. 아는 것보다는 믿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무엇을 안다는 게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또한 안다고 해도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는가? 경험적으로 볼 때 무엇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지식에 의지해서 따지기만 했지 참된 믿음의 열매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아는 것을 제외한 채 그저 맹목적인 믿음만 강조한다는 것은 훨씬 위험할 뿐만 아니라 바른 길도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음악의 세계에서도 그저 음악을 듣고 느낀 경험만으로, 그래서 즐거워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음악의 세계를 모른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음악 이론도 공부해야하고, 미학도 공부함으로써 음악이 담아내고 있는 훨씬 심층적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준비가 된 다음에야 소리의 세계가 들리기(보이지) 시작한다.
이처럼 종교의 세계도 역시 이런 공부가 거의 필수적이다. 성서의 언어, 고대의 종교현상, 철학적 사유방식을 익힘으로써 하나님을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대학교의 공부만이, 또는 그런 전통적 학문만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전히 숨어 있는 하나님을 알고, 그 세계를 본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의 초월적 경험으로 끝나거나 해결되는 게 아니라 상당히 점진적인 심화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리학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자신이 들어간 단계의 바로 다음 단계를 볼 수 있을 뿐이지 서너 단계를 갑자기 건너뛸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신앙도 역시 시 쓰기와 같은 수행과정(구도)이 필요하다. 일종의 알아 가는 것으로서의 수행에서 끝나면 안 되고, 보는 것으로서의 깨침이 병행되어야 한다. 수행(앎)과 깨침(봄)은 우리가 진리(예수)를 만나서 구원받는 길에서 두 바퀴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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