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총독 빌라도
-정치가의 길-

본문 눅23:1-25, 참조 요18:28-19:26

우리는 빌라도가 어떤 정치 여정을 통해서 이곳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는지 세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방 장관인 총독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여러 식민지 중에서도 민족주의적 성격이 가장 강해서 반역과 폭동이 그치지 않았던 유대의 총독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점에서 빌라도의 정치적 능력은 인정받아야한다. 평상시 같았으면 빌라도는 총독 관저가 있는 사이사랴에서 총독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을텐데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임시로 예루살렘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고소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이런 고소고발 사건들이 늘 일어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약간 상황이 달랐다.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이 아주 조직적으로 삼십대 초반의 한 남자를 끌고 와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항목의 죄목으로 고소했다. 첫째, 이 사람은 우리 유대 백성들을 미혹했다. 둘째, 이 사람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했다. 셋째, 이 사람은 스스로 왕이며 그리스도라고 했다. 이런 내용이 어떤 근거가 있을까?
첫째 항목은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거리였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절대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그들의 눈에 그것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할 뿐만 아니라 유대의 사회체계를 그 뿌리채 완전히 흔들어놓는 반국가사범이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종교 체계를 압박해오는 도전과 그 위기를 빌라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사회 문제로 호도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항목은 그야말로 무고에 해당되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 예수는 이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통해서 답변했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날조였다. 그들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이렇게 덮어씌우는 이유는 아마 다른 죄목으로는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세 번째 항목이야말로 이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구석을 보아도 그리스도로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예수가 그리스도 행세를 한다는 게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자칭했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예수가 자신의 메시야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리가 없다. 어쨌든지 이들은 예수가 정치적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빌라도에게 부각시켜보려고 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건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단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예수에게 적용된 죄목 중에서 세 번째 항목이었다. 예수의 대답은 “당신 말이 옳소”였다(3절). 헬라어 성경에는 “쉬 케게이스”(그 말은 네 말이다)로, 루터 성경에는 “두 작스트 에스”(그것은 네가 한 말이다)로 표현되어 있다. 이 언급이 상대의 말을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빌라도의 질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단 한 마디의 질문과 응답으로 끝나지만 요한복에는 진리논쟁과 비슷한 문답에 진행되었다. 오늘 본문처럼 한 두 마디로 이 재판이 끝난 것은 아니겠지만 예수가 빌라도의 질문에 별로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말을 나누어도 늘 평행선만 달릴 뿐이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의 지방 장관으로서 사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빌라도는 예수가 죽을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첫째, 유대 백성을 미혹하게 했다는 주장은 순전히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일 뿐이었지 식민통치가 위협받을만한 종류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째, 앞서 말한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은 빌라도의 정보망에도 들어오지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였다는 주장은 원래 유대인들 중에서 그런 흰소리를 내뱉은 이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대수롭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는 대제사장과 군중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4절)고 말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더욱 강한 어조로 빌라도를 압박했다. 예수가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여기 예루살렘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한다고 말이다. 갈릴리는 원래 반로마 소요가 자주 일어나던 곳이었다.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은 사회 소요에 대해서 거의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는 총독의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서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일종의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발언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오심을 내릴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는지 빌라도는 여러번에 걸쳐서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했다. 군중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보도에 의하면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 예수에게서 사형당할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22절). 그의 논리는 세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빌라도 스스로 예수에 대한 고소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 둘째,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도 역시 예수에게서 명백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15). 셋째, 예수에게 체형을 가하는 것으로 정리하겠다. 어쩌면 빌라도는 예수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인물인지 모른다. 웬만하면 한 두 번 정의롭게 재판하는 시늉을 내다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말텐데 그는 최후까지 예수를 살려보려고 애를 썼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빌라도의 부인이 꿈자리 운운하면서 이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했으며, 빌라도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물로 손을 씻으며 이 일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에게 십자가형 선고를 내린다. 자칫 유월절에 모인 군중들이 혁명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는지, 예수를 살려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협박에 굴복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예수를 십가가에 못박히도록 내어주었다. 그 결과로 그는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가룟 유다와 더불어,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악한 인간으로 낙인찍혀왔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빌라도의 사형 선고가 성서의 진술대로 군중들의 압력에 의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은지 아니면 자신의 확고한 사법적 판단이었는지 생각해보자.
첫째, 성서는 예수를 석방하려는 빌라도의 의도를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이 다수의 힘으로 눌러버림으로써 결국 이런 결과에 이르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총독이라 하더라도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에게 무언가 약점을 잡힌 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식민지의 치안을 자기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삼는 총독으로서 이런 상황은 분명한 위기였을 것이다. 유월절은 원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만약 총독에 대한 불만이 나쁜 쪽으로 표출되었다가는 아마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염려를 했을 수도 있다. 원래 정치인은 이렇게 계산이 많은 법이니까 말이다.
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의 정치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처럼 정치가 과잉생산되고 있는 이런 사회에서는 이런 질문이 더욱 절실하다. 기드온의 아들 71명 사이에 벌어진 골육상쟁 중에서 막내 아들 요담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사사기 9장에 기록되어 있다.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려고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하니까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면서 거절했다. 무화과나무도 거절했고, 포도나무도 역시 “나무들 위에 요동하겠는가” 하면서 거절했다. 가시나무만이 모든 나무를 억압하는 왕이 되려고 한다. 어쩌면 정치는 근본적으로 사람들 위에서 허세를 부리면서 요동하는 짓인지 모른다. 요즘 우리의 정치 행태를 보면 이 말이 정확한 것 같다. 사람들은 나무들이 각각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자기 본질에 충실한 것처럼 살기 보다는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목표로 산다. 그것의 체계화가 바로 정치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인간 사회가 정치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도저히 이런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왕에 정치적으로 살아야 한다면 빌라도처럼 대중에 휘말리는 정치가 아니라, 즉 대중추수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확고한 정치철학을 실현해나가야만 할 것이다.
둘째, 빌라도의 사법판단은 비록 외면상 군중들의 뜻을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것 같지만 오히려 대로마제국의 지방장관으로 확고한 정치적 결단일 수도 있다. 로마를 대표로 하는 이런 제국의 속성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질서를 유지시켜나가는 것이다. 소위 “status quo”(현실유지) 차원에서 변화의 싹을 아예 잘라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지만(요18:36) 빌라도의 날카로운 눈에는 예수에게서 무언가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힘이 보였을 것이다. 그의 직관은 역사가 증명했다. 로마제국은 몰락하고 대신 기독교가 유럽역사의 중심에 섰다. 반면에 예수를 처리함으로써 그 비상한 기운과 힘을 미연에 막아보려는 그의 선택은 실패했다. 즉 십자가형으로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예수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오히려 확산되었다. 군중과의 타협이나 굴복으로 인한 것이었든지, 고도의 정치결단이었든지 빌라도의 십자가형은 결국 엄청난 음모였으며, 그런 정치적 속성은 늘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한계를 드러내며, 자기 함정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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