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숨과 결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목사-

이 설교비평 꼭지에 글을 쓰기 위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해서 얼마 전, 나는 가까운 영남신학대학교 도서관에 들렸다. 일반적으로는 미리 대상을 결정한 다음에 그 설교자의 설교 정보를 찾았지만 이번에는 무작위로 대상을 찾아보려는 심사였다. 일단 전집 형태로 된 설교집을 몇 권 집어 들고 차례와 내용을 대충 훑어본 다음, 나름으로 지명도가 있는 몇몇 분들의 설교집도 빼내어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들 중의 한 설교자를 대상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머지 것들도 천천히 살펴보다가, 평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을 발견했다. 민영진. 이분이 혹시 지난 10월 하순 경에 우연한 기회로 딱 한번 만나 뵌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신 민영진 목사님(이하 ‘민 목사’)이란 말인가?  
삼민사에서 출판된 <하느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이라는 제목의 그 설교집은 제본이나 표지 디자인이 수수했다. 앞표지 날개에 저자의 근영과 함께 이력이 소개되어있었다. 연세대학교를 거쳐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공부(Ph. D)하시고,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1971-1987)를 거쳐 대한성서공회 번역담당 부총무(1991년 현재)로 재직 중인 이 저자는 내가 만나 뵌 바로 그분이었다. 전문적인 목회자가 아니라 교수와 성서번역과 국내외 성서보급에 한 평생을 바친 분이 설교집을 내셨다니 웬일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책 중간 쪽을 펼쳤다.

이삭과 입다의 딸
처음 눈에 들어온 설교의 제목은 “하느님과 아버지와 아들과 딸”이었다. 본문(창 22:1-14)은 그 유명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다는 이야기였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으로 설교했는가. 평자는 당연히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 또는 이삭의 순종, 그리고 미리 번제물을 준비해두신 여호와 이레의 은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리라 예상을 했다. 민 목사는 이 본문에 얽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설교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민 목사의 부친은 목사이셨다고 한다. 부친께서는 민 목사가 어렸을 때만이 아니라 목사가 된 다음에도 아들을 앞에 놓고 아브라함의 뜨거운 믿음을 감동적으로 설교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설교를 듣는 아버지의 아들은 아버지만큼 감동적이진 못했습니다. 저렇게 믿음이 좋고 하느님께 대한 순종심이 강한 아버지께서 언젠가는 아브라함처럼 나를 잡아 죽여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믿음 좋은 아버지를 가능한 한 멀리했던 것이 저의 어린 시절의 한 단면입니다.(<하느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 삼민사 , 1991, 150쪽. 이하 제목 없이 달린 쪽수는 모두 이 책을 가리킴)

민 목사의 이런 경험을 통해서 청중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가 먼 옛날 유대인 족장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아브라함 이삭 콤플렉스”로 이름을 바꿨는데,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은 본문에 대한 여성 신자들의 태도를 매우 절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매 여러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여러분의 아들이 하얗게 질린 채 달려와 ‘엄마, 아빠가 날 죽이려 했어. 날 죽여서 바치려 했어.’라고 말하면서 엄마 품속으로 파고든다면 아마 여러분은 기절했을 겁니다.” 민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삭이 집으로 돌아와 리브가에게 그날의 자초지종을 전하자 사라가 여섯 번 비명을 지르고 죽었다는 유대의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 긴박한 순간에 민 목사는 마치 수강생들을 조금 더 깊은 물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스쿠버다이빙 코치처럼 청중들에게 또 다른 사건을 제시했다. 사사기 중에서 가장 애잔한 이야기인 입다와 그의 딸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삿 11:31) 그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기 앉아 계신 자매 여러분! 이것을 용납하실 수 있습니까? 딸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남편을 용납할 아내가 있습니까? 딸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아버지를 용납할 딸이 있습니까?”(153)
이삭의 번제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청중들의 긴장은 이제 입다의 딸 이야기로 인해서 훨씬 강화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을 만나던 이 두 이야기가 이제 민 목사의 설교 안에서 하나로 결합해서 전혀 새로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게 바로 설교자의 창조성이다. 일상의 언어들이 시인을 통해서 보석 같은 언어로 빛나듯이 평면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던 성서이야기가 한 설교자에 의해서 입체적인 차원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민 목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이야기를 이렇게 비교했다.

더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성서에 나오는 이삭과 입다의 딸 이야기에서 아들과 딸이 다 같이 아버지의 믿음의 폭력 앞에서 위협을 당하면서도 아들은 끝내 죽음을 면하고 딸은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위기에서 아들은 살아나고 딸은 죽습니다.(153)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살아났다는 사실과 입다의 딸이 결국 번제로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민 목사의 설교 안에서 적나라하게 비교됨으로써 입다의 딸이 당한 처절한 숙명은 훨씬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민 목사는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하고 나선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를 예로 들면서, 딸에게 내린 저주를 대신 받겠다고 말하지 않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믿음 좋은 남자인 입다의 태도를 지적한다.  
청중들이 기존에 갖고 있는 성서본문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몇 번에 걸쳐서 무너졌다. 이런 상황 앞에서 청중들은 앞으로 설교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청중들이 성서의 세계와 심층에서 만날 때 일어나는 영적인 긴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말이다. 설교와 글쓰기에서 이런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우리의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묻어두고, 그의 설교를 따라가는 일에 집중하자.
이삭과 입다의 딸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비교한 민 목사는 청중들을 다시 한 번 더 깊은 데로 끌어들인다. 이런 참혹한 일에 연루된 하나님은 누군가, 하고 묻는다.

우리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하느님의 이 횡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 사례들 앞에서 중립을 지킬 만큼 우리의 감정이 무디질 못합니다. 재미있게 듣기만 하고 넘길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 아들들과 딸들을 괴롭힙니다. 악마나 사탄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말이 되지만 하느님과의 체험에 이런 어둡고 파괴적인 국면이 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153)

평자는 가끔 설교자를 관광 가이드와 비교해서 생각할 때가 있다. 크게 보면 두 종류의 가이드가 있다. 하나는 주어진 정보만 나열하는 가이드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서 소화된 내용을 해석하는 가이드이다. 전자는 글자 그대로 풍월을 읊을 뿐이지만, 후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었을 때 평자는 한 사람에 의해서 과거의 문화유산이 새롭게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설교자도 역시 2천 년 전의 문화유산인 성서를 살려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 목사는 성서 이야기의 영적 차원을 한 단계씩 열어감으로써 거기에 혼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런 작업이 이 설교에서 어디까지 나가고 있을까?

하느님과의 대결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삭과 입다의 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아버지들의 믿음을, 또는 그런 믿음만을 대단한 것으로 치켜세우지만 민 목사는 그것 너머에서, 또는 그것과 반대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게 시선을 돌린다. 우리는 하나님을 당연하게 그렇게 존재하고 그렇게 활동하는 분으로 전제하지만 민 목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해 “왜?”라고 시비를 건다는 말이다. 옳다.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성서텍스트와 연관된 하나님을 향한 “왜?”가 없이는 성서 텍스트는 결코 열리지도 않고 깊어지지도 않는 다. 한 저술가에 의해서 남북한의 문화유산들이 애니메이션(animation)을 얻듯이 설교자에 의해서 성서 텍스트도 역시 생기를 얻을 수 있는데, 평자가 보기에 민 목사는 그런 작업을 정교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성서 전승에 참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더불어, 흡사 늪에 빠져들듯이 하나님과의 대결이라는 영적인 위기 한가운데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늘 대결해 온 흔적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과의 대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 대 한 하느님의 대결이기도 하고, 한 개인 대 한 하느님의 대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바로 이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과의 대결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응답했느냐 하는 과정에서 결정되었습니다.(154, 마지막 문장은 문맥에 따라 고쳐 적었음, 평주)

하나님과의 대결이라니,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인내심을 갖고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시라. 민 목사에 의하면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밝은 부분만이 아니라 어두운 부분으로도 경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을 외면하고 귀를 막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절망했다.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하나님이 구약성서에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미 형성된, 또는 교회의 실용적 필요에 따라서 요구된 하나님 상으로 모든 성서텍스트를 재단하고 있는데 반해서 민 목사는 구약신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청중들을 구약성서의 근원적 깊이로 끌어들이고 있다. 평자는 민 목사의 이런 신학적 착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버리시는” 하나님을 예수의 십자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닌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그렇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어둠에 대한 경험 없이 어떻게 밝음을 경험할 수 있으며, 죽음 없이 어떻게 삶이, 절망 없이 어떻게 희망이 가능하겠는가? 숨으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 경험 없이 어떻게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이런 하나님은 곧 우리에게 신비이다.

여러분, 믿음의 생활을 할수록 하느님의 신비가 벗겨집니까? 아니면 더욱 깊어집니까? 하느님과 사귀실수록 하느님께서 자신을 깡그리 드러내십니까? 아니면 점점 더 숨기십니까? 우리의 경험은 후자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대결입니다.(155)

어떤 점에서 보면, 일반적인 설교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민 목사의 설교를 알아듣기 힘들지 모르겠다. 그들은 단지 축복과 만사형통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확신, 그리고 긍정의 힘과 실증의 힘으로 무장한 그들은 응답하지 않으시는, 그래서 사람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깊이를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평자가 보기에 민 목사의 이런 신학은 아래에 인용한 매튜 폭스의 “비아 네가티바”(VIA NEGATIVA, 부정의 길)와 비슷하다.

긍정의(cataphatic) 하느님(빛으로 그려지는 비아 포지티바의 하느님)과 부정의(apophatic) 하느님(어둠의 하느님)은 결국 같은 하느님이다. 그리고 우리의 깊은 곳에서 빛과 어둠, 충만과 공허를 체험하게 되는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깊이 변증법적이고, “둘-다/ 그리고”의 모습을 띤다.(원복-창조영성 길라잡이, 분도출판사 139)

오해는 마시라. 평자는 민 목사의 설교가 난해하기 때문에 청중들이 알아듣기 힘들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의 설교는 명백하고 리얼하다. 다만 기존의 설교들이 지나치게 믿음 일원론에 고착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대결”이라는 그런 언급이 청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과 대결하는가? 이 설교의 전체 줄거리를 다시 한 번 더 정리하자. 민 목사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아브라함과 외동딸을 번제로 드린 입다 이야기에서 인간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시는 하나님을 청중들에게 제시했다. 이삭은 살아났고, 입다의 딸은 죽었다. 결과적으로 세 명의 남성은 모두 살아났고, 한 명의 여성만 죽은 셈이다. 민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와, 입다와 그의 딸 이야기는 하느님과 대결하는 남성들의 처지보다 더 가혹한 여성의 희생이 바로 남성들의 만용이나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입다가 “믿음이나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의 외동딸들을 희생시키지 못하도록 방해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을 살려내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과 대결하는 신앙이다.
이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민 목사는 렘브란트가 오늘 설교의 본문인 창 22:1-14절을 주제로 1636년부터 1655년에 이르는 시기에 그린 네 편의 그림을 해설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의 한 제단에 아들을 올려놓고 칼로 찌르는 장면이다. 약간 길지만 민 목사의 설교와 그의 신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기에,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같은 해에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감격스럽습니다. 사랑과 순종과 말림과, 죽임을 극복하는 살림으로 가득 찬 그림입니다. 아까 유화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 치던 이삭이 여기에서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순종하는 자세로 아버지 품에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역시 아들 이삭을 강제로 우락부락하게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그 무서운 칼을 보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감싸고 아들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천사 역시 유화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아브라함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를 꼭 껴안습니다. 왼손으로는 아브라함이 칼을 쥔 왼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아브라함의 오른 손목을 잡고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말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도 살고 아버지도 살아납니다. 이런 방해, 이런 말림 속에 감격이 있고, 죽임이 아닌 살림이 있습니다.(157)

그렇다. 민 목사의 설교는 죽임의 폭력을 “말림”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데 초점이 있다. 즉 “죽임이 아닌 살림”이 바로 설교의 중심축이다. 물론 다른 이들의 모든 설교도 역시 살림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늘의 설교가 얼마나 심각하게 폭력적인지, 얼마나 가부장적인지, 얼마나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적인지, 얼마나 대립적이고 충동적인지, 얼마나 물신적이고 분파적인지는 평자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이런 것들은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겠는가.
우연하게 손에 들어온 민 목사의 설교를 도서관 책장에 기댄 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든 평자는 집에 돌아와서 전체 설교를 꼼꼼하게 메모를 해가며 천천히 숙독했으며, 며칠 후 <기독교사상> 편집부를 통해서 손에 넣은 민 목사의 설교 100편 가량을 약간 빠른 속도로 읽었다. 설교집에 실려 있는 25편의 설교는 “새길교회”에서 월 1회 1988년-1990년에 행한 것이고, 뒤의 것들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와 모임에서 행한 것이다. 새길교회의 설교는 그 교회가 주로 지식인 중심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학적인 성격이 비교적 강하게 보였지만 설교 방식과 내용에서는 다른 설교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평자는 설교집에 실린 설교를 중심으로 하고 나머지는 참고하는 방식으로 그의 설교가 지향하고 있는 “생명살림”의 영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할 생각이다.

말씀의 숨
이미 앞의 설명에서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암시되었으리라 보는데, 평자가 민 목사의 설교에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성서 이야기와 설교자가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는 성서텍스트와 따로 놀지 않고, 그야말로 동네마당에 모여든 아이들이 놀이에 심취하듯이 성서텍스트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청중들은 그의 설교를 저절로 따라가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성서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걸 경험하게 된다. 이는 곧 그가 말씀으로 하여금 숨을 쉬게 한다는 뜻이다. 특히 자신의 실존과 신앙을 부정함으로써 말씀의 영적 깊이를 살려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말씀에 몰입하는 설교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개 자신의 신앙을 앞세우지만 민 목사는 거꾸로다. 그의 설교에서 설교자는 죽고 말씀은 살아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겠다. 1989년 성탄절에 행한 설교 “죄벌을 곱절이나 받은 사람들을 찾아오신 하느님”(사 40:1-8)에서 민 목사는 성탄의 기쁜 소식 앞에서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다.

성탄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자는 따로 있다는 생각, 오시는 하느님을 위해 무엇인가 준비하고 해드리고 싶은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은 거들떠보시지도 않으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159)

이런 소외감의 이유를 그는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자신이 “하느님의 관심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만큼 딱한 처지가 아니라고 한다. 둘째는 성탄의 주님이 우리가 준비한 모든 좋은 조건을 외면하신다는 사실이다. 성탄의 주님은 사람이 만든 멋진 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길 없는 광야에 새 길을 닦고“ 오신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할 일이 없다는 상황을 간파한 민 목사는 하느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해한다.
평자는 민 목사의 이런 고백이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적으로 매우 진지하고 정확하다고 본다. 그의 불안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설교자가, 동시에 자신이 그런 위로가 필요 없는 삶의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훤하게 내다보고 있는 설교자가 감당해야 할 영적 소외의 진솔한 고백이다. 평자가 보기에 이런 신학적이고 영적인 태도를 취할 때 성서텍스트는 살아난다. 그것은 곧 성서의 숨이고, 설교의 숨이다. 여기서 성서의 깊이가 살아나고, 따라서 설교도 역시 살아난다. 이것을 단순히 설교자가 겸손해야 한다는 말로 알아듣지 말기를 바란다. 이건 인격과 교양이 아니라 신학적 영성의 문제이다.
한편의 설교를 더 인용해야겠다. 설교집의 표제로 인용된 “하느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은 에스겔 33:10-20절을 본문으로 한다. 이 설교에서 민 목사는 자신이 이 성서텍스트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언급했는데, 그중의 한 언급이 아래와 같다.  

저를 사로잡고 있는 이 본문에서 놓여나고 싶은 까닭은, 저 자신이 하느님께도 용납 받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항의하는 그 사람들에게도 용납 받지 못하는 한심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소외감 때문입니다.(174)

민 목사가 선택한 성서본문은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판단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행동에 따른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과거에 아무리 오랫동안 큰 잘못을 행했어도 오늘 돌이켜 바르게 행동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것이며, 과거에 아무리 오랫동안 의롭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오늘 잘못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 앞에서 이전에 죄인이었던 사람들은 환호를 올릴 것이며, 이전에 의로웠던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민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양자에게는 모두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죄인이었던 사람들은 이 말씀에 따라서 바른 길로 돌아설 것이며, 불평하던 사람들도 역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구원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민 목사는 이 둘 가운데 어디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만큼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그릇된 길에서 선뜻 돌아서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선 제 자신이 바로 이 셋째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중략> 이제 여러분께서는 제가 왜 이 말씀을 피하려 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아무런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179)

성서는 말하지 않지만 민 목사의 눈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보였다. 셰익스피어가 아버지의 유령을 불러내어 햄릿이 당면한 절박한 상황을 리얼하게 묘사하듯이 민 목사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불러냄으로써 성서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훨씬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성서의 행간을 통해서 숨어 있는 영적인 리얼리티를 청중들 앞에서 제시한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니 이런 방식으로만 성서텍스트는 숨을 쉬는 게 아닐는지.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말씀의 숨을 살려내는 게 아닌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평자가 보기에 많은 수의 설교자들은 성서의 숨을 살려내기보다는 오히려 죽인다. 설교자와 청중들 사이의 종교적인 재미만 확대 재생하고 있을 뿐이지 말씀의 깊이가 살아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서이야기는 이미 고착된 종교적인 정보, 율법, 교범으로 전락한다. 아무리 드라마틱하게 성서 이야기를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각본이 단지 말재주로, 또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뿐이지 성서말씀이 은폐의 방식으로 담지하고 있는 새로운 영적인 경지가 열리지 않는다. 결국 성서의 숨이 막힌다. 성서의 숨이 막히면 청중들의 숨도 막힌다. 오늘의 청중들은 무엇이 근본 문제인줄 모른 채 마치 폐암 말기환자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극적인 설교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바닷물을 마신 사람은 목이 더 타는 법이다.  
우리는 어떻게 말씀의 숨을 틀 수 있을까? 이건 오늘 평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니며, 더구나 이런 건 몇 가지 방법론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다만 지나가는 길에 한 마디 한다면,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국어사전을 몽땅 외우는 방식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깊이로 들어가야 하듯이, 즉 현실의 삶에서 영혼의 삶을 읽어낼 수 있는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야 하듯이 말씀의 숨을 살려내는 능력은 생명의 영인 성령과의 소통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 말은 설교자에게 어떤 밀의(密儀)적 훈련이나 또는 성령운동 류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초월적 신비주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성령이 어떻게 살림의 영인지 신학과 삶의 깊이에서 헤아리면서, 성서텍스트와의 대화를 구도정진의 자세로 이끌어온 사람에게 시나브로 열리는 영적인 세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지 모든 생명체에 숨이 필수적이듯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설교에서도 역시 말씀의 숨은 가장 근원적인 작업이다.

말씀의 결
설교행위에서 말씀의 숨만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니 숨과 더불어서 그것의 ‘결’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말씀의 숨과 말씀의 결은 무엇을 말하는가? 숨은 생명의 원초적 기운이라고 한다면, 결은 그것이 엮어내는 흐름들을 말한다. 설교의 숨은 설교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면 설교의 결은 그 생명의 힘에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숨만으로는 역동성을 찾기 힘들며, 거꾸로 결만으로는 영성을 찾기 힘들다. 결이 없으면 변혁의 힘이 부족하고, 숨이 없으면 존재의 힘이 부족하다. 숨은 살림이며, 결은 살림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숨은 말씀해석의 방식이고, 결은 말씀해석의 내용이다. 그렇다고 해서 숨과 결이 늘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숨이 결처럼 보이고, 결이 숨으로 나타난다. 숨이 결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며, 결들은 숨을 쉰다.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평자가 보기에 민 목사의 설교에는 숨만 아니라 결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서 우리는 흡사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을 옆에서 들을 수 있듯이 생명살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민 목사의 설교에서 가장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결’은 역사 진보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와 사회를 현실유지(status quo)가 아니라 변혁, 개혁, 극복, 화해의 틀에서 접근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성은 단순히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는 계몽주의 진보사관이 아니라 성서에 근거한 종말론적 구원사관이다. 그는 사회학자가 아니라 신학자이다. 역사와 사회를 숨 쉬게 하는 그의 성서해석이 일정한 결을 이루어 그 역사와 사회를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지평으로 진보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특히 소외층, 가난한 사람, 여성, 약소국가를 향한, 그리고 그들로부터의 구원은 그의 설교에 매우 독특한 결을 이루고 있다. 그가 1989년 6월25일에 행한 설교 “아직도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사 40:1-5, 53:1-9)에서 우리 한민족의 운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민 목사는 미국과 옛 소련이 사죄를 구하는 팩스를 서울과 평양에 보낼지 모른다는 야무진 꿈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앓아야 할 병을 한민족이 대신 앓아 주었고, 그들이 받을 고통을 대신 겪어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민족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의 주장은 한 민족주의자의 공상에 불과한가, 아니면 예언자적 상상력인가? 아직은 그 때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한기총을 비롯한 막강한 힘을 가진 교회들이 미국의 패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있으며, 여기에 힘입어 미국의 매파 고급 관료들도 툭하면 6.25 전쟁에서 자신들이 엄청나게 많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나발을 불고 있는 실정이다. 6.25 당시에 미군의 희생이 컸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누가 그 고마움을 모르랴. 그러나 요즘의 이라크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피를 흘렸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행위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서 한민족의 입장에서 그들과 무조건 같은 관점으로 역사를 판단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민 목사는 6.25를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6.25는 그야말로 흠 없고 순결한 양들이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일본 그리고 세계 다른 민족들을 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로 사라진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아직도 속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강들 가운데 아직도 어느 한 나라도 우리를 보고 ‘그대들은 실상 우리가 앓아야 할 병을 대신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 겪어 주었다’고 말한 일이 없습니다.(130)

한민족의 현대사에 점철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식민과 분단의 고난을 이사야서에 근거해서 속죄의 십자가라고 보는 민 목사의 해석은 매우 과격하다. 원래 좌고우면 하지 않고 신탁(神託)에만 의존하는 예언자들의 언술은 과격하게 들리는 법이다. 좁게는 동북아의 역사에서, 넓게는 세계의 역사에서 속죄의 고난과 고통을 안고 있는 한민족을 위해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분단체제에 안주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오늘 얼마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기울어져 있으며, 그리고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목회에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를 감안한다면 17년 전에 행한 민 목사의 설교는 예언자의 절규다.  

이와 같은 분단을 그대로 긍정하고 사는 한 우리들은 원수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우리 복음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또한 분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핵무기를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군대의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외세의 힘에 의존해야만 됩니다. 외국 군대의 주둔을 우리는 구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를 믿지 말고 군마를 믿지 말고 전차를 믿지 말라는, 그러한 군사력 의존에 대해서 경고하는 시편 시인들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입니다.(133)

평자는 당시 지천명을 목전에 둔 민 목사의 이런 진술이 1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당신에게 여전히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다. 세월의 무게로 인해 당신의 생각을 수정했을 개연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학과 성서해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 구상을 포기하거나 변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8년에 행한 설교에서 그는 이런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한반도의 남북 분단은 민족의 동의가 없이 미국과 구소련 등 열강들의 군사적 이해관계에서 일방적으로 강행된 분단이었습니다. 남과 북을 두 동강 낸 장본인들인 미국과 구소련을 대표하는 러시아가 이미 화해를 이루었는데, 그들이 쪼개 놓은 남한과 북한은 오히려 이 지구 위에서 서로 가장 미워하는 원수가 되었으니 이러한 처지를 설명할 말을 잊습니다.(“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역학” 고전 13:1-13)

“때려잡자 공산당!” 하는 식의 선동적인 설교가, 그래서 옆에서 듣기에 민망한 설교가 여전히 기세등등한 오늘의 한국교회 강단에서 민 목사의 설교는 사설(邪說)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평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민족의 현대사를 기독론적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말씀을 육화(肉化)시켰다. 성육신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 아닌가? 독단과 관념, 장광설에 빠진 오늘의 설교자들은 민 목사의 설교에서 이런 말씀의 육화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의 결이 또렷이 살아나는 대목이다.

아, 광주!
설교의 결과 연관해서 이제 평자는 독자들의 시선을 광주문제로 돌리려고 한다. 1980년 5월에 벌어진 이 사건이 한국의 신학계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어졌는지, 또는 주류 설교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설교되었는지 과문한 평자는 잘 모르겠다. 여기 광주사건에 대한 민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의 신학적인 관점과 설교학적인 관점을 함께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988년 5월15일 설교 “광주에서 나올 진혼의 사제”(나 1:1-8)에서 민 목사는 예언자들의 신학을 통해서 이 문제를 조명해나갔다. 평자는 여기서 전체적인 내용을 세세하게 전달하지 않고 핵심적인 대목만을 정리하겠다. 그는 “야훼여, 살려 달라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합 1:2)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항의를 먼저 소개한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을 향한 항의이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합 2:4)는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민 목사가 설교 앞부분에서 광주의 울부짖는 소리를 상당히 자세하게 전달한 이유는 예언자의 역할이 바로 이런 울부짖음을 경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민 목사는 니느웨의 죄를 낱낱이 들추어내면서 조소와 저주를 퍼부은 나훔 예언자의 목소리를 전한다. 동일한 주제를 담고 있는 요나서는 나훔과 달리 니느웨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나훔의 예언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요나의 예언을 따라야 하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니느웨에 대해 맺힌 원한 때문에, 니느웨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에게까지 도전하고 항의하는 요나 같은 예언자는 광주에서도 줄곧 이어 나와야 합니다. 광주에서는 또한 나훔과 같은 예언자가 나와서 피의 호소를 대변해야 할 것입니다. 나훔과 같은 진혼의 사제가 나와서 피 위에 세워진 그 날의 니느웨가 망하도록 저주하는 일을 전담해야 할 것입니다.(35)

민 목사의 설교는 바로 여기에 방점이 찍혀있다. “피해자가 흘린 피와 그 피의 호소에 ‘끝까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가해자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옵소서.”(사 2:9)라는 기도와 “용서치 아니하리라.”(암 7:8)는 응답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곧 진혼의 사제들이 맡아야 할 몫이다. 민 목사가 피해자의 분노와 억울함을 부채질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는 당사자의 억울한 마음과 호소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인 양, 그리고 아주 너그러운 듯이 “용서니 화해니 하는”(36)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해는 어찌되는 걸까? 민 목사에 의하면 화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재를 뒤집어쓴 피해자들이 빛나는 관을 쓸 때, 상복을 입었던 피해자들이 그 옷을 벗고 몸에 기름 바를 날이 올 때(사 61:3), 그리고 가해자들이 용서를 빌 때(창 50:18),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을 향해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싶습니까?”(창50:19)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혼의 사제들은 이렇게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오늘 명분으로만 보면 광주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 사건은 국가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으며, 망월동은 국립묘지로 격상되었고, 희생된 분들에게는 일정한 경제적인 보상이 주어졌으며, 일부 가해자들에게 국회 공청회와 사법당국의 법적 제재가 가해졌고,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5.18 때마다 광주를 방문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문제가 정치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는 아직 없었다. 한국교회도, 특히 자칭 주류에 속한다고 하는 교회들도 이에 대한 뚜렷한 참회와 신앙고백을 내놓지 않은 형편이다. 나치 시대를 철저하게 통회하고 그렇게 실천한 독일교회나 독일정권과 달리 자신들을 합리화하기에 바쁜 일본을 비판하는 한국교회가 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적 진술을 명확하게 피력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결국 광주 시민들의 영혼은 아직도 위로받지 못한 것은 아닐는지. 더 나아가 한민족 전체가 아직도 위로받지 못한 것은 아닐는지. 누가 그들을 위한,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대속의 십자가에 달려있는 한민족 전체를 위한 진혼의 사제로 나설 수 있겠는가?

레퀴엠을 노래하자!
앞에서 평자는 세 편의 설교를 중심으로 설교의 숨과 결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가부장적 질서에서 수난당하는 이삭과 특히 입다의 딸, 수난의 종으로 살아가는 한민족, 그리고 광주를 위한 진혼의 사제가 바로 그것이다. 아마 독자들은 이 세 설교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신학적 토대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은 민 목사의 모든 설교를 지탱하고 있는 생명살림의 영성이다. 즉 개인, 또는 공동체와 민족이 당한 고통과 한을 풀어냄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것이 바로 민 목사의 설교가 지향하는 초점이다. 그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런 상황을 대면하도록 성서의 세계와 오늘의 삶을 매우 노골적으로, 그리고 매우 노련하게 까발리는 설교자이다.
평자는 민 목사의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 성서는 똑똑한 사람들, 경쟁력이 앞서는 사람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 누구에게나 칭찬받을만한 모범적인 사람들을 중심에 두거나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를 닦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성서는 파렴치한 사람들, 가부장적 질서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여성들, 그런 민족과 그런 공동체의 한을 푸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해는 마시라. 가난과 한의 미학을 예찬하는 게 아니다. 개인과 공동체와 민족이 감당해야하는 고난과 시련, 그리고 억울함으로 얼룩진 한을 위로하고, 풀어야만 생명살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많은 설교자들은 이런 문제를 매우 관념적이거나 초월적으로만 접근한다. 오늘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억울함을 호소할 데가 없어 한에 사무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드러내야만 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혁명을 통해서 원수를 갚자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성들에게 던져진 숙명을 들추어내고 공론화해야하며, 약소국가가 내지르는 외침을 경청해야하고, 허물어지는 생태계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문제를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설교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구원을 지향한다면 인간 삶의 통전적 실체인 영혼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 설교자들에게는 민 목사가 진혼의 사제가 나와야 한다고 호소했듯이 레크엠의 영성이 절실하다.
평자의 글쓰기가 서툰 탓인지, 지면은 끝나 가는데 아직도 민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이 남아있다. 한편의 문학작품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설교의 품위가 어떻게 확보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신학적인 토대와 인간에 대한 깊은 파토스와 연대감, 어린 시절의 신앙경험과 삶의 내면에 대한 통찰, 신학을 공부한 아내로부터 받는 설교 피드백, 그리고 상당한 경지에 올라선 글쓰기의 테크닉과 한편의 설교가 여러 번에 걸쳐 발전해나가는 과정, 또한 그의 설교관에 대해서도 독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특히 몇몇 설교는 조금 더 상세하게 분석하고 싶었다. 예컨대 이사야의 피의 제사(사 34:2-8)와 북한의 문학작품인 <피바다>를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원수 갚음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승화시킨 설교 “피바다”(81-94), 그리고 다말과 룻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여성 문제를 신학화한 “다말의 한풀이”(46-51, 그 이외에 성서학자의 전문성이 여지없이 발휘된 여러 편의 설교들이 그런 것들이다.
아쉽지만 평자의 글쓰기는 여기서 끝났다. 민 목사의 설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특히 젊은 설교자들과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설교에 마음을 열고 있는 평신도 독자들은 민 목사의 첫 설교집이며, 마지막(?) 설교집인 <하느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한번이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정독한다면 설교공부에, 그리고 생명살림의 영성심화에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1940년생이신 민 목사는 신학교 교수와 성서공회 일에 자신의 평생 삶을 던진 셈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게 나로서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민 목사가 전업 설교자로 활동했더라면, 그것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훨씬 바람직하지 않았을는지. 교수와 성서번역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말씀의 숨과 말씀의 결을 살려내는 고품격의 바른 설교는 그렇지 않기에, 또한 오늘 그런 원로들을 만나 뵙기가 쉽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모처럼 내 영혼의 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설교를 대하고 나니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배부르다. “건강하십시오.” (기독교사상,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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