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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부활절 조회 수 15133 추천 수 0 2016.04.24 21:22:14
설교듣기 : https://youtu.be/J86Q_WIhVx4 
설교보기 : https://youtu.be/XO-bdCz79ac 
성경본문 : 요한복음 13:31-35 

서로사랑하라.

13:31-35,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6424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두 군데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 13:13절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고, 요일 4:16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사랑에 관한 구절은 많습니다. 예수님도 사랑에 대해서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약간 다른 상황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34,3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런 구절을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 사랑해야겠구나, 그게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증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습니다. 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끼리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인들끼리의 관계도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미움과 적대감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세계 교회에서 가장 많이 싸우는 교회가 아마 한국교회일 겁니다. 특히 로마가톨릭교회에 비해서 개신교회가 유별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교구에 속한 모든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에 반해서 개신교회에는 개교회주의가 강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런 개교회주의로 인해서 신자들이 남다른 열정으로 교회에 봉사하기는 하지만 다툼이 일어날 때는 이전투구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기업처럼 여기고, 교회에 다니는 건 기업에 투자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크게 다투는 경우가 아니라 평범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는 토요일에 결혼하는 정솔뫼 집사의 주례를 제가 맡아서 어떤 말을 할까, 생각 중입니다. 제가 1980년부터 36년 동안 목사로 살았기 때문에 비록 작은 교회에서만 목회를 했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주례를 본 적이 제법 됩니다. 몇 편의 주례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춰서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신랑과 신부가 늘 새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새로운 말씀을 준비합니다. 이번 토요일에 저는 신랑 신부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일반적인 말이어서 실질적으로 느끼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아직 결정된 게 아닙니다. 상대방을 보고 싶다거나 상대방의 실수를 용서한다거나 생일을 기억하는 것들을 사랑 자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더 근원적인 생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듯이 사랑도 규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 이름을 사랑의 교회라고 붙여도 사랑의 능력이 생기는 건 전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은 부담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부담이 쌓이면서 사랑이 공자 왈처럼 진부한 말로 전락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예수님은 왜 서로 사랑하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 걸까요?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봅시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인 요 13:21 이하에는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오늘 본문 바로 뒤 구절인 요 13:36-38절에는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3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대표적으로 유다와 베드로가 거명되었지만 실제로는 열두 제자 모두가 이런 일에 연루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자들에게 배신과 부인의 신앙적 위기가 찾아오곤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일반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공동체가 해체될지도 모를 위기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새 계명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한 말입니다. 19: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인류의 수많은 스승들도 사랑하라고, 또는 다른 말이지만 비슷한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말들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새 계명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사랑이라고 했다면 굳이 새 계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34(b)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넓은 의미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사랑하라는 겁니다. 사랑이 예수라는 인격, 그의 삶, 그의 운명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착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윤리 도덕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고, 예수와 일치해야 한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오늘 설교 본문 앞에 유다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앞에서 짚었습니다. 다시 그 앞으로 가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4,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올 때마다 기독교 대표자들이 노숙자나 시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발을 씻기는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지금의 교황도 자주 그런 일을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가 장로의 발을, 장로가 신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사를 벌입니다. 그걸 감동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왕 그런 일을 하려면 매스컴에 나오지 말고 조용히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일이 고대 유럽에서는 노예의 몫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본을 보이셨다는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노예처럼 철저하게 섬기는 자세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는 가능할 겁니다. 가족끼리도 가능합니다. 저도 딸들이 어렸을 때는 발은 물론이고 늘 목욕을 시켰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나 다 큰 아이들의 발을 가끔 씻기고, 발톱도 깎아준다고 합니다. 좋은 거 같습니다. 장애시설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을 자주 해야 합니다. 수도원에서도 수사들끼리 그런 세리머니를 펼칩니다. 노예처럼 그대를 섬기겠다는 태도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의 태도가 세속사회에서는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노예처럼 섬기겠다는 태도로 기업을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에서 사랑하라는 말을 일반화하는 설교를 가리켜 가현설적 설교라고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사랑에 대해서 감동적으로 설교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어떤 신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굶는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보내거나 어려운 이들이 있는 시설에 가서 봉사하는 일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교양인으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예수 믿는 기업가인 자기에게서 문제는 경쟁 기업가와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 관계에서도 사랑하라는 명제가 타당한가, 타당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현대인들은 안고 삽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 윤리에서 다뤄야할 굉장히 광범위한 주제라서 설교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인의 발을 씻기는 노예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 집단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제자 집단이라 할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세속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교회라는 특별한 공동체 안에서도 발을 씻겨주듯이 노예처럼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생각에 떨어지기 쉬운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서로 경쟁을 합니다. 속상한 일들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어떤 이를 무시하기도 하고, 잘난 체 하기도 합니다. 그게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속으로는 아주 민감하게 작동합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할 때도 많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교회가 뭐 이 따위야, 하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의 실수로 생겼든지 문제가 생기면 교회 전통이나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서 덕스럽고 합리적으로 처리해나가면 됩니다.

 

저는 노예와 같은 섬김의 삶도 은사의 원리를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는 각각 다르고 고유합니다. 그 은사의 영역에서만 섬기는 자세를 유지하면 됩니다. 신자들이 교회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섬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에서 섬기는 태도로 살아가려면 지칩니다. 시험에 듭니다. 사랑의 짐에 눌려서 신음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목사인 저의 은사는 설교입니다. 노예가 주인의 발을 씻기듯이 말씀을 충실하게 준비해서 전하는 것이 저의 은사이고,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저는 목사이긴 하지만 교회의 모든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 분들에게 좋은 목사가 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저는 제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2) 노예가 주인의 발을 씻긴 후에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저는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게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교회 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뭔가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일로 신자들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겠다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를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전폭적인 헌신을 누군가 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의 역동성이 사라진다고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주인의 발을 씻기는 노예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일단 그런 기초를 확실하게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테니스를 배울 때도 작은 것부터 정확하게 배워야합니다. 욕심이 많아서 여러 가지 기술을 한 번에 배우려고 하면 오히려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일단 하나의 은사에서만이라도 노예의 영성으로 섬김의 태도를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자리를 잡으면 다른 부분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이 전체적으로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사랑의 공동체라는 역동성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발을 씻는 노예의 영성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니이체는 기독교 영성을 자학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독교 영성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인의 발을 씻기는 노예는 어머니가 아기를 목욕시키는 마음으로 그 행위를 하는 겁니다. 사심이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사심이 완전히 제거된, 마치 조각칼을 들고 조각을 하고 있는 예술가처럼 발 씻는 행위에 몰입하고 있는 노예라면 그의 행위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심 없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섬기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목사인 제가 어떻게 사심 없이 설교 은사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랑을 퍼포먼스로 보여준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3: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곧 사랑의 실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참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생명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비록 부분적이나마 실제의 삶에서 노예의 영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한 여자가 누가복음 7:36-50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갔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창녀로 추정됩니다. 그런 여자가 식사 자리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녀는 예수님 곁에 다가와 앉아서 울었고, 그 눈물이 예수님 발에 떨어졌습니다.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 발에 떨어진 눈물을 닦은 뒤에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노예와 같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니 노예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간 절정의 사랑이었습니다. 주인인 바리새인을 비롯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아주 언짢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눅 7:47절에서 이 여자에게 사랑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바리새인을 책망하셨습니다. 현대 지성인의 한 전형이라 할 바리새인은 책잡힐 일이 많지 않은 사람이기에 결국 사랑의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이게 억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사랑의 명령으로 받아들여도 안 됩니다. 사랑은 율법이나 윤리가 아니라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삶의 능력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우리는 서로’, 그리고 창조적으로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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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April 25, 2016
*.199.34.27

 결국 사랑의 능력이란

어떤 노력이나 수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경험했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군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사랑을 못한다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깊이를 넓혀갈 일이라는..

 저 자신을 보면서 사랑할 능력도,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구나..

뼈져리게 느끼고 있던 터라.. 오늘 말씀이 새롭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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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April 25, 2016
*.199.34.27

근데 이 댓글을 쓰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랑도 어렵지만 하나님을 아는 건 더 어려울 것 같다는..

그 광대하고 막막한 분을 어찌 경험해야 할찌요...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한다...'는 의미가  잡힐 듯 말듯,

알 듯 모를 듯.. 저에게는 현재 그렇습니다.

사랑도,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하는 것도 모두 다

내 능력 밖이고 은총이 아닐른지요. 

우리는 그저 지향만 놓치지 않고 가야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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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5, 2016
*.164.153.48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 심화되어야 할 구도의 길이겠지요.

일단 그것을 기독교 교리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성취에 대한 강요, 또는 욕망과

자기 소멸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익숙한 용어로 바꾸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제가 늘 하던 이야기지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좌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단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창조와 창조의 완성인 종말과도 깊이 연관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총체적인 사건이지요.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든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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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은목오크

April 25, 2016
*.104.250.13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듣노라면

(잘 안되지만, 말씀이 그리하라시니) 서로 사랑해야지......

라고만 막연히 생각해 왔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말씀으로 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카리스마안에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면.. 자유함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하는 열심이 지나쳐서 여기저기 다니며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것은 문제가 되겠고,

주어진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으로만 숨는것도 문제가 되겠습니다.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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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5, 2016
*.164.153.48

우리 기독교인들이 은사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저도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늘 흔들린답니다.

오크 님이 '어려워요...'하고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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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April 26, 2016
*.36.135.121

사랑도 참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해서 한 일이 결과적으로 악이 되기도 하니까요. 자기욕망의 투사를 사랑이라고도 하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으로 사랑을  행할 수 있고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성욕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자식사랑이라 하면서 자기욕망을 채우려 하고요. 사랑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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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6, 2016
*.164.153.48

온마음 님이 짚었듯이

사랑의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다만 사랑의 능력에 종종 휩싸일 수는 있는 거지요.

그런 은총을 허락해주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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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April 27, 2016
*.62.169.20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가족들이 낯설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의 말과 행동들이,

그리고 그 순간들이 낯설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린 대체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하고 웃고 있는 것인지...

아이들의 웃음 하나, 투정 하나도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이 순간들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삶의 능력이라는 말씀 깊이 공감하고 지지합니다. 

사랑은...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애개서 나타나는 삶의 흔적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더 하나님께 집중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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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7, 2016
*.164.153.48

낯섬에 대한 경험을 하시는군요.

거룩한 두려움의 한 현상이도 한 그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과 연결됩니다.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절대타자로 경험되는 것과 같은 거지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느끼고 인식하는 한 순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게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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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인자무적

April 29, 2016
*.237.66.217

목사님 제가 지난주엔 설교를 듣는중에 사랑에 대해 고민하다 설교내용을 너무 놓친것 같습니다.

다시금 설교내용을 읽고보니 고민하던 것들이 많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즉 사랑이란 주어진 은사에 사심없이 최선으로 섬기는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많이 공감이 갑니다.

제가 너무 사랑의 일반적인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던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때론 나머지 공부가 필요할때가 있나 봅니다.. 주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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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9, 2016
*.164.153.48

ㅎㅎ '나머지 공부'는 누구에게만 필요합니다.

결과적으로 핵심을 정확하게 포착하셨군요.

주어진 은사의 범주 안에서 사심없이(노예의 영성) 섬길 수 있다면,

더 이상의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도 한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충실한 거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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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April 30, 2016
*.69.199.48

온유와 겸손의 모습이 사랑의 능력이라고 보는데,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이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총이 주어져야 하겠지만,

열심히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이루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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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12,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XO-bdCz79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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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22, 2017
*.222.51.5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극한의 충격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은 엘리야, 세례요한,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인간들인 제자들을 살리시고 엘리야, 요한,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왜 죄 없는 예수께서 죽으셨을까. 제자들은 충격 속에서 수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냥 악한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면 누구하나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따르던 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불완전하고 약한 자신들을 살려 놓으셨을까? 잘한 게 없는데.

제자들은 초중량급 인사의 죽음과 자신의 삶을 비교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엄격한 심판으로 여러 개의 십자가를 세우시고 죗값으로 인간을 달아버린다면 당연히 제자들이 달려야 할 판인데....

 

제자들의 가치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급상승하였습니다.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생각은 제자들을 확 바꿔버렸습니다. 엄청난 충격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따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충격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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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3, 2017
*.164.153.48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화두입니다.

언젠가 세상이 꽃으로 변한다고 노래하는 시인처럼

우리도 언젠가 세상이 부활 생명으로 변한다고 노래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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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457
645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644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525
643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145
642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7
641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16
» 부활절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15] 2016-04-24 15133
639 부활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 10:22-30) [13] 2016-04-17 6633
638 부활절 죽임 당한 어린 양 (계 5:11-14) [9] 2016-04-10 7743
637 부활절 부활의 증인이란? (행 5:27-32) [9] 2016-04-03 7708
636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40
635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034
63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841
633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147
632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16
631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299
630 사순절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6] 2016-02-14 7736
629 주현절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3] 2016-02-07 8490
628 주현절 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 [9] 2016-01-31 7904
627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23
626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466
625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 3:15-17, 21-22) [4] 2016-01-10 8256
624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415
623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715
622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621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355
620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4
61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450
618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18
617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8997
61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2
61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0
614 창조절 쉐마 이스라엘! (신 6:1-9) [4] 2015-11-01 15508
613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612 창조절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히 5:1-10) [8] 2015-10-18 8223
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1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3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7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5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4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17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7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48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9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8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8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6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55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2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0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5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11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7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899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1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3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5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69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2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2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1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0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2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4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2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9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2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58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4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7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0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3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4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4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25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4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1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2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1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4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59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3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5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299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79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5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4
5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1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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