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삭개오(눅 19:1-10)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
본문 눅 19:1-10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것이 이미 완료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흡사 바흐의 음악이 역사가 흐를수록 훨씬 많은 음악의 세계를 드러내듯이 성서도 역시 그런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과거에 어떤 신학자가 해석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오늘의 지평에서 새롭게, 또는 훨씬 심층적으로 해석해 나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미 완료된 어떤 실체를 곱게 간수하려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성서읽기와 그 공부가 늘 그렇고 그런 상투성에 빠지거나 단지 인간적 욕구에 부응하는 실용성에 빠지고 만다. 이런 현상은 인간이 현재 자기에게 낯익은 것을 강화시킴으로써 안정감을 얻으려는 욕망과 비슷하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오늘 본문의 본문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삭개오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게 해석해볼 여지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리고 성(城)의 세무담당 책임자인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겠으며,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진술한다. 이렇게 완전히 변화된 삭개오를 보고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려 온 것이다.”(9,10절). 우선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솔깃하게 귀를 기울일 만큼 흥미로우며, 그 지역에서 죄인이라고 ‘왕따’ 당하던 사람이 자기 재산을 포기하는 용단까지 내렸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교훈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나 탕자에 대한 예수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귀한 아포리즘(경구)으로 인해서 이 이야기는 더욱 빛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런 정도의 교훈으로 끝나는 것일까?

구원의 리얼리티는?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는 예수의 선언이다. 그 앞에 전개된 정황은 아무리 극적이었다고 하드라도 이 예수의 선언이 나오게 된 일종의 서주(序奏)일 뿐이다. 여기서 예수가 선언한 구원은 무엇일까? 예수는 18장42절에도 시각장애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는데, 그 구원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시작하자. 삭개오가 예수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도 그 후로도 역시 정신적으로 여전히 불안하고 허무를 느끼며, 몸이 병들고, 식구들끼리 갈등을 겪으며 살았을 것이다. 만약 구원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완전한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예수가 선포한 구원이 종말론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또는 이 구원은 영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지 실질적인 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아직 현실적이지 않다는 뜻이며, 영적이라는 말은 구체적이지 않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 또는 현재적인 게 가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며, 감각적인 게 아니라 초월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조금 더 신학적으로 해명한다면 ‘이미’ 우리에게 임했지만 ‘아직’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역사와 초월의 변증법적 구도 안에서 인식되어야만 할 것이다. 구원의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잘못 전달되는 경우에 세상 사람들에게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구원론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진술할 때 그것이 갖고 있는 심층적 의미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약을 만병통치약처럼 떠벌리는 돌팔이 약장사의 행태를 우리가 뒤따를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는 예수의 선언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한 단서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예수가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신 순간은 삭개오가 자기 소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겠다고 고백한 직후였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가시적으로 회심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구원이 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앞서 18장22절에도 어떤 부자 관원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 삭개오의 행위는 아주 모범적인 것이어서 구원을 받을만한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오른 용기와 자기의 재산을 팔겠다는 그의 결단이 예수로 하여금 구원을 선포하게 한 동기였다고 보는 것은 이 정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우리 주변에는 남에게 감동을 줄만한 행위들이 적지 않다. 자기가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대학이나 병원이나 종교단체에 희사하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거의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수재민이 날 때마다 전 국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돕는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나라로서 약간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긴 하다. 신자들 중에서 교회 건축을 위해서 집을 판다거나 전세금을 뺀다거나 대학등록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 헌금을 매월 몇 백만 원 씨 바치기도 하고, 특별헌금을 몇 천만 원씩 바치는 이들도 간혹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들을 우리 개인과 사회의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렇게 단순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우선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게 못된다. 자신이 평생 모은 10억대의 재산을 대학이나 교회에 바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일단 겉으로 보면 아주 위대한 행동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저질렀던 파렴치한 행위를 보상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우리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탈세와 정경유착으로 막대한 이득을 본 기업가가 수재민 성금에 수억 원을 기탁할 수도 있다. 모든 경우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인간은 자기 집중력이 거의 본능적으로 발동하기 때문에 사심 없이 선한 일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집중이라 할 사심을 버리는 일은 어떤 인격적 훈련을 통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약간 씩 자기 마음을 비움으로써 어느 정도의 인격을 다듬어갈 수는 있지만 어떤 단계 이상으로 승화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오늘 삭개오의 행위 자체는 그렇게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삭개오처럼 소유를 구체적으로 처분하는 걸 전제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오늘 예수를 따를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나 마더 데레사, 또는 법정처럼 절대적 청빈하게만 살아갈 수는 없으며, 또한 그게 절대적인 삶도 아니다. 인간의 이런 한계와 현실을 모를 리 없던 예수는 무슨 이유로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는가?

수군거리는 사람들
예수는 지금 삭개오에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곧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게 되자 “수군”거린 이들이다. 이미 앞서 18장39절에도 시각장애인을 “잠잠하라”고 윽박지른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가 교양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주변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늘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 특히 자기의 구도에 들어오지 않는 상대방을 적대시하거나 불온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곧 “닫힌 세계”다. 때로는 적대감으로, 때로는 무관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닫아놓고 우리는 자신을 보호한다. 오늘 본문에 삭개오를 적대하던 이들이 수군거렸듯이 말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삶의 자리에도 이런 현상은 늘 나타난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에게, 또는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사람에게 갖는 지역감정은 바로 이런 심리의 집단적 증상이다.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적 미래를 내다본다든지, 또는 어떤 정치적 경향이나 철학을 중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군중심리나 지역감정에 얽매인다. 심지어는 적의 적을 동지로 여기는 차원으로 선거에 임하기도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도 역시 거의 닫힌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독실한 신앙으로 여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불교를 보는 시각이나 가톨릭을 보는 시각은 물론이고 개신교 안에서도 교단적 색채가 지나치게 강하게 작용한다. 우리는 어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보다는 단순한 정서로 수군거리듯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말씀한 핵심은 “구원이 임했다”와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두 진술이다. 이 두 진술 모두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빗나가는 말씀이었다. 구원은 세리 같은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같은 의인에게 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자였다. 예수는 이 말씀으로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구원을 규정하던 그들의 생각을 깬다. 따라서 구원은 모범생들이 늘 앞서 나가는 인간적 틀이 아니라 이런 인간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사건이다. 인간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어 발생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어떤 인간적 범주 안에 예속시키는 게 바로 불신앙이다.
거꾸로 하나님의 행위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야말로, 즉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며 마음이 “열린 세계”다. 재산을 기증하면서도 마음이 닫힌 사람이 있고 열린 사람이 있는데, 삭개오가 바로 이런 열린 사람이었다. 그 점을 예수는 놓치지 않고 그의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포하신다. 그런데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놓을 수는 있어도 자기를 포기하지는 못하는 게 인간이다. 한편, 이런 점에서 구원은 어떤 구체적인 실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자기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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