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엠마오 두 제자
-어둠에서 빛으로-
본문 눅24:13-35

소위 “엠마오 두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의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약간의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막16:12,13) 누가의 문학적 특성이 두드러진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샬에 의하면 음식을 축사한 다음에 떼어주었다는 표현은 오병이어 사건과 문학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어떤 낯선 이가 나타났다가 어떤 깨달음을 주고 졸지에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에디오피아 내시 이야기(행8:26-40)와 유사한 구조로 짜여졌다. 다른 한편으로 죽은 사람이 여행하는 친구들에게 나타나서 대화하고 그 친구들의 눈이 열려 그 사실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형식은 일반적 전설의 형태를 지닌다고 한다. 엠마오라는 마을이 어딘지 지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점은 이 이야기의 역사성이 부분적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어쨌든지 이 엠마오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의 전승과 누가의 문학적 편집이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서 자신들의 일상적 경험에서 벗어난 예수의 부활 현상을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는 다른 보도에 비해 훨씬 자세하면서도 나름대로 해석학적 논리성에 근거해서 서술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전승의 과정에서 개입된 전설이며 누가의 편집인지 정확하게 가려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명백하게 들추어내야만 바르게 접근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말도 되지 않은 허망한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전설적인 성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를 파악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한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전승과 전설, 편집의 과정을 거친 이런 이야기들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파악할 수 있으면 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그 무덤에 시체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날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를 향해 가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들의 눈이 가려졌다는 서술은 우리에게 몇 가지 관점에서 해명이 가능하다. 우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엠마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 방향에 있다고 한다면 이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면 걷는 중이었을 것이다. 태양을 마주보고 걷는 사람은 눈이 부시기 때문에 곁에 다가온 사람을 자세하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한편으로 이 두 제자는 며칠 동안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많은 일돌로 인해서 심리적으로 피곤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생각했던 스승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무덤 속의 시체가 사라졌다.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주변의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눈이 가리워졌다는 이 현상은 우리에게 훨씬 심층적인 의미가 있다. 즉 우리는 일상적으로 진리에 대해서 눈 감고 산다. 우리 옆에 누가 다가오긴 하는데 그가 부활한 예수인지 보이지 않는다. 진리는 감추어 있기 마련이다. 아마 톨스토이의 동화라고 생각되는데, 어떤 구두 수선공이 자기 앞에 가난한 여자로, 청소부로, 사과장수로 나타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다.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 어떤 것만 보고 있을 뿐이지 진리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이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가장 영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현상이다. 과연 교회 안에서 이런 영적인 세계를 실제로 경험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것들에만 눈이 팔려있는 상태는 아닐까? 지난 주일에 안강의 어떤 교회의 예배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늘 느끼는 바이지만 그 때도 역시 너무나 많은 행사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영성이 매말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행사는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영적인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데, 행사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행사들은 많을수록 결국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거나 흡사 시트콤처럼 잠시 우리의 눈요기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의 눈이 가려지는 이유는 잘못된 경험이 우리의 판단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바로 모세의 율법이 그들의 경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데에 근거한 것처럼 말이다. 교회 안이나 밖이나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아주 미미한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 경험들이 때로는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를 등한히 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늘 우리 주변에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지만, 이번에서도 역시 수능시험 점수가 예상보다 떨어졌다는 이유로 어떤 여학생이 자살했다. 이 학생은 아마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자기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확신한 것 같다. 이처럼 별로 정확하지도 않은 작은 경험 때문에 삶의 의미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일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자신들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주 불확실한 것에 자기 목숨을 걸어두는 일 말이다.
이 두 제자는 낯선 사람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했으며, 예수는 이 두 제자에게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런 대화가 끝난 후 날이 저물자 이들은 여관에 들어간다. 예수는 떡을 떼어 축사하고 이들에게 주었다. 이 떡을 먹은 두 제자는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예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이야기에는 앞서 말한대로 예루살렘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무 책임자에에게 빌립이 성서를 해석해주고 세례를 베푼 다음에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행8:26)와 예수가 많은 군중들에게 떡을 떼어주었다는 오병이어 사건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다메섹을 향하던 바울의 눈이 멀었다가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밝아졌다는 바울의 회심 사건(행9장)과도 연결된다.  
이 부분에서의 핵심은 성서 해석과 떡을 뗌과 눈이 밝아짐이다. 누가에게 이런 해석학적 의도가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이 세 항목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 경험이 어떠해야하는지 알 수 있다. 우선은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며, 둘째는 성만찬 경험이고, 세 번째는 실제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각성되는 순간이다.
1) 기독교의 진리 경험은 우선 바른 성서 해석에서 시작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미련하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구나.”(25절, 공동번역). 같은 성서를 읽으면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해되고 믿겨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판넨베르크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을 하찮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소중한 것을 놓쳐버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는 바른 지적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소홀하다. 물론 모세의 전통이 바리새인들에게 폐쇄적으로 적용된 것처럼 전통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낼 수 있다면 새로운 것보다 훨씬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원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2) 성만찬은 신학적으로 예수의 성육신을 의미한다. 영원한 신성이 유한한 사물 속에 구체화되는 사건이다. 불가시적 세계가 가시적 세계에 들어옴으로써 초월와 내재가 하나를 이루었다. 이는 곧 예수와 그리스도의 동일시를 가리키는데, 이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이다. 이것에 근거해서 우리는 세계 모든 사건을 해석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3) 바른 성서 해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인식하게 되는 사람은 이제 영안(靈眼)이 열리게 된다. 이 영안 문제는 어떤 마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인식 능력에 속한 것이다. 시인들에게 시의 세계가 열리듯이, 예술가들에게 그런 세계가 보이는 순간이 있듯이 종교인들에게도 역시 그런 계기가 주어진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세계를 꿰뚫어볼 수 있는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늘 본문에서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았다고 했듯이 말이다.
눈이 밝아지는 경험을 한 이 두 제자는 이미 앞서서 예수가 말씀을 풀어줄 때 마음이 뜨거웠다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한다.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이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옳은 말이다. 어떤 진리를 깨달을 만큼의 준비가 되어야만 그 진리를 경험할 수 있지 그런 준비가 없으면 아무리 놀라운 현상 앞에 서더라도 그냥 지나칠 뿐이다. 결국 우리는 죽은 다음에 이 삶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 옆에서 말씀한다고 하더라도 실감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에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건을 우리는 놓친다. 이게 바로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종말에 드러나게 될 그 궁극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미 선취적으로 발생했다고 믿는다. 이 사실을 참되게 믿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삶이다.
매우 극적으로 전개된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예수의 부활은 구약성서가 이미 기대하고 있는 바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구약성서를 서슴없이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아들인 이유도 역시 바로 이런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둘째, 부활한 실체가 바로 예수이다. 이 점이 바로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구별되는 결정적인 주장이다. 이미 구약성서에, 특별히 묵시문학에 부활 사상이 담겨 있는데, 초기 기독교는 이것이 바로 예수에게서 발생했다고 믿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살아간다. 모든 생명의 완성이라 할 종말의 부활 사건이 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선취되었다. 이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근거를 잃어버리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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