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무덤을 찾은 여인들
-빈 무덤으로부터-
본문 눅24:1-12, 참조 막16:1-8

복음서의 서술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향해서 급박하게 전개되던 국면이 예수의 매장으로 인해서 잠시 정적의 시간으로 바뀐다. 자신들의 선생이 무고하게 처형당했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제자들은 무교절이 시작되는 안식일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이유로만은 무언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끽소리 못하고 있었다. 이들의 침묵은 무슨 의미일까?
우선 예수가 로마의 정치범으로 처형당했다는 사실로 인해서 제자들이 주눅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는 십자가형에 담긴 사회학적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없다. 더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이미 구원론적 의미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심각하다. 굳이 우리의 현대사와 연결시켜서 설명하자면, 지난 군사 독재 시절에 간첩 혐의를 받고 사형 받은 이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최근에 다시 확인되었듯이 “인혁당” 사건이 바로 그 본보기이다. 그 사건의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사형선고를 받은지 만 하루가 되기도 전에 사형집행된 이들의 가족들은 그 이후로 오랜 세월 숨소리 하나 내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당한 자신의 선생을 변호할만한 능력도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그렇게 하고 싶은 의도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렇듯 쥐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을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이 발동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제자들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보도를 보더라도 이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두 가지 가능성으로 좁혀진다. 예수가 자신의 부활을 앞에서 예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또는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했거나 귀담아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제자들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몇몇 여자들은 매우 현실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반응했다는 사실을 네 복음서가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장례 절차가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있던 이 여자들은 향품을 준비하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가 매장된 아리마데 요셉의 가족 묘지로 갔다.
이 부분부터 복음서마다 그 세세한 묘사가 약간씩 다르다. 복음서에 따라서 우선 이 여자들이 돌문을 어떻게 열지 걱정했다는 내용을 첨가시키거나 또는 생략했다. 무덤 안에 들어간 후에 예수의 시체가 없다는 사실은 똑같은데 세마포만 보였다고 설명하거나 단순히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 장소에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이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그가 사람인지 천사인지 제 각각 다르다. 아마 이런 차이들은 일단 마가복음을 기초 자료로 사용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들이 양식사적 과정을 거쳐왔으며, 또한 복음서 기자들의 독특한 편집사적 관점이 작용한 탓이다. 복음서가 정경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차이점들이 통일되지 않은 이유는 일단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교회는 부활 사건의 세세한 차이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부활 사건 자체에만 신앙의 무게를 두었다. 둘째, 교회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서 완벽하게 구성하기 보다는 성령의 가르침에 의지했다. 그래서 교회는 비록 전설적인 성격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부활 보도에 대한 여러 전승들을 그대로 보존했다.
오늘 본문에서 핵심 구절은 5,6절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단순화 시켰다. 하나님의 영이 죽은 예수에게 임하는 장면이나 세마포가 풀리는 장면, 그리고 멎었던 뇌와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순간, 눈을 뜨고 일어나 앉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 기독교의 생사가 걸린 사안을 이처럼 몇 마디 말로 단촐하게 언급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교회가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설명한다.
우선 사실관계를 보자면,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장면을 직접 목도한 게 아니라 이미 부활로 현상한 예수만 만났을 뿐이다. 자신들이 못본 것을 추리해서 자세하게 서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부활 보도는 비록 신화적 성격이 섞여있지만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묘사가 아니라 공백을 그대로 놓아두고 자신들의 경험만을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즉 무덤에 매장된 사실과 부활한 예수의 현현 사실의 공백은 제자들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결국 교회로서는 부활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사건을 억지로 풀어내려고 하다가는 자기 모순이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복음서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라. 그는 살아나셨다”고 증언을 할 뿐이다. 물론 바울은 부활을 변증하고 있지만(고전15장) 그것도 역시 “씨앗”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을 뿐이지 어떤 사실적인 설명은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작업이 설교라고 한다면 여기서 설교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가 자신의 자리를 분명하고 인식하고 꾸준하게 준비를 한다면 이런 딜레마가 오히려 어떤 진리를 열어낼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산 자”와 “죽은 자”는 오늘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인 생명에 담긴 심층적 차원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선으로 여기지만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차원에서보면 전혀 다른 경계선이 있다. 죽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이런 형식의 생명이 끝장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포와 우리의 감각이 근본적으로 그 능력을 상실하는 상태다. 이런 능력을 가능한대로 최대한 늘려보려는 것이 오늘의 의학기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삶의 형식은 아무리 확대되고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늘 한정적이다. 물론 이 땅에서의 삶이 여러 면에서 지극하고 절실하고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완전한 만족에 들어갈 수는 없다. 이런 형식을 절대적인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죽은 자”의 영역이다.
예수의 부활은 이런 형식으로 벗어난 사건이다. 그는 그야말로 “산 자”가 되었다. 그에게 임한 생명 사건은 우리가 이 땅의 경험으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구체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세계의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런 생명만이 궁극적이고 참되다는 것이다. 그런 부활의 생명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하는 모든 삶의 내용들은 허무하다. 모든 사물이나 일이 결국 사라지거나 다른 것으로 윤회될 뿐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산 자”는 죽음으로 끝장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 형식으로 들어간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런 사건에는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손톱만큼도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할 뿐이다. 그래서 루터는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총)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아주 쉽게 생각해보라. 인간이 절대적인 구원 사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말이다. 의학기술을 발전시켜서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수명을 늘릴 수 있으며, 도덕심을 함양시키고, 법을 합리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의 도덕심이나 행위를 약간 세련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이외에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실 걱정 없이 완전 복지 국가에서 살 수 있게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사실은 이런 일 마저도 인간이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지만, 설령 그런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여전히 결정적인 무엇이 부족하다. 옛날에 비하여 오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흡사 왕처럼 살고 있지만 옛날에 비해서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역시 우리는 이런 인간의 일들이 갖는 결정적인 한계를 직시한다.
그렇다면 철학이나 정신분석, 또는 명상같은 일들이 이런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마약에 취한 사람이 감정적으로 가장 큰 희열의 상태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심리상태가 어떤가 하는 점만으로 그 작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이 판단의 잣대는 보편타당성에 있다. 우리가 사이비 종교를 비판하는 것도 역시 각각의 사람들이 어떤 초월적 경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인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는 이 부활 사건이 그 어떤 사물이나 인간의 행태와 비교될 수 없는 고유한 생명이라는 사실과 아울러서 그것의 보편타당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즉 부활의 초월적 성격과 내재적 성격이 관건이다.
끝으로, 예수의 빈문덤을 둘러싼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여자들로서, 이들은 빈무덤을 최초로 보았다. 그러나 그 사건의 내막을 알지는 못했다. 또 다른 이들은 이 사건을 보고한 여자들을 맛이 간 것으로 보았다(11절). 세 번째로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확인했다. 이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의 부활 사건을 예상하거나 기다리거나 나중에라도 깨달은 이는 없었다. 단지 이상하게만 생각했다. 아마 오늘도 대개의 사람들은 부활을 실질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렴풋이, 냉소적으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어쨌든지 막달라 마리아가 이 사건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최초의 증인으로서 교회의 신앙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우리도 예수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엄청난 일을 목도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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