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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로 다가가기 : 한강 <소년이 온다>

조회 수 2516 추천 수 0 2017.05.26 16: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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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로 다가가기 : 한강 <소년이 온다>

 

 

오월 소설

 

올해로 5·18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았습니다. 19805월에 있었던 이 엄청난 사건의 정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인데요. 문학 쪽에서는 이 사건을 다룬 작품을 묶어서 오월 문학’, ‘오월 소설이라 부릅니다. ‘5·18 소설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오월 소설이 더 일반적입니다.

올해는 오월을 맞이하는 느낌이 각별합니다. ‘오월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정부가 물러가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두 정부에서 9년 동안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가, 올해 9년 만에 대통령이 참석자와 함께 이 노래를 제창해서 화제가 되었지요. 5·18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대통령의 기념사도 감동적이었고, 특히 5·18 유가족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그토록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오월의 가치가 훼손되어 온 데 대한 억눌림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월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오월을 증언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논픽션 기록물로는 광주항쟁의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 1985)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펴냈고, 황석영이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정치적 사정 때문에 다른 공동 저자의 이름은 내지 않고 황석영만 대표로 내세웠다고 하지요. 황석영 선생은 이 책 출간 때문에 옥고를 치르기도 합니다. 이 책이 개정판이 올해 5·18을 앞두고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개정판에는 이재의, 전용호 등 다른 저자의 이름을 밝혀놓고 있습니다.

 

소설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오월을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그것을 증언해 온 소설가로 임철우를 들 수 있습니다. 임철우의 사평역등 서정소설에서조차 폭력의 흔적이 내재해 있는데, 이 역시 19805월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19805월 당시 임철우는 전남대 학생으로서,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고, 그 이듬해에 등단하게 되는데, 그는 처음부터 그냥 오월을 세상에 전하겠다, 이게 목표였다고 합니다.

당시 임철우는 황석영이 조직했던 마당극 운동 단체 <광대> 멤버로 합류해서, 황석영의 작품 한씨 연대기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 중이었습니다. 임철우는 주인공 한영덕의 역할을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요. 이 공연을 앞두고, 1026에 이어 518이 터지게 되어 공연은 무기 연기됩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도청 사수를 호소하는 방송을 들으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가 작가로서, 오월을 전하겠다는 사명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일로 인한 수치심,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의식이 그만큼 컸던 것이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오월을 증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어요. 1985년에는 오월을 알레고리적 형식에 담아 낸 불임기, 1997-98년에는 오월을 재현한 가장 정확하고 치밀한 기록물로 평가받는 장편소설 봄날을 쓰게 됩니다. (절대공동체의 안과 밖 역사, 기억, 고통 그리고 사랑, 문학과사회, 2014 여름)

이밖에도 사회과학 분야 연구서로 최정운의 오월의 사회과학(1999, 2012)이 있고, 영화로는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 그리고 <꽃잎>의 원작이 되었던,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92)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황지우의 시극 오월의 신부(문학과지성사, 2000)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떠올릴 수 있는 오월의 기록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도 오월을 기억하고 현재화하려는 소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권여선의 레베카(2012), 김경욱의 야구란 무엇인가(2013), 이해경의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2013), 그리고 이번에 우리가 읽은 작품인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 등이 그것입니다. (최근 오월 소설에 대한 논의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조연정, 광주를 현재화하는 일, 대중서사연구 203, 2014; 서영채, 문학의 윤리와 미학의 정치, 문학동네 2014년 가을; 강소희, 오월을 호명하는 문학의 윤리, 현대문학이론연구 62, 2015; 강진호, 5·18과 현대소설, 현대소설연구 64, 2016.)

최근에 오월 소설이 많이 나오게 된 우리 민주주의가 걸어온 과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최장집 교수에 따르면,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중이라는 집단을 우리 정치에 처음 등장시킨 사건입니다. 이 때 민중이란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권위주의 산업화가 가져온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노출된 집단인데요. 이 민중이 민주주의 투쟁의 주체로 떠오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와 광주 항쟁의 세 가지 의미, 아세아연구 502, 2007 참고)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지난 두 번의 정부를 지나는 동안 민주주의의 반동기를 겪으면서 오월의 가치는 훼손됩니다. 지난 9년 동안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을 금지하고,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오월의 시대정신을 공유한 소설가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오월 소설오월이 훼손되는 상황을 극복하고 오월을 현재화하고자 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강의 오월경험

 

작가 한강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작년에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국내 권위 있는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유명 작가였습니다. 한강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호오는 크게 갈리는 편입니다. 한강 소설이 보여주는 끔찍한 새로움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불편해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혹 한강에 대해 다소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독자라 하더라도 소년이 온다에서만큼은 이런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년이 온다에도 한강의 작가적 개성이 드러나고는 있지만, 그보다도 오월이 작가로 하여금 쓰게 한, 혹은 오월자체가 쓴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소년이 온다를 낸 직후 한강은 소설가 김연수와 대담을 한 내용이 한 계간지에 실렸는데요. 그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자신이 별로 중요하게 않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 작품을 쓰는 일 년 동안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단지 이 작품에 나오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소설을 쓰다 보니까 자기가 없어진 것이지요. 작가로서 일종의 신비 체험을 한 것입니다. (김연수,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강과의 대화, 창작과 비평, 2014년 가을)

 

실제로 소년이 온다는 자료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이전까지 한강의 소설과는 다른 글쓰기 과정으로 태어난 작품입니다. 작품 에필로그에도 나오듯이, 실제로 한강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석 달 동안을 자료에만 파묻혀 살았다고 합니다. 3일곱개의 빰은 그 시절에 편집자 생활을 한 어느 선생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하고요, 대사가 모두 검열되어서 입만 달싹이는 침묵의 연극도 실제로 있었던 일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4쇠와 피에 나오는 80년 여름 상무대의 고문도 자료를 통해 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여름 상무대에서 있었던 일은 지금까지 소설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5밤의 눈동자의 선주는 1970년대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이가 광주로 내려가 미싱사로 일하다가 오월의 현장에 있게 된 인물인데요. 이런 인물은 허구이지만, 이 허구적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서도 자료 읽기가 중요했다고 합니다.

 

오월의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 작품을 쓰도록 이끌었을까요? 이 작품 에필로그에 나오는 작가의 오월경험, 즉 열 살 무렵 이 일이 있고 난 후 어른들이 아이들의 귀를 피해 은밀하게 나누는 이야기에서,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가져온 사진집에서 경험한 오월은 실제 작가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작품은 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199)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쓰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고 합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도울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아마도 사진첩을 보면서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지는 경험에 내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한강이 노르웨이에서 강연한 원고에도 이 물음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김연수, 앞의 글; 노르웨이 강연록은 창비블로그 참고)

 

소년이 온다의 보여주는 오월에 대한 인식에 따르면, ‘오월경험은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재이기도 합니다. 2009년 용산에서 오월은 반복되었습니다. 아마 이 작품이 조금 더 늦게 나왔다면 세월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2009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207)

 

이렇게 보면 오월경험은 한강의 소설 전반에 드러나는 인간 이해의 근원 체험이 된 것이고, 따라서 지금까지 한강의 소설은 소년이 온다에서 시작해서 다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곱 개의 목소리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군요. 장편소설이라기에는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인데요. 아마 한 번에 죽 읽어내려 가기 매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고통을 삭여 가면서 여러 번 끊어 읽어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에필로그부터 거꾸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이야기의 내용이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다른 여러 개의 목소리들이 파편화된 이야기를 조금씩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년이 온다오월당시의 한 소년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강동호. 당시 중학교 삼학년 학생이었고, 사망자들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했던 도청 앞 상무관에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그가 했던 일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들의 인상착의와 인도된 시간과 날짜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중학생 소년이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소년의 집에 세들어 살던 동갑내기 친구 정대와 그의 누나 정미의 일 때문이었어요. 계엄군에 의한 폭력사태가 자행되던 날, 야학에 다니던 정미가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누나를 찾으러 간 정대가 소년이 보는 앞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집니다. 그렇게 정대 남매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소년은 병원과 영안실로, 그리고 상무관으로 왔다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소년이 온다는 이 이야기를 매우 낯선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이 작품은 에필로그를 포함해서 일곱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소설은 1980오월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목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1990년대의 시점에서, 그리고 2014년 현재의 시점에서 오월을 기억하여 말하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소설 첫 장에서는 동호를 라고 지칭하는 어떤 목소리에 의해 전해집니다. 상무관에서 동호가 만난 사람들, 즉 시체들을 수습하는 일을 했던 여고 삼학년생 은숙과 스물세 살 양장점 미싱사 선주, 그리고 도청에서 상무관을 오가면 상황실 일을 했던 대학생 김진수 등이 첫 장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뒤에 이어지는 장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목소리-주체(서술자 혹은 초점화자)가 됩니다. 2장의 목소리는 죽은 정대의 넋이고, 3장은 출판사에 근무하는 1980년대 중반의 은숙, 4장은 진수와 함께 마지막 날 도청에 남아있던 청년, 5장은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 선주, 6장은 동호 어머니의 독백,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작가의 목소리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동호 자신을 포함해서 그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동호와 연관되어 있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 모두가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호를 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는데요. 라는 2인칭은 아주 독특합니다. 작품 첫 대목을 보겠습니다.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7)

 

앞에서 목소리-주체라는 말을 썼는데요. 이 소설의 서술 방식과 그 효과가 이전까지의 소설과 크게 달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써 왔던 용어인 시점, 서술자, 초점화자 등으로는 이 소설의 이야기하기 방식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목소리-주체라고 하면, 서로 다른 이들의 목소리로 각 장이 서술되고 있지만, 이들이 모두 소년을 2인칭 로 호명하고 있는 이 소설의 특징을 잡아내기에 더 나아보입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소년을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나오는데요. 1장의 이 목소리는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서 독자로서는 당혹스럽습니다. 2장부터 에필로그까지 각 장에서 소년을 라고 부르는 서로 다른 목소리-주체가 나오지만,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주의 깊게 읽으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장의 목소리-주체는 작품을 다 읽고 나도 그것이 누구인지 불분명합니다.

몇몇 연구자, 비평가들도 이 점에 주목했는데요. 어떤 이는 이 목소리를 동호 자신의 것으로, 또 다른 이는 2장의 목소리-주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죽은 정대의 넋으로 읽고 있더군요. 하지만 제가 읽기로는 이런 독법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이 목소리를 동호 자신의 것으로 읽을 경우 이는 위장된 1인칭의 용법이라 할 수 있는데요. (2인칭 사용을 위장된 1인칭으로 설명한 것으로 H. 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지성사, 2010, 142쪽 참고). 그런데 이렇게 읽을 경우, 2장부터 에필로그의 목소리-주체들이 소년을 라고 부르는 용법과는 다른 것이 되지요. 1장의 목소리-주체를 2장과 같은 것으로, 즉 죽은 정대의 넋으로 읽게 되면, 목소리-주체가 전해주는 이야기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지점이 있습니다. 예컨대 1장의 목소리-주체는 뒷부분에서 정대의 죽음을 목격하는 장면을 충격적으로 알려주는데요. 정대의 죽은 넋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알려주는 것은 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2장이 전해주는 죽은 넋의 이야기에 따르면 죽은 넋은 동호의 현재 사정에 대해 모르고 있어요. 나중에 소년이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소년의 죽음을 알아차립니다.

결국 1장의 목소리는 작가(내포작가)의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요. 이 경우에도 설명은 쉽지 않습니다. 소년이 온다의 여러 목소리-주체의 근본 층위를 말하자면, 그것은 내포작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2장부터 6장까지는 어떤 인물을 화자(혹은 초점화자)로 설정하고 있는 경우이고, 에필로그는 작가 자신으로 상정되는 1인칭 서술자를 설정한 경우, 그리고 1장은 특정한 화자를 설정하지 않고 내포작가가 서술하는 경우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작가(내포작가, 때로는 1인칭 서술자, 때로는 초점인물)가 소년을 라고 부를 때, 독자는 작가가 소년을 라고 부르는 바로 그 위치에서 소년을 향해 서게 됩니다. 이 점에서 소년이 온다2인칭은 위장된 1인칭의 용법과 분명 다릅니다.

 

이런 독특한 이야기하기 방식을 이 자리에서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 이런 이야기방식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소년이 온다2인칭 사용의 효과에 대해서는 작가가 설명한 대목이 있어서 참고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2인칭을 어떤 의도로 채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인데요.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3인칭과 달리 2인칭은 오직 한 사람, 내가 부르는 바로 그 사람이잖아요.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인 그 사람에게 가 집중하고 있는 것인데요. 동호는 죽은 소년이지만, 부르면 거기 어둠으로부터 떠올라서 존재하게 돼요. 호명하고 또 호명하면 현재 속에 가까스로 떠오르는 예요. 그렇게 처음부터 2인칭으로, ‘가 동호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들이 바뀌면서 저마다 동호를 라고 불러냄으로써, 동호의 마지막 시간이 파편들처럼 불완전하게 맞춰지도록 하고 싶었어요. (중략)

소년이 온다는 모두가 라고 부름으로써 오게 되는 어떤 소년에 대한 것이니까 의미가 달라요. 그리고 소설을 쓸 때, 저 역시 쓰는 동시에 읽어가게 되잖아요. 제가 라고 2인칭으로 부를 때, 마치 화살이 과녁을 비껴가듯이, 읽는 사람인 저를 겨누다가 비껴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읽으면서 쓰는 와 같은 방향에, 지금 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저에게는 중요했어요. (김연수, 앞의 글, 325-326)

 

모두가 소년을 향해 라고 부르는 이 호명을 통해 소년이 오게 되는, 그래서 작품을 쓰는 작가나 독자가 모두 와 같은 방향에, ‘와 함께 존재하게 되는 이 2인칭. 한번이 읽히는 걸 방해하면서도, 고통의 언어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의 근원이 아마도 이 2인칭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월을 재현하기

 

소년이 온다오월을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재현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서 소년이 온다봄날과 대비됩니다. 봄날19805월 광주의 진상을 전면적으로, 구체적인 서사의 차원으로 재현하는 데 비해, 소년이 온다가 재현하는 오월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소년이 온다는 한 소년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트라우마적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오월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환기하는, 이들이 고통스럽게 내뱉는 언어를 통해 소년의 죽음은 조금씩 조각이 맞추어집니다.

오월이 이런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오월이 근본적으로 증언 불가능한 경험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적 사건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 오카 마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기억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기억이 사람을 소유한다. 그와 같은 사건의 기억을 타자가 영유할 수 있다면,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서사에는 사람이 그 사건을 영유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징후가 새겨져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오카 마리, 기억서사, 소명출판, 2004, 162)

 

소년이 온다에는 곳곳에 불가능성의 징후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불가능성의 징후를 통해 트라우마적 사건을 타인과 나누어갖고자 합니다.

동호의 죽음이 처음 알려지는 것은 2검은 숨에서 죽은 정대의 목소리를 통해서입니다. 죽은 정대의 넋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 없는 거였어.’(46-47) 그런데 이 넋이 알아차리는 것도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넋이 옆에 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빛이 없는 허공으로 번지며 나는 위로, 더 위로 올라갔어. 캄캄했어. 도시의 어느 방향으로도, 어느 구역,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어. 눈부신 불꽃들이 뿜어져나오는 곳은 멀리 있는 한 지점뿐이었어. 연달아 쏘아올려지는 조명탄 불빛들을, 번쩍이며 흩튀는 총신들의 불꽃을 나는 봤어. (64)

 

죽은 넋의 목소리란 대체 무엇일까요? 왜 이런 장치가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오월사건에서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죽은 이들의 사정에 대해, 어딘가에서 불태워지고 암매장되었을 그 이들의 사정에 대해, 이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는 처음부터 증언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딘가에 파묻혀버린 진실을 복원하고자 한 작가의 시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됩니다. (김연수, 앞의 글 참고)

이 목소리는 매우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어요. 고통이나 분노, 억울함 등 일체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소리에 의해 소년의 죽음이 알려져요. 죽은 넋의 절제된 목소리로 전해지는 소년의 죽음은 독자에게 낯선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3일곱개의 뺨에서는 출판사 직원이 된 은숙의 목소리를 통해 동호의 마지막이 그려집니다. 은숙은 수배당하고 있는 필자를 만났다는 이유로 취조관에게 뺨을 맞습니다. 그녀가 편집한 또 다른 책은 검열에서 통째로 지워집니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이 목소리를 빼고 입술만을 달싹이면서 연기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이 모두가 오월이 말해질 수 없는 경험임을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색색의 만장들이 일제히 무대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 배우들이 별안간 꼿꼿이 허리를 편다. 노파가 걸음을 멈춘다.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나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102-103)

 

4장과 5장에서 증언 불가능성은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장에서 목소리-주체들은 연구자 윤으로부터 증언을 요청받습니다. 이 요청에 대해 이 둘은 증언 불가능성을 호소합니다.

4쇠와 피의 목소리-주체는 김진수와 함께 겪은 상무대에서의 고문에 대해, 그리고 그 후 십여 년 동안의 고통스런 삶에 대해 증언합니다. 이 목소리는 증언을 거부하면서, 가까스로 오월의 현장, 즉 동호의 죽음으로 다가갑니다.

 

김진수가 어떤 이유로 이 사진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왜 유서 곁에 이 사진이 놓여 있었는지 내가 이제 추측해야 합니까?

여기 직선으로 쓰러져 죽어 있는 아이들에 대해 선생에게 말해야 합니까?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 (132)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133)

 

5밤의 눈동자의 목소리-주체는 기억해달라는, 직면하고 증언해 달라는 윤의 요청 앞에서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되묻습니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166-167)

 

오월을 겪은 이들은 이 경험을 증언할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증언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통해서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 역설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목소리들을 구성하고 배열하는 작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에 의해 증언 불가능한 경험의 조각들이 하나씩 드러나 오월이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소년이 온다증언 불가능성을 재현 가능성으로 극복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연정, 광주를 현재화하는 일, 대중서사연구 203, 2014.)

 

증언 불가능한 경험을 재현해야만 하는 이 작가의 사정도 녹록치 않았을 텐데요. 에필로그는 이를 보여줍니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던 작가는 꿈을 꾸게 됩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삼십삼년 동안 지하 밀실에 가둬둔 518 연행자들 수십명이 있다고 했다. 이제 비밀리에, 내일 오후 세시에 모두 처형할거라고 했다. 꿈속의 시간은 저녁 여덟시였다. 내일 오후 세시까지 고작 열아홉시간이 남았다. 어떻게 그걸 막을까. 말해준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휴대폰을 쥐고 어쩔 줄 모르며 길 가운데 서 있었다. (203-204)

 

여기에서 에필로그가 끌어들이고 있는 목소리-주체, 즉 작가로 상정되는 1인칭 목소리의 성격에 대해서도 설명해야겠습니다. 에필로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실제 작가 자신의 것이라고 읽을 수 있는 대목도 많이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는 1장에서 6장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와 같은 층위에 놓여 있는 소설적 허구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소설적 허구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이론적 주제로 이끄는데요. 허구와 실제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이야기에 내재된 속성에 있다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관념에 속한 것입니다. 어쨌든 에필로그의 목소리-주체’, 그리고 이 목소리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 작품이 전해주는 오월경험을 허구에서 실제로 한걸음 옮겨놓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작가는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방식으로 오월을 전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소년이 온다는 이런 방식으로 오월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독자에게 오월에 대해 응답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오월을 현재화하기

 

소년이 온다오월에 자행된 끔찍한 폭력 자체를 재현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작품도 국가폭력을 다룹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폭력 자체의 잔인성에 대한 고발보다는 이 폭력을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계속 되돌아오는가, 즉 오월이 현재화되는 방식에 강조점이 놓여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소년을 기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 소년의 죽음을 재현함으로써 오월을 현재화합니다. 동호는 왜 그날 그 곳에 남아 있었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정대가 죽어가는 순간 그의 손을 놓쳤고, 지금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양심, 이 죄의식이 소년으로 하여금 그날 그곳에 있게 했습니다. 한편, 소년이 죽어간 그 오월에 살아남았던 이들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치욕스럽습니다. 이 치욕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몸입니다. 3일곱개의 뺨에서 은숙은 뺨을 맞는 그 순간 눈부신 물줄기를 뿜어대던 분수대를 떠올립니다. 4쇠와 피에서 증언을 요청 받는 목소리-주체는 모나미 볼펜으로 뼈가 드러날 때까지 손가락을 비틀던 상무대의 고문을 기억합니다. 5밤의 눈동자의 선주는 자궁을 후벼들던 삼십 센티 나무자를, 그로 인한 하혈을 기억합니다. 오월은 현재에도 계속 되살아나 살아남은 이들의 삶을 괴롭힙니다. ‘오월은 죽은 이에게도, 또 살아남은 이에게도 현재화되어 되살아납니다.

 

죽은 이에 대해 말하자면, ‘오월의 현재화는 애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란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정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점차 철회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에서 벗어나 현실 속으로 복귀하는 과정입니다. 애도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면 우울증이 되기도 하는데요, 이런 경우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상의 상실이 자아의 상실로 전환되어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과 자기비하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2003 참고) 그런데 오월은 오랫동안 애도가 금지된 경험이었습니다. ‘오월은 그 자체로도 폭력적이었지만, 그것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애도가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폭력적이었습니다. 국가폭력이 애도를 금지하는 일은 불과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지 말지를 두고 9년간이나 소모적인 논쟁을 벌였지요. 유가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세월호도 오월경험의 연속임에 틀림없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그 자체로 오월에 대한 애도입니다. 1어린 새에서 동호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서, 이들의 시신 앞에 촛불을 밝힙니다. 그리고 작품 에필로그의 마지막 대목에서 소년의 무덤을 찾은 ’(작가)가 하는 일도 촛불을 밝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의 처음과 끝이 오월의 희생자(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던 이들)에 대한 애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 저녁 네가 진수 형에게 양초 한상자를 구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초를 태우면 냄새가 없어지겠구나. (중략)

진수 형이 오십개들이 양초 상자 다섯 개와 성냥갑을 놓고 간 아침, 너는 도청 본관과 별관을 구석구석 다니며 촛대로 쓸 음료수 병들을 모아왔다. 출입구의 탁자 앞에 서서 하나씩 양초를 밝힌 뒤 유리병에 꽂아놓으면 유족들이 가져다 관 앞에 놓았다. 초가 넉넉해서, 유족이 지키지 않는 관과 미확인 시신들의 머리맡까지 모두 밝힐 수 있었다. (19-20)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아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 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한쪽 발목이 차가워진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무덤 앞에 쌓인 눈 더미 속을 여태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젖은 양말 속 살갗으로 눈은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215)

 

다행히 지난 518기념식은 애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애도는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치욕을 그것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미래를 향해 열어놓는 힘이 된다는 점에서, 애도를 회복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남은 이에 대해 말하자면, ‘오월의 현재화는 오월이 이끄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오월이 가져다 준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있을까요? 소년이 온다의 목소리는 1980년 현재 시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현재 시점으로 가까워지는데요, 이렇게 현재와 가까워질수록 오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점, 즉 구원의 가능성이 마련되는 것 같습니다. 소년이 온다의 뒷부분에서 소년은 오월의 피해자인 목소리-주체들로 하여금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존재로 드러납니다.

5밤의 눈동자의 목소리-주체인 선주 역시 오월의 트라우마를 앓고 있습니다. 그것을 증언해 달라는 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꾸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자기 안으로 숨는 인물입니다. 소설은 이 선주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녀가 죽기 위해 광주로 갔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소년의 죽음을 담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밤 이후 누군가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소리를 듣습니다. 소년이 오는 소리입니다.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172-173)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174)

 

선주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이야기에서 선주는 오월경험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는 성희 언니를 만나러 가는데요.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오월이 가져다준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꽃 핀 쪽으로는 동호 어머니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이야기이고,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인데요. 이 두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소년이 이끌어가는 어떤 힘입니다.

 

네가 여섯 살, 일곱 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들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몸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192)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213)

 

오월이 우리를 이끌 수 있을까요? ‘오월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까요? 이 물음은 역사적인 대답과 실존적 대답을 동시에 요청합니다. ‘오월이 민주주의의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면, 그래서 이후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의 성숙으로 나아왔다면, ‘오월이 우리를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사 앞에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응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와 광주항쟁의 세 가지 의미, 아세아연구 502, 2007)

오월이 믿을 수 없는 용기와 사랑,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한 희생을 실천한 절대 공동체였다면, ‘오월은 지금도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오월앞에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실존적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월에서 임철우가 깨달은 것처럼 인간 안에 하느님과 가장 야만적인 짐승이 함께 들어 있다면, 오월에서 한강이 본 것처럼 인간의 참혹과 존엄이 함께 존재했고, 그래서 소설은 인간의 참혹을 뚫고 존엄으로 나아가야 했다면,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실존으로 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봄, 2012; 최정운&임철우 대담, 절대공동체의 안과 밖, 문학과 사회, 2014년 여름; 김연수,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강과의 대화, 창작과 비평, 2014년 가을)

 

 

 


profile

[레벨:11]갈매나무

2017.05.26 16:50:34
*.230.136.69

지난 주일 오후 대구샘터교회에서 있었던 문학 강의의 발제문입니다. 다비아에서도 5.18항쟁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었네요. 발제문을 좀 다듬어서 올리느라 늦었습니다. 한글 파일로 작성한 걸 그대로 붙여넣기를 했더니 저서를 표시한 기호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레벨:21]주안

2017.05.26 20:20:23
*.69.199.48

와!

좋은 글 고맙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읽어보고 싶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7.05.26 21:20:42
*.164.153.48

갈매나무 님, 그날 저에게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5.18에 대한 신학 논문이 나오긴 했지만

체계적으로 다뤄지진 못했습니다.

5.18은 아우슈비츠 못지 않을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인데도

교회와 신학는 관심을 갖지 않는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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