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두개인
-부활은 무엇인가?-
본문 눅20:27-40
            
예수와 가장 첨예하게 신앙적 갈등을 보인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지만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사두개인들도 가끔 이런 태도를 보였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양자 모두 유대교의 중심 인물들이지만 몇 가지 면에서 달랐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바리새인이 현실 정치에, 즉 로마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다면 사두개인들은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아마 이런 차이는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종교적인 집단으로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보는 반면에, 비교적 부유하면서 제사장과 귀족 출신으로 이루어진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힘의 질서에 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할 것이다. 그 이외에도 성문율법과 구전율법에 대한 다른 평가 등,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불거진 부활 문제도 그 중의 하나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들과 영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으며, 천사나 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질문을 위한 질문
사두개인들은 근친결혼의 출처인 신명기(25:5-10)에 근거해서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칠 형제 중의 맏형이 어떤 여자와 결혼했다가 자식 없이 죽은 다음에,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했지만 그도 역시 자식 없이 죽었다. 이런 방식으로 칠 형제가 모두 자식 없이 죽었다면 부활한 후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도저히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는 비록 말꼬리를 잡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논리적으로는 그만한 무게를 담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구약성서에는 부활에 대한 생각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죽음은 그야말로 인간에게 미치는 가장 큰 재앙이었을 뿐이다. 이런 전통에 근거해서 사두개인들이 주장하려는 바는 이 여자가 부활 후에 칠 형제 중의 어느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볼 때 부활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두 가지 근거를 갖고 있다. 하나는 지금껏 아무도 죽음 이후의 부활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이런 경험으로는 부활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만약 부모가 젊어서 죽었고 그 자식들이 늙어서 죽었다면 부활의 세계에서 부모가 더 젊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즉시 죽은 아이들이 부활한 후에 그런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아주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부활이 이런 개인의 인격적 정체성이나 특성 없이 단지 혼령처럼 존재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기독교적인 인식과는 다르다. 이렇게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가 여기서 실증적으로 풀어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연과학적 준거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런 이유의 가장 밑바닥에는 그것이 과학적 원리에 위배된다는 생각이 있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역할까지 감당하고 있는 이런 자연과학만능주의는 자연과학의 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오류다. 지난날 종교가 과학을 종교적 잣대로 재단한 것도 큰 잘못이지만, 오늘날 과학이 과학의 잣대로 종교적 진리 파악의 방식을 가소롭게 여기는 것도 역시 경솔함의 소산이다. 지금 우리가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자연과학은 늘 이 우주 안에 일어나는 표면적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의 원리를 찾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귀한 학문임에 틀림없지만, 과학은 드러난 것의 원리만 설명할 뿐이지 그 원리의 근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뉴턴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극복한 현대 물리학은 자신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 물리의 세계가 그런 측정에 의해서 연구될 수 있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어떤 범주에서는 고정된 실체로서 관찰의 대상이 되지만 그 범주를 뛰어넘게 되면 전혀 다른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말이다. 이 이론의 시효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이다. 이 문제를 우리의 일상적인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보자. 생물학자는 유전 공학을 통해서 슈퍼 옥수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것은 드러난 현상이기 때문에 약간 공부만 하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생물학적 원리도 근본적으로 물, 햇빛, 탄소가 엮어내는 광합성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데, 우리는 이런 광합성이 왜 일어나는지, 그 근본적인 힘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모른다. 어디 이런 일뿐이겠는가? 왜 지구에만 물이 있고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아무리 진화론적 원리를 앞세워 생각해도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등장하게 된 그 근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물론 어떤 사람은 우리의 과학이 앞으로 더 발전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확실하게 해명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물리, 생물 현상은 어떤 기계적 원리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힘을 우리는 ‘우연성’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아마 종말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오히려 가장 본질적이며 현실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빙산의 일각에 대해서만 할말이 있는 자연과학을 근거로 해서 부활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주장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다른 생명 형식
예수는 사두개인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두 가지 각도로 답변한다. 첫째, 34-36절이 설명하고 있듯이 부활의 세계는 오늘의 생명 형식과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 예수는 이를 가리켜 천사와 동등하다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다. 바울도 고전15장에서 그렇게 진술하고 있듯이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지금의 생명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라는 점을 전제해야만 한다. 부활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그것이 흡사 이 땅에서의 생명이 그대로 연장되는 것으로, 그래서 여기서 즐겁게 생각하던 그런 형식들이 성취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으로는 우리가 도저히 부활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없다. 늘 배부르고 따뜻하고 만족스럽게 산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일 뿐만 아니라, 이 이 땅에서도 그런 것만으로 궁극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것은 기껏해야 노후보장을 위해서 온갖 보험을 챙겨놓은 사람의 심리상태와 별 다를 게 없다.
여기서 다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어떻게 다른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것을 누구에게나 인식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씨앗을 땅에 심고 물을 주면 일정 기간이 지나서 잎이 나고 꽃이 핀다는 그 현상에 대한 원리는 알지만 씨앗 속에 어떤 방식으로 꽃이 숨어있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현상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다르다는 말은 ‘은폐’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숨어 있는 ‘하나님의 생명 형식’이 곧 부활이다. 아마 이런 신학적 진술도 언어유희일 뿐이지 별로 확실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부활을 명증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언어 자체가 한정적일 뿐만 아니라 차안에서 경험하는 생명형식이 너무나 확고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현상의 배후에 훨씬 큰 생명의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나 인식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이런 깨달음이 가능할 것이다.
사두개인들을 향한 예수의 두 번 째 답변은 사두개인들의 판단 기준인 성서를 통해서 주어졌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3:6)이라는 구절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만약 사두개인이 생각하듯이 인간이 죽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면 하나님과도 상관없는 상태가 되는데, 성서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이 지금 살아있다는(부활) 것이다. 출애굽기의 그 구절이 반드시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쩌면 모세의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과 계약을 맺었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다만 예수는 사두개인들의 생각에 맞추어서 부활의 논리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생명이란?
부활 문제와 연관해서 우리는 영혼불멸설이나, 최후의 심판이 개인의 죽음 직후에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우주론적 종말 시에 이루어지는가, 우리의 몸도 부활하는가, 등등의 세부항목을 생각해야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이 모든 문제를 포괄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생명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명제만 간단히 짚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부활 문제는 결국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에 있는 난자와 남자의 몸에 있는 정자도 생명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좀더 구체적인 생명을 구성하고, 여성의 몸에서 분리되어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생명은 훨씬 확실한 생명체가 된다. 씨앗과 같은 난자와 정자가 꽃에 비유될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말이다. 바울이 우리가 변화된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하듯이 우리가 아직 인식할 수 없는 차원으로, 즉 아직은 하나님의 은폐 안에 숨어 있기 때문에 확인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생명체로 변화된다고 보아야한다. 다른 차원의 생명 세계, 변화된 생명의 세계를, 그 비밀의 세계를 희망하며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이다.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부활의 리얼리티를 온전히 밝혀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생명의 모든 것은 종말이 이르러야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면 우리는 이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다. 자기를 비우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으로써 미래에 다가올 생명의 힘에 휩싸이게 된다. 이직은 비밀이지만 그 생명의 세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면서 동시에 현재에 일어날 생명의 힘이다. 부활 신앙은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에 이미 참여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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