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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소주

조회 수 2425 추천 수 0 2017.12.19 14:19:54

여차여차한 과정을 거쳐서 안동소주가 제 식탁 반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맛본 안동소주입니다. 이름하여 '안동소주 일품'입니다. 먼저 사진을 보세요. IMG_3326.JPG EXIF Viewer사진 크기1023x768

점심 식탁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붉은 글씨로 전통주라고 적혀 있네요. 보통 소주는 유리병에 담기는데 안동소주는 도자기 병에 담깁니다. 요즘 병에 담긴 안동소주도 나오기는 하나봅니다. 잔도 두개가 딸려나옵니다. 도자기 병은 흙으로 빚은 겁니다. 뜨거운 불에 달궈져야 합니다. 흙이 불을 만나면서 저런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 병에 지금 햇살이 비추는군요. 도자기 병 안에 들어 있는 액체 안동소주가 저 빛을 느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느낀다면 황홀할 겁니다. 저도 저 안에서 빛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흙과 물과 물레질과 도공의 땀과 장작과 불이 한데 어우러진 '사물'이 바로 저 도자기 병입니다. 예술적인 품위는 없겠지요. 대량 생산했을 테니까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거기에 다 압축되어 있는 겁니다. 저런 병 하나만 보더라도 지구에 있는 모든 '사물'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 안에 쌀과 효모와 불과 증기와 술 빚는 이의 혼이 작용해서 만들어진 안동소주가 담겨 있습니다. 참 대단한 사건이지요.

작은 잔에 안동소주를 따라서 딱 한 잔 마셨습니다. 어떻게 마셨는지, 그 맛이 어떤지를 설명하려면 따로 글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 설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증류의 과정을 상상하면서 마셨다고 하면 됩니다. 저 병에서 작은 잔으로 대략 50잔 정도 나올지, 60잔이 나올지 내가 계산해보지 않았습니다. 밥 한끼 먹을 때 한잔씩만 마실까 합니다. 잔을 가까이서 찍었는데, 초점에 흐려서 그 분위기가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일단 보십시요.

IMG_3327.JPG EXIF Viewer사진 크기1023x768

한 모금을 마실 때 겨우 혀를 적실 정도만 마셨습니다. 20모금을 마셨으니 한번에 얼마나 적게 마셨는지 아시겠지요. 맥주나 막걸리를 마실 때와 다르고, 일반 화학주인 소주를 마실 때와도 다릅니다. 양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질로 승부하니까요. 몇 방울만 입에 들어가도 입안 전체가 안동소주의 특별한 느낌으로 꽉차게 됩니다. 달지 않고, 쓰지 않고, 향이 짙지 않고, 향이 없지도 않고, 독해서 기침이 나오지도 않고, 약해서 심심하지도 않고, (과장해서) 하나님 품에 완전히 안겨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잔에 코를 들이밀어도 향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입에 들어가면 향을 느낍니다. 감촉으로 향을 느낀다는 사실이 거짓이 아닙니다. 소리꾼들은 소리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본다고 하거든요. 궁극적인 경험은 분산되는 게 아니라 통채로 하나가 됩니다. 저 액체를 겉으로만 보면 대수롭지 않습니다. 물처럼, 다른 일반 소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입술을 대는 순간에 전혀 다른 경험이 주어집니다. 그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저 액체 안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저 은폐된 세계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안동소주의 은폐된 맛은 이미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로운 관계를 놓치고 있다는 게 문제이겠지요. 이상, 안동소주 예찬이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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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복서겸파이터

December 19, 2017
*.142.23.114

술 드시는 목사님은 처음봅니다. ㅎㅎ 담에 얼굴뵙게 된다면 좋은 술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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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9, 2017
*.182.156.102

복서 님의 신앙생활 바운더리가 좁군요.

모르긴해도 예장합동이나 고신, 침례교 계통에서만

신앙생활을 하거나 목회자들과의 긴밀한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술 들고 저에게 올 필요는 없습니다.

안동소주 맛이 괜찮기에 인터넷으로 350밀리 6병을 신청했습니다.

아마 올 겨울은 저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회사에 회원 가입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성인 인증을 거치고 즉시 결재도 하느라 손품을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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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은성맘

December 19, 2017
*.165.46.3

한잔의 술 에서도 이렇게 ... 모든감각을 느끼시다니.. 소주를 그냥 쏟아붓는 모습만 티비에서 봐온 저로썬

위의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일상 어느것도 사사로운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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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9, 2017
*.182.156.102

은성맘 님이 정말 중요한 대목을 짚었습니다.

일상, 그 어느 것도 사사로운 것이 없는 거 맞습니다.

안동소주의 깊은 맛을 느낄 수만 있다면

커피나 차, 심지어 물 한 잔만이라도 깊이 느낄 수 있다면

더 이상 부러울 거는 없습니다.

그게 바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의 영성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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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신학공부

December 20, 2017
*.53.212.47

저는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너무 오래 고생을 해서 술을 입에

댈 엄두도 못 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한 번 설사 나면

화장실에 40분 정도 앉아 있어야 하거든요. 얼마나 힘든지 아시겠죠?

예전에 대구샘터교회에 있을 때 어느 집사님께서 저에게

맥주를 권하셨는데 "저는 술 안 마십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례하지 않게 정중하게 거절했는데 그 집사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저는 체질적으로

술, 담배 냄새만 맡아도 너무 역겹고 구토할 것 같아서 술, 담배

둘 다 관심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 그러면서도 술 마시는 분들은

술을 마실 때 어떤 느낌이실까 궁금하긴 합니다. 예전에 우연히

와인 한 잔 맛 본 적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무 탈이 없더군요. 

저는 어쩌다 한 번씩 와인 한 잔 정도 마시는 걸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맥주, 소주 등 기타 다른 술은 영원히(?) 관심 밖이고요. 이런 체질의 사람을

'고리타분한 신앙인'으로 매도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체질이 이런 걸 우짜겠습니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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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0, 2017
*.182.156.88

신학공부 님이 지병으로 고생하시는군요.

대구샘터교회에는 술꾼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처럼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들인 거지요.  ㅎㅎ

나는 안동소주 수준으로 조금씩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각각 삶의 방식이 다르니

신학공부 님의 그런 체질로 인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과민성 체질이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대림절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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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신학공부

December 20, 2017
*.53.210.204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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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쿠키

December 20, 2017
*.255.183.176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ㅎㅎ 빵 터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렇게 달콤~~한 이야기는 첨입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하시는군요.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며 읽으니 소주에 취하는게 아니라 생명의 영에 취하는듯 합니다.. 대림절을 보내며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사이에서, 그 신비함과 놀라움을 일상에서 놓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목사님, 정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찡한 이야기였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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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0, 2017
*.182.156.88

쿠키 님이 빵 터졌다가 찡하는 느낌을 받으셨군요.

빵과 찡은 우리 영혼의 활력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감동하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2017년이 저물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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