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가룟 유다
-배신인가, 혁명인가?-
본문 눅 22:47-53, 참조 눅 22:3-6, 마 27:3-10

유다 사건의 딜레마
로마의 씨이저가 친구들과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그 암살자들 중에 자기의 절친한 친구인 브루터스가 있는 걸 보고 “브루터스, 너 마저?”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런 역사적 배신 행위가 예수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자기 선생을 제사장들에게 판 유다가 그 장본인인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같은 제자들은 예수가 직접 불렀다는 기록이 있지만 유다는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가룟이라는 지명을 미루어볼 때 대개의 제자들이 갈릴리 출신인데 비해서 남쪽 지역 출신이라는 것만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제자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유다는 역사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유다의 배신 행위가 초대 교회에 던져준 교훈이 심각한 탓인지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네 복음서 모두 이를 보도하고 있다. 대충 줄거리는 이렇다.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예수를 팔기로 작정했다. 유월절 만찬이 끝난 다음에 예수가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틈을 이용해서 유다는 제사장의 종들을 데리고 예수에게 와서 늘 하던 대로 예수에게 입맞춤을 한다. 이게 바로 제사장의 종들과 약속한 신호였다. 매우 절박한 이 순간에 예수의 제자 한 사람이 검으로 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랐다는 에피소드로 인해서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의 긴장을 약간 풀어준다. 결국 예수는 강압적으로 체포당하고, 불법적으로 심야 심문을 당하며, 다음날 십자가형 선고를 받고 즉시 처형당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와중에서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찾아가 돈을 환불하면서 자기의 무고죄를 인정했지만 그게 성사되지 않자 목매어 죽었다는 참혹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유다의 비인간적인 배신 행위에 분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예감했으면서도 그대로 방치한 이유를, 더구나 어떻게 보면 그렇게 유도한 것처럼 보이도록 말씀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소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 제자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걱정하면서 누가 이런 몹쓸 행동을 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유다 스스로 “선생님 저입니까?”하고 묻자, 예수는 “네가 그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 우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바로 네가 나를 판다는 뜻인지, 너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지 말이다. 만약 유다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이었다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그대로 묵과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자신은 유다가 자신을 그렇게 배신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 문제도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다. 비록 유다에게 그런 낌새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그렇게 저주스러운 것이었다면(마 26:24) 선생으로서 유다를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왜 제자의 배신 행위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을까? 그래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이 가능하기 때문인가?

역사의 개방성
우리가 예수의 운명을 생각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모든 사건들이 이미 그렇게 계획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출생하리라는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사실이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일종의 역사 결정론인 셈이다. 교회에서는 이런 태도를 일반적으로 좋은 믿음으로 평가한다. 모든 일이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정해 놓으신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당연히 좋은 믿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신앙이라는 것이 이처럼 정해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진행되는 역사관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역사 결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책임이 근거해야 할 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유다만 보더라도 그의 행위가 이미 구약에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유다로서는 그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며, 따라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불의가 이미 결정된 숙명이라면 유다의 책임은 전혀 없다. 우리가 다음 주에 보게될 로마 총독 빌라도의 책임도 역시 물을 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가 이미 정해진 길을 가고 있다는 성서의 진술은 어떤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는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예수의 수난, 십자가형, 부활 등, 그의 구원론적 사건들은 역사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즉 이것은 이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신문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 보도한 게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신학적으로 해석된 진술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생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구원 사건을 부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새롭게 깨닫게 되었는데, 그 사건들이 구약의 여러 구절들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연결시켰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궁극적인 의미를 잘 모른다. 선천성 장애인들이 태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기독교가 왜 이렇게 분리되는지, 훨씬 문명화된 세계가 되었는데도 폭력과 증오가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역시 우리는 이런 역사적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 우선 우리는 성서 자체를 충분하게 아는 게 아니다. 그 안에 있는 예수의 말씀 중에서 어느 것이 예수가 직접 하신 말씀이며, 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해석인지 아주 명백하게 구분해낼 수 없다. 역사 비평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가려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궁극적 의미를 완전하게 밝혀낼 수 없다. 예수가 비유로 말한 하나님 나라를 명명백백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자 중에서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의 궁극적인 모습은 종말이 되어야 드러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 말은 곧 역사는 열려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은 역사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다. 창조적인 면에서나 파괴적인 면에서 똑같이 책임적인 존재다.

유다의 속내?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가 갖게 되는 또 하나의 다른 질문은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어디서나 배신은 일어나지만 선생을 배신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다. 복음서는 유다가 제사장들에게서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았다고 보도한다. 마가와 누가는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대제사장들에게 말을 하자 그들이 이를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고 설명하는 데 반하여, 마태는 유다가 처음부터 얼마를 줄 것인지 흥정했다고 설명한다. 아마 마태공동체는 유다의 자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배교 행위를 가장 위험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유다를 비열하고 치사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지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가 돈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까?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유다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훨씬 비범한 인물이었다. 일단 그는 제법 공부가 깊은 사람이었으며, 역사의식도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공동체의 재정 책임을 맡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면 아마 예수에게서도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별로 많지도 않은 은30냥 때문에 자기 선생을 배신했다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유다의 정신을 분석해본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 당시의 상황을 아무리 정밀하게 재구성해본다고 하더라도 정답을 찾아낼 수는 없다. 성서 기자들도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을 추정해볼 따름이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의 복음 운동이 예루살렘에까지 이르게 되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들은 제사장, 서기관들이었다. 공관복음서의 이야기 전개에 따르면 유다가 예수를 팔기로 마음먹기 전에 이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처리해버릴 방도를 꾸미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위험스러웠다는 증거다. 자신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율법과 안식일과 성전을 상대화하는 예수는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은 인물이었다. 신성모독자는 죽어야 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유다는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실현되기를 갈망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모든 질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로 변화되는 나라였다. 유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런 조짐을 보았을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내어쫓는 예수에게서 어떤 혁명의 불길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광야에서 수천 명이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는 광경을 보면서 이만한 세력과 이만한 카리스마라면 로마의 식민통치를 당장에 끝장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혼자 있기를 잘하며, 낮은 자리와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셨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 결국 유다는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가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국면으로 몰고 갔다. 예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것이다. 죽음 앞이라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혁명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예수를 따르는 이유
이런 점에서 유다는 분명히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실패는 어떤 인격적이거나 지성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예수에게서 전혀 다른 희망을 품었다는 데에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엉뚱한 것을 기대하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유다처럼 배신하거나 아니면 실망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예수에게서 찾는 게 아니라 예수가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역사의 비밀, 존재의 신비 안에 숙명적으로 빠져 있는, 어떤 철학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계 내 존재’이며 ‘피투된 존재’인 인간이 세계 밖까지 연관해서 작동하고 있는 이 세계와 역사를 판단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게 가장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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