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우파니샤드와 붓다

인도의 길 조회 수 3523 추천 수 0 2016.12.27 09:29:14
인도고전읽기 시리즈
우파니샤드(3)

우리는 인도와 인도인들의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있는 경전인 베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인교의 터전이 된 이곳에서 말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신앙에 대한 공감의 자세가 없이는 이들을 이해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근대종교학의 개조이자 동양학자인 막스 뮐러는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인도인들의 내적세계를 배워갈 때 자신의 신앙에 대한 깊이를 더해갈 수 있다. 동서고금 어디나 통하는 황금이라는 신앙을 철저히 믿고 따르는 사업가들에게도 경전을 통한 이들의 내적세계를 배우는 것이 공감의 지름길이다.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우리가 뭔가를 새로 배운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외투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배낭 메고 구두끈을 굳이 매고서’ 배움의 길을 떠나는 아침을 새롭게 맞이하자. 어린이의 왕성한 호기심, 배우고 익히는 것(學而時習之 不亦悅乎)을 군자삼락의 첫 머리에 둔 공자의 학구열, 나는 지렁이로소이다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자세로 배움의 길을 가자. 인도는 우리의 이런 배움의 자세 앞에 파라다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알짬을 고스란히 보여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지고의 행복에 이르게 된다. 달라이라마가 말씀하셨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If you want others to be happy, practice compassion. If you want to be happy, practice compassion.”
지난달에 이어 베다의 끝판왕 우파니샤드와 그 토양을 배경으로 탄생한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 시리즈를 처음 읽는 이를 위해 간단히 인도 사상의 흐름을 정리한다..
기원전 1500년경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에 들어온 유목민족이었던 아리안은 모든 사건과 행동을 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사가 세계의 중심이다. 나와 우주의 존재가 제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제사를 잘 지내야 ‘우주의 기운’, 우주를 통제하는 힘인 ‘르따’를 받을 수 있다. 인도의 최순실인 브라만들이 이를 주관한다. 신을 제단에 초청하는 찬가가 리그베다였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 하나 하나에 읊조리던 말 야주의 모음이 야주르베다가 되었다. 리그베다의 찬가에 멜로디를 붙여 만든 노래 모음이 사마베다가 되었고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는 주문의 모음이 아타르바 베다가 되었다. 이 네 개의 베다를 모음집, 상히따라고 한다.
기원전 1000년경, 인도의 서북부에 있던 아리안들은 지금의 델리 부근 즉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평원으로 이동한다. 이때 사제계급 브라만, 귀족계급 크샤트리아, 생산계급 바이샤와 원주민으로 구성된 노예계급 수드라로 이루어진 사성제도 바루나가 확립된다. 이때 브라만들에 의해 제작된 제사의식 문헌이 ‘브라흐마나’다.
브라흐마나기와 우파니샤드기의 과도기 문헌인 ‘아란야까’는 브라만들이 제사자체보다 제의를 상징화하고 내면화시켜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한 문헌이다. 이는 주로 숲에 거주하며 힌두 삶의 4단계중 3단계 째, 인생의 원숙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던 브라만들의 사상을 모은 것이다.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들이 베다의 내용을 명상하면서 탐구한 결과가 바로 인도 사상의 특징을 이루는 범아일여, 윤회, 업, 해탈 등의 내용을 담은 우파니샤드다.
기원전 5세기경이 되면 북인도에 철기시대가 꽃피게 된다. 철기시대는 무사계급인 크샤트리아에게 과거 석기나 청동기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기를 선사했다. 힘이 더 세어진 것이었다. 철기 농기구로 인해서 생겨난 잉여생산물은 상인 계급인 바이샤들에게 무지막지한 힘을 실어주었다. 권력(權力)이 사제계급인 브라만에서 크샤트리아에게로, 부(富)는 바이사에게 이동했다. 브라만 계급은 더 이상 옛날처럼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브라만이 제일이고 전부였는데 ‘이게 아닌가벼’, ‘아~ 옛날이여 지난 시절 다시 돌아올수 없나’가 된 것이었다.
사회 질서와 윤리가 파괴되자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일상적, 세속적인 의무와 책임을 벗어버리고 탁발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논쟁하면서 돌아다니는 출가유행자(파리브라자카)들, 슈라만(사문)이 생겨났다.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인도판 백가쟁명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만도 363종류이고, 이를 다시 정리하면 62갈래로 묶을 수 있으며 더욱 크게는 6가지로 요약된다.
장아함의 사문과경(沙門果經)은 이러한 자유 사상가들중 대표적인 6명, 일명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나체 수행자로 살았던 푸라나 카삿파는 선악에 따른 과보를 전면 부정하고, 비도덕적인 행위까지도 거리낌 없이 행하는 도덕부정론자였다.
아지타 케사캄발라는 만물이 땅, 물, 불, 바람의 이합집산으로 이루어졌다는 유물론자로서 영혼 따위는 없으며, 인간은 죽으면 신체를 구성하는 네 원소가 각각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파쿠다 캇짜야나는 아지타의 땅, 물, 불, 바람에 고통, 즐거움, 생명을 더하여 이 세상은 이 불멸하는 7개의 요소가 기계적으로 이합집산하고 있기에 설사 사람을 칼로 베어도 칼은 다만 7요소 사이를 통과하는 것뿐이며,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아쇼카 왕때까지 교세를 유지하다 자인교에 흡수된 아지비카 교파의 개조인 막칼리 고살라는 파쿠다의 7요소에 공간, 모이는 법칙, 득(得), 흩어지는 실(失), 생과 사 다섯 가지를 추가하여 12요소 설을 내세우며 만물의 생멸(生滅)은 자연법칙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주장하였다.
산자야 벨라디풋다는 철저하게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에만 의존하여 진리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회의론자였다. 그가 가장 총애하던 제자였던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揵連)이 붓다를 따라가자 피를 토하며 원통해 했다고 한다. 후대 신약성서 사복음의 하나인 요한복음의 저자는 광야에서 외치던 자의 소리, 사도 요한을 산자야보다 한 수 높은 존재로 묘사했다. “나는 그 분의 들메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자이나교의 창시자이자 붓다와 같은 크샤트리야 출신인 나간다 나타풋타(마하비라)는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에 받을 괴로움이 결정되어 있으므로, 현생에 고행을 통하여 그 업을 해소하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면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한 고행주의자였다. 그는 붓다와 비슷한 시대에 밧지 국의 베살리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지(完全智)를 성취한 후 30년간 교화활동을 펴다가 72세에 입적하였다. 그는 우리가 행동을 할 때마다 생기는 미세한 물질인 업(까르마)이 몸으로 들어와 영혼(지바)에 부착됨으로 윤회(삼사라)가 생긴다고 했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미세한 업의 물질이 영혼에 부착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 방법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고행이라고 주장했다. 상기 슈라만들의 쾌락주의(快樂主義) 대신 고행주의(苦行主義)를 택한 것이다.
붓다는 쾌락주의도 고행주의도 아닌 수정주의(修正主義)인 중도(中道)를 새로운 수행의 길로 제시했다. 쾌락주의는 왜 생기는가? 사후를 믿지 않아서 생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가 나오고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주의’가 나온다. 고행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건 오히려 내세에 더 큰 괴로움(업)을 만드는 것이 된다. 붓다가 제시한 중도는 정견(正見)에서 시작해서 정정(正定)으로 끝나는 팔정도(八正道)다. 붓다는 이 수행방법을 통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기존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들은 윤회에서 해탈(목샤)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명상을 통해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의 자각을 이루고자 했다. 팔정도를 통해서나 명상을 통해서나 해탈에 이르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팔정도의 출발인 정견에 있다. 정견이 아닌 사견(邪見)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붓다의 입장에서 보면 브라만이란 신이 변화해서 이 세상을 이루었다는 견해, 아트만과 같은 상주(常住), 불멸(不滅)하는 자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 육사외도의 사상들이 사견이었다. 그래서 이 진리 아닌 것을 붙들고 아무리 명상을 해봐야 맹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진리는 뭔가? 연기법이다. 붓다의 십이연기설은 생로병사우비고뇌 등의 모든 괴로움이 무명, 즉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연기하므로 이것이 사라지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붓다는 시간적으로 자기 동질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를 주장했다. 연기법은 무아의 도리를 일깨우는 진리다. 나는 태어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없이 인연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니 나와 세계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연의 끈으로 한 몸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무아사상에 대하여 비베카난다는 그게 아니라고 논박한다. 비베카난다가 누군가? 그는 힌두의 유명한 성자 라다크리슈나의 수제자로서 요가의 최고봉이라는 무상삼매(無想三昧, 니그비깔파 사마디)경지에 도달한 후, 대우주(브라만)과 소우주(아트만)가 동일한 원리로 지배받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아가 명상과 일상 사이에서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법을 터득한다. 그는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에 힌두교의 대표로 참석하여 원고 없이 이렇게 설파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불멸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며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들로서 이 땅위에 있는 신성들입니다. 죄인이라니요! 인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야말로 죄이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명백한 반역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발원한 강물들이 결국 모두 바다에 이르듯이 모든 종교가 하나의 신에게 귀결되며 따라서 종교간의 우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에 감명을 받은 서구인들은 여기저기서 그를 초청했고 4년간의 순회강연은 인도의 철학과 사상을 서구인들에게 깊이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다의 가르침속에서 종교체험을 했던 비베카난다는 불교의 무아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붓다가 가졌던 무지하고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높이 샀다. 브라만들이 어려운 범어로 자기들의 지식세계를 키다리 아저씨의 정원처럼 고수하려고 했다면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지방 사투리(쁘라끄리띠)인 팔리어로 서민들에게 다가갔다고 했다. 그렇지만 남녀노소의 마음에 자리 잡은 브라만과 아트만을 부인한 것이 결국 불교가 이 땅에서 사라진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비베카난다는 브라만이 개혁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불교가 가진 서민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과 자비를 가지지 못했을 때 인도는 천년동안 타국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거리엔 수백만의 거지로 넘쳐났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불교의 인간애와 놀라운 브라만의 지혜(베다)가 함께할 때 인도는 이 시대의 천축국으로 변모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간디가 스탠리 존스 선교사에게 했던 말을 다시 기억한다. 선교사가 힌두인 간디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기독교가 외국 정부, 외국 사람이라는 냄새를 풍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도로 녹아 들어가 인도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종교로 인식이 될 수 있을까요? 힌두 지도자로서 기독교인인 나에게 가능한 길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간디는 대단히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첫째, 나는 기독교인들, 선교사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 것을 제안하고 싶소. 둘째, 당신네 종교를 과장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실천하시오. 셋째, 사랑을 강조하고 이것을 당신들의 사역의 동력으로 삼으시오. 왜냐하면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이니까. 마지막 넷째로, 현지인들과 깊이 있는 교제를 나누려면 그들의 종교를 이해의 측면에서 공부하여 그들 가운데 있는 장점을 발견하도록 하시오.”
성자들이 위대한 것은 위대한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가르침을 삶으로서 실천한 것에 있다. 예수가 그랬고 붓다가 그랬고 간디가 그랬고 마더 테레사 수녀가 그랬다. 이들을 볼 때 지식을 위한 지식속에서 팍팍한 삶은 살거나 너무나 짧은 인생,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삶의 허무함에 몸부림치며 쾌락으로 삶을 놓아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아니다. 내가 진리라고 확신한 것 하나를 삶으로서 살아내는 서슬 퍼런 용기, 백척간두에 서서 주어진 하루를 하루살이가 아침을 대하는 자세로 진일보 할 수 있는 삶이 삶 다운 삶이다. 이것이 인도의 방대한 철학, 우파니샤드를 공부한 결론이다. 너무 진부한가? 아닐게다. 보통 사람이 위대한 것이며 일상으로 주어진 지금이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인 게다. 

[레벨:21]주안

2016.12.27 14:38:36
*.69.199.48

잘 읽고 배웠습니다.

조금 어렵지만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신 것, 축하드립니다.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저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건강하고 평안하시기 빕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16.12.28 06:42:34
*.177.58.39

주안님

깨닫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안 것 같습니다.

다만 7080 복음성가의 한 구절처럼

'불 속에라도 들어가는' 그런 결기가 필요한데 그러지 못하니

매일 듣느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내 안의 영의 탄식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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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12.27 22:04:52
*.164.153.48

인도 종교와 철학의 갈래가 정말 정밀하군요.

우리가 불교 창시자로 크게 보고 있는 붓다도

인도 사상에서는 여러 인물 중의 하나에 불과(?)한 거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 문명권에 복음을 전했을 때

로마가 예수를 여러 신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처럼

인도에서도 그런 정도의 포즈를 취하면 기독교가 받아들여질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이 성립되지 않으니

아주 예민한 시각으로 그분들과 관계를 맺어야겠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16.12.28 07:05:21
*.177.58.39

지난 주 007시리즈의 무대가 된

라자스탄 지방의 오아시스가 이루어진 도시 우다이푸르에서

목수일을 하시면서 선교하시는 분이 다녀갔습니다.

인도 원목으로 가구를 만들어 파시면서 선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말과 행위, 인격으로는 나보다 훌륭한 인도인들이 너무 많아요.

과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때가 많아요."

그 말에 공감했습니다.

물셰례 불세례를 이야기했지만 

목사님 말씀처럼 예민한 시각이 없으면 

예수님은 또 다른 비쉬누(삼신중의 하나로 우주 유지의 신)로 받아들여집니다.

마치 붓다가 비쉬누의 여덟번째 아바타(화신)으로 받아들여진 것 처럼.

감사합니다..


[레벨:8]쌀알

2016.12.28 02:03:53
*.99.243.81

인도는 온갖 신을 믿는 힌두교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역사적으로 이야기 거리가 많고 매우 복잡하네요.

제가 지내는 이 곳에서 경험하는 인도인들은 운전에 매너가 없고 줄서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질서도 잘 안 지키고 거짓말이 일상화 되어 있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오래 되고 깊이 있는 종교와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매우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좀 의아하네요.

어쨌거나 방대한 내용을 짧지만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조금이나마 배웠습니다.

저도 인도인들을 좀 더 이해해 보려 노력해봐야겠어요.

profile

[레벨:26]사띠아

2016.12.28 07:23:10
*.177.58.39

쌀알님이 사시는 곳의 인도인들의 대부분이 

노동자 출신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전하는 터번쓴 펀잡사람들은 여기서도 그럽니다.

상류층도 돈 앞에서는 좀 그런 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에 어줍잖은 오만으로 보던 세월이 길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좋은 이웃들을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이십년이 훌쩍 넘어서야 이제 조금씩 이들의 내면이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인도인처럼 되어버렸네요.

창세기 12:1-3절 말씀에 삶 전체를 걸고 

생면부지의 인도땅에 훌쩍 발내딛던 그 자세가 없어진겁니다.

그래도 살아야겠지요. 크리스천으로서. 


[레벨:8]쌀알

2016.12.29 00:54:18
*.99.243.81

이곳엔 생각보다 부유한 인도 사람들도 많아요.

인도인들이 상권 장악에 수단이 좋더군요.

저도 처음엔 노동자층만 그런줄 알았는데 비싼차 타는 인도인들은 더 하는거 같다라고요ㅠ

저도 이렇게 판단하는게 어줍잖은 오만 같은 거겠죠?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용납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한때 선교사의 꿈을 꾸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새 종족별로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익숙해져버린 것 같아요.

이제 좀 겸손해져야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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