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강의 계획과 1학기 강의일정)

다비아 인터넷 강의-화면이 커서 보기가 나은 것 같습니다. 6개월은 오케바디쪽으로 가고 만약에 인터넷 방송쪽으로 열리게 되면 후반부. 인터넷 송출하고 그걸 또 보관해야 하고. 보관하는 서버가 필요한데 그게 비용이 나가는 것 같습니다. 2기가를 받아내서 다 차면 더이상 안들어갑니다. 얼마나 더 크게 장만해야 하느냐? 방송하고 말면 그렇게 큰 서버는 없어도 되는 것 같더라구요. 박원관 조교가 이모저모로 알아보고 있구요. 금년 일단락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강의 계획이 1-6월까지 입니다. 나중에 공지하겠습니다만 5월말까지만 하고 6월에는 3주 정도 멀리 나가 있다 오게됩니다. 얼마전에 연락이 와서 거의 결정단계에 와 있습니다. 7월에 오케바디에는 7월말까지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계획했던 것이 6월에 결강하게 되지만 빼먹지 않고 7월에 보강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미국 LA, 남미 몇 군데 특강 그런 것 때문에 갔다 올 예정입니다. 


쪽지로 질문 주신 것이 있었지요. 시간이 되면 대답하겠다고 했는데 어렴풋이 생각이나요. 쪽지가 많아서 지나가면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한시간 전 쪽지 잠간 좀 보겠습니다. “딩동댕. 쪽지 왔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질문: 전에는 십자가 보혈 속죄 대속 구원이 기도문에 자주 등장했는데 지금은 잘 보이지 않네요. 소위 복음주의 신앙의 기초가 위의 주제들에 대한 깊은 관심인데 좀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다비아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지고 있구요. 이런 주제들에 대해 매일의 삶에서 어떤 묵상이 이루어져야 할까요. 우리의 삶에서 이런 것들이 어떤 자리매김 되어야 될까요? 


답: 신학적이기 보다 신앙적인 질문같은데요. 단어를 좀 쓰겠습니다. ‘십자가 보혈 속죄 대속 구원’ 잘 알겠습니다. 네. 제가 오케바디 대화창을 최소화 시켜놓고 다비아 인터넷 사이트를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래도 제 목소리 들렸나요? 제가 읽은 것을 통해서 김태영선생의 질문요지를 이해하셨을 겁니다. 복음주의 신앙노선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십자가 대속 보혈 구원 이런 것들이 다비아에서 조금 약화된 것이 아니냐? 그런 것들을 어떻게 일상 영성에서 다이나믹하게 끌어갈 수 있느냐? 살아갈 수 있느냐? 몇 가지 단어를 주셨는데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십자가 대속 보혈 속죄 구원 만약에 김태영 선생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다비아에서는 이러한 아주 원초적인 신앙의 내용들 이런 것을 좀 소홀하게 다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셨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진짜 그랬을까요? 아니면 사실은 다비아에서는 그대로 담고 있는데 해석의 차이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을까요? 그게 인제 참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십자가 대속 구원 그것 말고도 핵심 용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창조 종말 하나님나라 복음 이런 것들의 다 그렇거든요. 


주로 십자가 속죄 대속 구원 요거는 인제 주로 기독론이죠. 사실은 뭐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들이 기독론 크리스톨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렇지 않거든요. 신론 문제만 하더라도 삼위일체만 하더라도 아들의 하나님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강조해도 신앙을 편식하게 됩니다. 


복음주의신앙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하기는 조금 곤란합니다. 청교도 신앙이라고 봐야 될 거에요. 우리나라에서 쓰는 복음주의냐 에큐메니칼이냐 하는 그거요. 서로 그렇다고 하는 어렴풋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용어가 틀린 것인 아닌데 엄격하게 이야기한다면 바른 것은 압니다. 


복음주의라고 하는 말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개신교는 다 복음주의 입니다. 복음주의 아닌 것 없어요. 말 자체도요 에반젤리칼. 요 용어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 독일어로 말씀 드린다면 에방겔리쉬. 원래 개신교가 루터부터 나왔으니까요. Evengalisch 독일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반대되는 것은 카톨리쉬 Katolisch. 


독일에서는 대학에서도 신학부가 다 두 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복음주의라고 하는 것은 보수적이고 사회문제보다는 개인구원을 강조한다기 보다 가톨릭과 대별할때 쓰는 용어입니다. 복음주의라고 하는 것은 복음주의라고 하기보다도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에방갈레쉬라고 합니다. 기초적이니 아시리라고 믿고요. 


래도 우리나라에서는 복음주의는 개인 영성, 구원에 대한 집중을 한다는 점에서 이미 그 용어들이 정착했으니 그렇게 쓴다고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한쪽은 복음주의적이고 에큐메니칼 WCC, KNCC죠.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는 주로 청교도 신앙쪽에 로이드 존스라든지 존 스토트 쪽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일겁니다. 어쨌든 용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그러한 청교도 중심 신앙들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 것이거든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다 맥락이 있습니다. 제가 침례교 문제를 다룰 때 한번 했기 때문에 더 이야기하지 않고요. 어쨌든 청교도 신앙들이 개인의 내면적인 영성을 확고하게 붙잡고 또 하나 도덕성 윤리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역동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제가 로이드 존스 설교를 보았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세상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원론적인, 선악에 대한 대립. 악을 대단히 실증적, 존재론적으로 접근 하더라구요. 그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준비한 강의와도 연관되겠군요. 


악의 문제가 지나치게 대립적이어서 자칫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은총의 영성보다 죄와 악의 실체가 더 강하게 전달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게 뭐가 잘못이냐. 인간이 당연히 죄를 짓고 잘못했고 죄가 지배하고 있지 않느냐? 현상적으로 옳습니다. 악마가 있어서-설교의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성서에 많이 나오고 천사도 나오고 악마도 나오죠. 악마 사탄을 성서기자들이 언급했다는 것은 악의 존재근원을 염두에 뒀다는 것을 이야기하거든요. 


기독교와 성서는 악의 문제를 그렇게 나이브하게 다루지 않고 래디칼하게 다룹니다. 그러니까 조금 우리가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처리할 수 없는 근원적인 존재론적인 힘으로 이해 합니다. 그런 면에서 청교도쪽에서 죄와 대속 강조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어떤 교리 가르침이든지 독립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기독교 조직틀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악마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적인 관점에서 보면 악마는 이미 패배한 존재에요. 악마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악마의 역할도 여전히 하나님의 한계 안에 있는 거에요. 악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거기서 인제 우리가 두려워하게 되는 거죠. 물론 악에 대해서 조심하고 죄, 폭력 인간을 파괴하고 생태를 파괴하는 폭력 인간의 죄 존재론적 힘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이것이 더 우월하다고 하는 사실 그것을 놓치면 안되거든요. 


기독교, 성서에서는 이원론인 선과 악이 대립을 하고 있는데요 대립적인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신 분이거든요.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라든지 주위에 많은 것이 있지만 조금 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로 악의 존재는 거꾸러진 거거든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전히 악이 준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악의 문제, 신정론과 연관되는데 지금 제가 세부적으로 말씀 드릴 수 없고 많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요. 


다만 제가 이 청교도 신앙문제가 나와서 이게 우리가 복음주의적 신앙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매도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을 왜국 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편식은 왜곡시키는 것이거든요. 그들은 한 부분을 강조한 거에요. 왜 강조했는가 하면요. 그 이전 시대에 유럽교회가 정통주의라고 하는 교회 말이죠. 17세기 교회가 굉장히 종교 개혁 신앙을 이론화한 신학이거든요. 종교개혁이 다시 가톨릭과 같은 체계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까 벌어지는 문제점들을 집기 위해서 개인의 문제들 쪽으로 많이 들어가게 된 거죠. 부흥운동, 각성운동, 회개운동, 도덕 재무장 운동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이거든요. 


전체와 더불어서 같이 균형을 맞추어야 되는데 청교도 신앙에서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 등등에서는 일부분만이, 조금 더 직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침소봉대식으로 강조되어서 전체적인 신앙의 건강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주로 한국의 큰 교회들이 그런 쪽으로 나가고요. 물론 오순절 교회 순복음 교회 또 다른 방향입니다만 거기에는 뭐 조금 더 다른... 


어쨌든 한국교회 중심을 이루는 소위 복음주의라고 하는 쪽에서의 신앙의 핵심들이 김태영선생이 말한 십자가 보혈 대속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비아도 사실 그거 이야기하거든요. 지난 대림절부터 지금까지 그 문제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에요. 하나님의 오심이라든지 거의 그렇습니다. 보혈이라고 하는 그러한 노골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혈의 문제, 예수의 돌아가심이니까요. 그런 것들을 저는 계속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만을 떼어서 그것만을 침소봉대해서 그것만이 다인 것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창조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면서 해석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들어오던 그러한 복음주의적 성서공부와 설교와는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Fundamental Theology이라고 하는데요. 근본주의 신학이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근본주의 신학이 아니라 근본신학입니다. 독일어도 똑같이 씁니다. 신학의 토대, 기초신학이라고 번역해야 됩니다. 


근본신학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근본이라고 하는 말이 다른 뜻으로 쓰여지니까. 굉장히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몰역사적인 그러한 특정한 이슈에 사로잡힌 신학을 말하지요. 그러나 영어나 독어는 그러한 뜻이 아니라 기초신학을 이야기합니다. 신학대학교수 대가들이 그것을 주로 가르칩니다. 기초가 되는 부분들을요. 거기에 충실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기초되는 것이 십자가, 창조, 부활, 성만찬, 구원 다 그런 거죠. 그런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이 말하는 관점하고 제가 말하는 관점이 크게 틀린 것이 아니죠. 


(질문이 나옴) 고 문제.. 오늘 제가 말씀드릴 것과 연관되니까 하면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목요일 밤에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칭의론의 문제였거든요. 칭의론과 구원론이 어떻게 되냐? 연관되냐? 주로 이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김태영선생님 질문한 것도 다 연관되는 것입니다. 구원론, 칭의론 Fundamental theology 이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겁니다. 


질문 올려달라고 해서 질문이 올라왔네요. 문제는 다루지 않을 리는 없구요. 기초신학입니다. 두 가지였어요. 이미 전달이 되었겠지요.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 한 부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다다. 대속을 이야기하더라도 창조적, 하나님 나라의 관점 종말관점이 다 두루 소통되어야 한다. 고 대속의 문제만 딱 끊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체 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둘째는 해석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도 이야기 했듯이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구원론적이니까요? 


기억하시겠지요. 구원, 소테르 문제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에 관계된 거든요. 모든 인간의 행위는 기본적으로는 구원론적이다. 그게 사이비 구원론이냐 참된 구원론이냐 차이가 있는 것이지 기본적으로는 다 어디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들이거든요. 그렇게 우리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구원의 지평들을 인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펼쳐나가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는 거죠. 


지난 목요일 저녁에는 구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질문하신 분 오늘 오셨나 모르겠습니다. 질문하신 것. 제가 다루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칼빈의 이중예정과 연관에서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와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것이죠. 정확한 질문입니다. 칼빈의 이중예정,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만세전 부터 구원받을 자와 영벌에 처할 자와 영생을 받을 자 이중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이중 예정이 기독교 강요에서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읽어보고 준비해오지는 않았는데 옛날의 읽은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셔야 될 것입니다. 그게 이중예정이라고 하는 것이 기계적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독선적인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신학자 루터, 칼빈 그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던 잣대로만 그 말들을 이해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면 오해되는 부분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는 이중예정이라는 것은 기계적으로 됐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큰 섭리의 틀에서 보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냐는 신앙고백입니다. 


또 이중예정에는 또 하나 관점이 필요한데 그것을 이해하기 무슨 용어라고 이야기하던데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책을 잠깐 보면 나올 것 같습니다. (책을 찾으심) 지난 목요일 소개해드리다가 못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책제목) 알미니안 주의와 칼빈주의의 논쟁이 심각 했는데요. 칼빈주의의 5대교리 성립에 대해서 15쪽에서부터 자세히 설명되어 있네요. 그 중에서 한군데만 볼까 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조금 자유주의적이고 인간의 의지 강조 하구요 인간이 부패해도 전적인 것이 아니고 부분적이고 인간이 가능성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진다. "


감리교 쪽에서 요한 웨슬레도 그러한 부분들이 신앙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보이고요. 거기에 비해 칼빈은 전적인 타락, 인간은 가능성이 없다 하나님이 무조건 선택했다 이렇게 나가고요. 성도의 견인이군요. 제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요. 이중예정론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고요. 그러니까 성도를 하나님께서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그 부분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택정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자는 모두 영원토록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여 끝까지 인내한다.” 


이중예정도 그것만 딱 떼어내지 말고 견인설하고 연관하여 본다면 신자들의 신앙적인 태도에 상당히 큰 도움이 되는, 도움이 된다고 보다도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에 조금 비틀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견인해가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군요. 이러한 칼빈의 이중예정하고요 제가 가끔 쓰고 있는 배타적 행위라고 하는 것이 그런 면에서는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중예정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그런 용어를 썼거든요. 그런데 질문하신 분이 질문 요지속에 들어있어서 질문하신 분이 나보다 더 생각을 깊이하시는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타적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칼빈의 이중예정을 연관해서 그분이 생각하셨다는 군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요. 그렇게 놓고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배타적 행위라고 쓴 것은 구원이라고 하는 사실 자체를 우리의 인식론적 틀 안에 담아내기가 불가능하다. 그 상태를 그러한 용어로 표현한 거죠. 구원이 뭐냐.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게 뭐 얼마나 적절한 표현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칭의론과 구원이 어떻게 연관되느냐. 목요일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계속 이 주제를 생각하고 계심, 그러는 찰나 아래 질문이 게시판에 뜸) 


질문: 이중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앞에서 설명해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완전한 형벌로 예정되었고,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 예정되었다. 이중으로 되었다. 이겁니다. 구원받을 사람과 형벌 받을 사람으로 예정되었다. 그러한 개념들을 조금 아전인수로 쓰게 되면 우리만 구원받는다 이런 쪽으로 되고요. 우리가 더 크게 넓게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열려 있다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학자, 영성의 대가들의 말을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정보 안에서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죠. 칼빈이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더 심각하게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낱말 뜻으로만 우리는 늘 신학적 개념들을 낱말 뜻으로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중예정이라고 하는 것이 자칫하면 배타적으로 아전인수로 자기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쪽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나 조금 더 다이나믹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볼 때 저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없을것 같애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선택안에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죠. 


(다시 원위치) 의로움의 문제와 구원. 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의라고 하는 것은 의와 반대되는 것은 불의? 불의보다도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죄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거든요. 죄로 인해서 죽음이 들어왔다 바울이 여러 번 이야기 했고요. 왜 죄를 짓는가? 그것에 대해서 오늘 제가 설교한 내용에도 나옵니다만 악마가 장본인으로 등장하게 되거든요. 죄의 장본인이 악마라고 하거든요. 죄가 어디서 왔는가? 악마, 사탄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러한 용어들이 쓰기는 조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꾸 실체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서시대 사람들이 이런 방식이 아니면 어떤 실체, 사태를 해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인간 삶에 죄로 인한 많은 불행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우리 삶에 언젠가 말씀 드렸었는데요. 기독교인의 삶이 연역적이기보다 귀납적입니다. 오늘의 삶에 벌어지는 일들을 해명하기 위한 대답들이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인간 삶을 파괴하고 있는 죄, 도대체 왜 그러냐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인간을 귀하게 창조하고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해명할 길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선하고 능력 있는 분이라고 하는 것이 엄연한 명실상부한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분께서 만드신 세상이 악과 죄 이런 것이 만연하냐? 형제 살해가 있고요.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이니까요? 이렇게 파렴치한 변명을 하고요. 이런 것들이 고대뿐만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요. 인간의 문명이 이렇게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계속되느냐?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잖아요.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데요. 대답이 어디 있을까요? 다른 어떤 근원이 있어야 되거든요. 악마, 사탄, 아담과 이브를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 뱀 종교적 상징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석학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중간을 다 생략한 채 하는 것이라 조심스럽기도 하기요. 결국 해석의 문제거든요. Hermetics 입장이 되겠습니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명인 신학 문서들, 어쨌든 다 텍스트거든요. 문제는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게 문제인 것이죠.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가 괴테 파우스트를 읽을 때 그냥 사실로 읽지 않고 괴테가 말하려고 했던 어떤 것을 찾아 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요. 텍스트는 해석이 언제나 관건입니다. 


조금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독일신학은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해석보다 적용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흐름자체가 그렇습니다. 독일은 조금 본질적 존재론이기 때문에 성서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세미나 운동 미국에서 가능한 것이죠. 독일은 거기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서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요. 예수 퍼즐, 예수는 신화다. 다른 문서, 교회밖에 있는 것들을 종합해서 가설들을 만들어 내는 데요. 


그러나 독일쪽에서는 옳으나 그르냐는 두번째 제이고요 독일 쪽에서는 전통 안에 있는 텍스트, 교회 안에 보존된 그런 문서들을 해석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아담의 타락들 문서 해석을 해 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기독교가 이 악마 혹은 사탄, 원죄, 이런 개념이나 이런 교리나 상징이나 개념들을 말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인간 삶에 내재해 있는 죄를 심각한 어떤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죄 문제가 죄로 인해서 죽음이 왔다고 까지 볼 정도였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죄를 극복하는 것이 이게 구원이라고 할 수 있죠. 


죄와 반대되는 것은 의니까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바로 구원받는 것과 똑 같습니다. 의로워지는 것이죠. 칭의론이라고 하는 것 마틴 루터의 세가지 신학적 슬로건에 따르면 솔라피데 솔라 그라티아, 솔라스크립투라 등등 애기하는 데서 말이죠.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하는 거거든요.


몇 번 이야기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 같은데요. 갈라디아서 공부할때도하구요. 아주 기초적인 것인데 일단 알고 있죠. 정보의 차원에서요. 세례 받을 때도 들었고 설교들을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기 때문에 그러한 단계들이 안고 있는 세계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반복되더라도 그런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하는 바울의 칭의론, 이 말은 곧 우리 행위로서는 율법을 이야기해야 하겠는데요. 도덕적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움 받는건데요. 이런 것으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없다. 도덕적으로 인간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겁니다. 우리는 죄를 벗어 날 수 는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죄를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들어난 행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존재론적인 것이에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라가'라고 하면 친구를 살해한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다고 한다고 보더라도, 겉으로 들어난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이 죄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보면 아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구요.


그런 차원에서 볼때 인간이 죽어야지만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바울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면 살아있을 때는 어떻게 되느냐. 이게 우리의 딜렘마인거죠.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없다. 죄로 인해 죽을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구원을 이야기해야 된다. 딜렘마인데. 바울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다. 구구단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질문이 있으면 이야기하도록 하구요. 


질문: 만인구원론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열려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두 가지로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죠. 


답: 만인구원론도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것과 연관되는데요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입니다. 다만 성서에 있는 그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선택적 구원 이냐 만인구원이냐 그러한 경악가운데 있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인데 어떤 궁극적인 실체를 우리가 지금 볼 수 없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궁극적인 문제 아니겠어요? 우리 몸이 건강해진다거나 알콜중독자가 거기서 벗어난다거나 농땡이 치던 사람들이 착실한 모범적인 삶을 산다거나 하는 것이 구원의 실체는 아니잖아요. 영원히 사는 것일까요. 영생이라고 하나요? 영원하게 사는 것을 우리가 잡을 수 없습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계속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계속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구원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단어가 다른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뿐이지 그것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런 우리 기독교 신앙에 긴장이 있습니다. 늘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도그마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imputation 되었다. 우리의 죄와 의로움의 관계들 계속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세계를 늘 열어놓아야 합니다. 종말론적 시각들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명제들 도그마들로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불확실하거나 불가지론에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결되어 있지요. 종말에 일어나게 될 참된 생명하고요. 참된 생명에 참여하는 그것이 구원이지요. 


실질적이 무엇인지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이것을 다 묘사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묵시의 방식으로, 극단의 상징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선택적 구원이냐 만인 구원이냐 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넓히고 이해하려고 하는 하나의 과정이지 칼로 무를 자르듯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하나님은 선택적이기도 하고 보편적 하나님만이 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심판을 하시는데 우리의 방식으로 그분의 기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모르죠. 예수 그리스도다 말하는 것은 모범답안이기도 하고 맞는 답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름자체냐 그의 죽음 삶 그의 운명, 예수 그리스도의 퍼스날리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 다중, 혼합주의적 우리는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엄중한 사실에 근거, 토대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구원 약속들의 실질들을 미숙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아주 어린애거든요. 그것을 다 담아 낼 수 없습니다. 조금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어머니 품에 안겨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젖을 빨고 어머니는 따뜻함을 느끼고 호흡을 느끼게 되는데 어머니의 실질이 뭐냐 하는것 우리가 뭐를 알겠어요. 영생 구원 하나님 나라 시간 공간 우주 이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전체가 다 하나님이 행위인데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인데. 그러한 긴장이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역사안에서 우리가 고백했던 신앙 신조들, 교리들과 가르침들을 명백하게 우리가 안고 그 안에 들어가서 말하려고 하는 실지를 느끼고 해석하고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독단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개방되어 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마지막 세계를 향해서 열려져 있다고 하는 것,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 활동을 해야 될 겁니다.


그러한 긴장을 말씀드린 거예요. Fundamental Theology죠. 그것의 깊이를 확실하게 붙잡으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다 말할 수 없던 하나님, 그 분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거시는가? 그러한 긴장 역동성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만인 구원, 선택 구원, 이런 것들도 여전히 논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을 해야 될 겁니다. 


실증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거든요.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알리심, 계시, 우리의 인식, 그 과정인 역사, 거기서 생성된 도그마들, 가르침들, 그것이 계속해서 종말까지 딸려가듯이 오지 않는 미래까지 내다보는 그러한 종말론적인 perspective 어떻게 유지하느냐. 이게 핵심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하기 싫어하고 이것을 피곤해하고 불안하기도 구원이라고 손에 잡혀야지 그것을 종말론적으로 열려져 있다(니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 같고해서.) 불안해합니다. 불안을 안고 삽시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솔직한 고백이죠. 불안하다고 해서 이거는 정말 공포심에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좋은 뜻에서의 설레임. 신랑을 맞는 신부와 같다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지요. 첫날밤이 아직 오지 않는, 설레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러한 긴장 불안하지만 깊은 불안, 설레는 불안 그런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해 나가는 과정이 조금 버거운 거죠. 이미 기독교 신앙 안에는 많은 catechism 교리문답이 있습니다. 간단하기도 하구 좀 많기도 하구요. 하나하나가 우주적인 무게를 담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단시일내에 해결할 수 있느냐? 말하다가보면 서로 모순이 생겨서 그런게 좀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만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그런거 아닌가요? 느끼시죠. 삶 자체가 역설적이고 신비롭고 자기 해명이 안될 때가 많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시겠죠. 그것을 사람들은 생각을 안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싫은거예요. 자기 삶이 토대가 있고 탄탄하다고 생각합니다. 쌓아가는 업적입니다. 여러가지 교회안에서도 자기 위치를 확고하게 잡고요. 회사나 가정에서나 위치를 잡아가는 것이 자기 삶을 확인해 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비슷한 방식으로 가게 되는데 솔직한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오늘 저녁에 인터넷으로 이야기합니다만 우리가 여러분가 이렇게 인연을 맺게된 것이 우연한 사건들이 수백번 얽혀져 일어난 것일까요? 십년전으로 돌아가보세요. 여러분과 제가 십년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오늘 이렇게 같은 사이버 공간안에서 만났잖아요. 만날수 있었던 가능성이 수십억분의 일 가능성도 없는 것이죠. 이런 일들이 일어 났거든요.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그렇거든요. 도저히 우리가 어떤 것으로 계산해 낼 수 없는 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살짝 맛본 사람들이 성서기자들이고 영성의 대가들이거든요.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귀한 것들을 모아둔 것이 성서라고 할 수 있겠죠.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전달되고 옳은지도 모르겠고요. 하여튼 제가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이었습니다.


칭의론, 구원, 기독교 신앙과 전체와 연결되는 거구요. 늘 생각을 해야 되는 부분들이구요. 100% 대답은 없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셔야 되는것이구요.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불확실하다 부족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어머니 품속에 안겨있더라도 그 아이로서는 완전한 어머니 경험이거든요. 미숙하지만 완벽한 어머니 경험이거든요. 우리는 2천년동안 그런 경험의 역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배우고요. 그러나 그 어머니 품안에 안겨 있는 경험만 갖고 모든 어머니를 경험했다 말하면 곤란하죠. 나이가 차가면서 새롭게 어머니를 이해해 가는 것처럼 우리 신앙도 그렇게 진행되지 않느냐 하는거죠. 그러기 위해서 신학공부도 필요하면 하고 논쟁도 필요할때는 하고 삶에 대해서도 좀 더 기다려 보고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그런 것입니다. 여기까지 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