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보편성 회복과 목사 사례비 문제

 

<월간 목회> 편집부로부터 청탁받은 원고 제목은 원래 한국 교회 문제, 이렇게 극복하자였다. 제목이 광범위하다. 한국교회 문제가 어디 한 두 개이겠는가. 미자립 교회, 초대형 교회, 교파 난립, 목회자 과잉 공급, 담임 목사 세습, 목사 노후 불안정, 교인수 저하, 사회로부터의 불신, 기복주의, 개교회주의, 설교 표절, 목사의 부도덕성 등등, 끝이 없다. 이런 문제들은 지금까지 여러 매체와 논객들에 의해서 분석되었으며, 백가쟁명 식으로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전반적인 사태를 알만한 분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기보다는 <사도신경>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을 해명하면서, 그에 해당되는 구체적인 예로서 목사의 사례비 문제를 짚기로 했다.

모든 정통 교회는 매주일 공동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정교회(orthodox church)<니케아 신조>로 고백한다. 어떤 신조를 따르든지 이 두 신앙고백은 기본 구조가 똑같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개신교회도 간혹 <니케아 신조>로 신앙고백을 드려볼만하다. 신앙고백을 함께 나누는 것은 두 가지 층위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교회 일치다. 교회가 다르고 교단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예배 때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드린다면 모두 한 교회다. 현재의 교회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 역사의 모든 교회와 앞으로 예수 재림 이전까지 예배를 드릴 모든 교회와도 하나를 이룬다. 둘째는 <사도신경>이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모든 기독교 교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 영생을 믿습니다.” 이 문장에서 주어가 일인칭 복수인 우리가 아니라 일인칭 단수인 나는이라는 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로마 교회에서 세례 받을 사람이 외워야 할 교리문답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1항목은 하나님, 2항목은 예수 그리스도, 3항목은 성령이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성령에 관한 항목이다.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사죄와 몸의 부활과 영생은 성령 항목에 포함된다. 교회에 직접 해당되는 문구는 거룩한 공교회.

거룩한 공교회라는 우리말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우리말로는 두 단어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세 단어로 되어 있다. 라틴어로 sanctam Ecclesiam catholicam이다. 영어 번역으로는 the holy catholic Church이다. 어떤 복음주의 계통 교회는 the holy Christian Church로 고쳐 표현하기도 하는데, catholic이라는 단어가 개신교회의 입장에서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은 원래 라틴어와 영어를 따라서 거룩한 공교회라고 했다. ‘공교회에서 공(catholicam)은 함께한다는 뜻의 공()이 아니라 공변되고 공적이라는 뜻의 공()이다. 즉 교회가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2-4세기의 위대한 교부들이 교회를 신학적으로 이렇게 규정했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의 안목이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고 거시적이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을 신앙의 뿌리로 여기는 오늘 대한민국 교회는 실제로 교회의 이런 전통과 본질에 충실한가? 오히려 구태의연하고 비열한 이 시대정신에만 민감하게 부응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거룩한 공교회

우선 거룩한 공교회라는 표현에서 거룩하다는 말을 보자. 그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다. 어떻게 구별되는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차원이다. 불가시적 교회는 이미종말론적으로 완성된 교회다. 이미 승리한 교회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실현된 교회다. 이런 불가시적 교회는 무상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된다. 교회의 이런 차원이 오늘의 현실 교회를 실제로 견인해가는 존재론적 근거다. 둘째는 보이는 교회의 차원이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가시적 교회는 아직완성되지 못했다. 여전히 세상에서 투쟁하는 교회다. 부활을 약속으로 받았을 뿐이지 아직 부활의 현실로 들어가지는 못한 채 나그네로서의 삶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에는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상처가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교회 역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으며, 구별되어야만 하고, 앞으로도 구별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 투쟁함으로써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이 투쟁은 단순히 세상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루터가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즉 항상 개혁하는 교회를 외친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되어야만 한다.

교회의 거룩성은 곧 공적 차원, 즉 보편성과 직결된다. 거룩한 교회는 보편적 교회이며, 보편적 교회(공교회)는 곧 거룩한 교회다. 교회의 거룩성은 보편성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래서 거룩한 공교회. 교회의 보편성은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첫째는 교회가 우주론적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단지 교회라는 범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의 주장은 교회 안에서만 진리로 통용되는 것에 머물지 말고 보편적 진리의 차원으로 나가야 한다. 교회의 주장을 세상이 늘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만 기독교의 주장이 진리로 판명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당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부정되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 진리라는 말은 기독교가 자폐적인 도그마티즘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교부들은 세상과의 보편 진리 논쟁을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과감하게 변증해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당시 철학과 진지하게 대화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신론과 인간론 부분에서 컸다. 제논으로 대표되는 스토아 철학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이 서두에서 제시한 로고스가 바로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오해는 말자. 기독교가 주변 철학에 무조건 종속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과의 보편적 진리 논쟁을 신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기독교가 보편적인 차원에서도 진리라는 사실을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 없이 기독교가 로마에 받아들여진 게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은 이런 공()적인 차원을 놓치고 개인의 종교적 욕망에 치중하는 사()적인 차원으로 떨어졌다.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졌다는 증거다. 안타까운 일이다.

둘째는 개별 교회만이 아니라 상위 조직인 노회와 총회 역시 교회라는 사실이다. 세계 교회의 상황에서 볼 때 보편적 교회의 기초 단위는 교구다. 교구를 하나의 교회로 보는 관점이다. 교단에 따라서 명칭은 다르다. 노회나 지방회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는 장로교회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까 노회로 부르겠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공교회 개념과 충돌하는 개교회주의다. 교회 조직과 운영 등이 개별 교회에 위임되어 있다. 여기에도 장점이 있긴 하다. 가장 큰 장점은 신자들이 교회에 대한 선한 주인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가면서 교회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애를 쓴다. 한국교회는 이런 열정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 민주주의도 이런 장점 중의 하나다. 가톨릭교회와 비교할 때 개신교회의 신자들은 발언권이 크다. 교회 제도도 어느 정도는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다. 이런 개교회주의가 교회의 생존이 위태로운 시기에는 나름으로 큰 역할을 감당했지만, 이제 생존보다는 본질에 치중해야 할 오늘날까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필자의 생각에 개교회주의는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골병들게 하는 신자유주의와 성격이 비슷하다.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폐단은 벌써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개인들의 경쟁력 제고(提高)를 통해서 인간이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이념이 신자유주의의 기초다. 개인들이 경쟁을 자유롭게 펼치도록 국가는 가능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와 국가, 기업과 기업, 개인과 개인도 자기 능력이 닿는 대로 서로 경쟁해야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도 막으면 안 된다. 그걸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위 갑을관계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은 다 문을 닫는 단계에 와 있다. 스펙을 쌓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고 있다. 오늘 한국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더 나가서 성공하기 위해서 정글의 법칙처럼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 교회끼리의 경쟁도 심각하다. 경쟁력이 없는 작은 교회는 도태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교회의 작동 메커니즘이 슈퍼마켓과 비슷하다. 이렇게 막장으로 내몰린 상태에서 목사들이 교회의 본질을 추구할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목회가 가능할까?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목회가 횡횡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이걸 바로 잡기에는 때가 늦었다. 개별 목회자가 정신 차리고 뚫고 나가기에는 교회 상황이 구조적으로 너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목사의 수급 문제만 해도 그렇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 상황에서 볼 때 신학대학교는 신학생 정원을 대폭 줄여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수요공급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이유가 뭔가? 남북통일을 대비해서 여분의 목사를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것인가, 해외 선교사를 배양하겠는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람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인가, 신학생 숫자를 줄이면 신학교 운영에 지장이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무대책인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이렇게 목사가 과잉 배출되면 역설적으로 괜찮은 목사는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벌어진 현상이지만 요즘 담임 목사 자리가 하나 나면 마치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청년들이 떼로 몰려들 듯이 목사들의 지원이 상상을 초월한다. 40-50 명의 목사가 지원하는 일은 예사다. 이 중에 한 명이 선택되고 나머지는 좌절감을 맛본다. 이런 좌절이 몇 번 반복되면 그 목사의 소명의식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패배주의에 물들고, 목회자의 영적인 품위마저 실종된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수많은 젊은 목사들이 대리기사나 택배기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거나, 목회 자리에서 밀려나 어딘가에서 방황하면서 각자도생의 길을 찾고 있다. 목사 수급 문제가 시급한데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한국교회에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교단 지도자들도 나 몰라라 하고, 신학대학교 교수들도 외면한다.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 앞에서 모두 입을 다물었다는 우화처럼, 오늘 대한민국 교회 지도자들은 이 문제 앞에서 침묵의 카르텔을 고수하고 있다. ‘거룩 공교회를 믿는다고 매주일 신앙고백을 드릴 자격이 없는 게 아닐는지.

 

사례비의 평준화

교회의 공교회성을 파괴하는 좀더 직접적인 사안은 목사 사례비의 불균형이다. 속된 표현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례비의 불균형 문제는 아직 공론화되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목사와 그들의 목회 행위에서 가장 예민한 주제다. 목사들이 대도시의 중대형 교회에 몰려드는 가장 큰 원인도 여기에 놓여 있다. 자녀 교육 역시 근본적으로는 사례비와 연동된다. 사례비의 불균형 문제는 교회 개혁의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킨다.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사례비의 불균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발상을 전환해보자. 1만 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와 1백 명 모이는 담임 목사의 연봉이 얼추 비슷해진다면, 조금 양보해서 두 배 이상 차이가 아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라.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 자리가 무조건 선망의 대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무시당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교회 일치의 기운이 실제로 살아나지 않겠는가. 물론 사례비의 평준화가 불러올 폐단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지 최저생활비에서 미치지 못하는 사례비를 받는 목사와 잘 나가는 기업체 CEO 못지않은 사례비를 받는 목사가 같은 노회, 같은 교단에 속해있다는 게 현재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과연 함께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건 위선이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경우에 사제들의 월급이 교구별로 동일하다. 수년 전에 들은 이야기로 인천교구의 사제들은 매달 150만원을 받는다. 지금은 약간이라도 늘어나지 않았겠는가. 다른 교구도 비슷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임 신부나 보좌 신부의 차이가 없고, 큰 성당과 작은 성당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게 담임 목사와 부목사, 그리고 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나는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이다. 가족이 없고 사제관의 비용을 교회가 감당하는 가톨릭교회의 경우를 우리와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제도가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개신교회의 역사 경험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톨릭교회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다만 교구에 속한 모든 신부들이 동일한 사례비를 받음으로써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공교회성을 유지한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례비의 적정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이거야 말로 개인적으로 생각이 다 다를 것이다. 목사는 경제적으로 약간 어렵게 사는 좋다거나, 목사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넉넉한 게 좋다고, 또는 신자들의 중간 수준이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관점을 말하겠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연봉 수준이 괜찮아 보인다. 요즘 초임 교사의 연봉은 월평균으로 계산해서 세후 200만 원 정도다. 호봉이 올라가면서 연봉도 늘어날 것이다. 목사들의 사례비도 이런 수준에서 정하고, 교회가 도시냐 시골이냐에 따라서, 그리고 교회의 크기에 따라서 특별 수당에 약간의 차이를 두면 된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의 물적 토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는다. 한국교회 정체의 총 헌금은 넘쳐나지만 그게 분배되지 않는 게 문제다. 전체 재정이 부족하면 하향평준화를 택하면 된다. 목사들이 함께 가난하게 사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노회나 총회에서 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대형 교회 목사들과 장로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아쉬운 게 없으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게 최선이다.

첫 걸음은 모든 교회가 목사 사례비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일이다. 담임 목사의 사례비가 얼마인지 모르는 교인들도 많을 것이다. 특히 부자교회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백주년 기념교회는 교회재정 출납 상황을 홈페이지에 세부항목까지 자세하게 올린다. 대형교회가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도 드믄 일이지만,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 사이의 사례비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도 드믄 일이다. 이런 교회가 백주년 기념교회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목사 사례비만이라도 정확하게 공개되면 터무니없이 많은 사례비를 받는 목사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이런 전통이 한국교회 전반으로 확산됨으로써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가 조금씩이나마 전향적으로 새로워지는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 (월간 목회, 2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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