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본문: 고전 12:12-27(참조 엡 1:22, 1:18)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질문은 그 질문의 주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완료된 대답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 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의 교회다움을 찾아가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특히 교회가 위기에 떨어졌을 때 더 절실하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대하겠지만 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본질에 대한 질문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까 교회가 위기에 떨어지고, 위기에 떨어짐으로써 본질을 회복할 마음도 들지 않게 된다.

이미 많은 이들이 언급한 것이기에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글쓰기와 읽기의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 사태에 대한 최소한의 윤곽을 잡으려고 한다. 작년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적 해였다. 하필 이런 해에 예장 통합을 대표하는 명성교회에서 소위 부자 세습이 일어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의 후예인 한국의 개신교회가 종교개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을 한 것이다. 명성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습을 실천했고 그 과정 중인 교회도 있고 앞으로 그런 교회가 여전히 나올 것이다. 명성교회는 이런 모든 교회를 대표할 뿐이다. 한편으로 보면 교회를 향한 그들의 열심이 지나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벌거벗은 임금이라는 우화처럼 그들 모두가 펼친 하나의 블랙코미디다.

(이 글은 설교문이 아니다. 성경 해석도 아니다. 위에서 성경본문을 제시했지만 그걸 본격적으로 주석할 생각도 없다. 이 글은 일종의 신학 에세이다. 자유롭게 내 생각을 한국교회 이슈와 연결해서 서술하는 것이니 글의 형식에 상관없이 읽어주었으면 한다.)

명성교회 사건은 한국교회에 내재한 모든 질병 현상의 압축이다. 부자 세습은 하나의 결과이고, 더 근본에는 종교적 욕망이 기독교인의 영혼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명성교회가 부자 세습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김삼환 목사의 목회 리더십을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가 아들 김하나 목사라는 판단에 놓여 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으나 그 말은 명성교회가 계속 메가 처치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일 뿐이다. 교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키려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교회에 허락하신 은혜를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결단이라고 주장한다. 명성교회 밖에서의 주장과 안에서의 주장은 대립되기에 한쪽이 다른 쪽을 설득시키기 힘들다. 지금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해도 해결은 안 될 것이다. 5백 년 전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면벌부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나름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독일 지역에서 면벌부를 판매한 사람이 방법론적으로 너무 지나치게 몰아가서 그렇지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예장합동에 속한 일부 교역자들과 신학자들이 교회법과 신학의 차원에서 아무리 강력히 문제를 제기해도 명성교회는 자신들의 선택을 방어하기 위해서 끝까지 투쟁할 것이며, 그 결과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명성교회 사건이 한국교회에 공헌한 한 가지 사실은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던질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추하게 망가지는 방식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살리려고 한 것일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다양한 주제가 나온다. 교회에 관한 설명도 그 중의 하나다. 바울이 들은 전언에 따르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었다. 모든 교인들이 그렇게 나뉜 것은 아니고, 그런 특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고린도교회의 분열은 핵심적으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점과 은사를 중심으로 한 열광주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점에 자리한다. 똑같이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기면서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인들 사이에 차이점들이 부각된다. 그 차이가 확대되면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그게 축소되면 다양성 가운데서도 일치된 모습을 견지할 수 있다. 바울은 그 일치를 위해서 고전 12:12-27절에서 소위 몸-교회론을 제시했다.

 

교회의 공공성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교회는 몸과 비슷한 구조다. 몸은 지체로 구성된다. 지체가 없으면 몸도 없다. 모든 지체는 몸의 구성 요소다. 지체는 개별 기독교인이나 개()교회를 가리킨다. 개별 기독교인은 개별 기독교인으로만 남지 않고 전체로서 교회를 구성한다. 지체가 몸에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개별 기독교인도 전체 교회에서 분리될 수 없다. 스스로 분리한다면 교회 공동체의 생명으로부터도 분리된다. 1:22절과 골 1:18절에서 바울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머리라면 교회는 몸이다.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할 때 중요한 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몸의 유기성이다. 15,16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서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바울의 이런 진술을 신앙적인 덕담 정도로 여기면 안 된다. 교회의 본질을 실질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런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유기적 성격은 하나의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하나라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개별 교회를 뛰어넘어 전체 교회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론적 깊이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런 교회 속성이 바로 보편성이다. 이 보편성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로 교회 전통이 된 교회의 네 가지 속성, 즉 거룩성과 사도성과 단일성과 함께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이 속성은 서로 연관된다. 거룩하기에 사도적 전통에 서야 하며, 하나의 교회이기에 보편적이어야 한다. 사도적 전통에 근거해서 교회는 보편적이며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의 거룩성이다. 우리말 사도신경의 교회 항목에는 ‘...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영어 사도신경의 ‘the holy catholic church’(거룩한 카톨릭 교회)에 해당된다. 여기에 사용된 catholic은 종파로서의 로마가톨릭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독일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eine heilige, allgemeine Kirche’(하나의, 거룩한, 보편 교회)로 되어 있다. 정교회도 인정하는 니케아신조의 우리말 번역은 이렇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니케아 신조를 따르든지, 아니면 사도신경을 따르든지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에서 보편성, 즉 공공성은 필수다. 그걸 부정하면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교회의 공공성에 반대되는 개념은 한국교회에 숙명적으로 얽혀있는 개교회주의다. 교인들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만을 교회로 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 노골적으로 다른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나가는 교회와 다른 교회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교인들이 공동체로 모이는 구체적인 개별 교회는 물론 중요하다. 그런 개별 교회가 모여서 전체 교회가 된다. 개별 교회가 살아야 전체 교회도 살고, 개별 교회가 건강해야 전체 교회도 건강하다. 다리와 눈과 위장이 건강해야 몸 전체가 건강한 것과 같다. 한국교회 교인들만큼 자신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애착을 갖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교회 이름을 우리 교회로 짓는 경우도 있다. 교회가 종교적인 이익집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과 열정을 제고시키려는 목적일 것이다. 지난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개별 교회를 향한 신자들의 열정이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순기능을 근거로 개교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평생 목회자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필자 역시 목회 현장에서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열정을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점이다. 교회의 보편적 성격, 즉 공공성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게 왜 문제인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내 교회나 우리 교회가 잘 되기만 하면 다른 것은 관심 밖이다.

한국의 개교회주의는 분열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믿거나 말거나 150개 이상의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런 분열 현상으로 인해서 보편성이라는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었고 지금도 훼손되는 중이다. 그것이 명성교회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명성교회의 부자 세습에 대한 비판을 명성교회 신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교회에서는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을 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일반 기업체라고 한다면 이 말이 성립되지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교회라고 한다면 성립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 교회가 따로 있고 당신들 교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명성교회의 부자 세습 문제는 명성교회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예장통합의 모든 교회, 더 나아가서 한국의 모든 개신교회에 관계되기에 당사자가 아닌 다른 교회가 비판하는 건 당연하다. 일반 신자들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명성교회 담임 목사와 예장통합에 속한 지도자들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우리 후대 한국기독교 교회사학자는 그 책임을 단호하게 묻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심판하는 분이시니 교회 지도자들은 역사 앞에서 책임 있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교회의 단일성

본문 고전 12:14-27에서 제시된 몸으로서의 교회론이 가리키는 두 번째 관점은 가치의 역설적 성격이다. 22,23절은 다음과 같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면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바울의 설명은 사실적이다. 심장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 어떤 지체보다 소중하다. 간이나 허파도 약해보이지만 몸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지체다. 하찮아 보이는 손톱마저 몸 전체로 볼 때 다른 지체와 동일하게 중요하다. 바울은 교회도 이런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작은 교회를 약하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로, 큰 교회를 강하고 아름다운 지체로 봐도 된다. 바울의 교회론에 따르면 작은 교회를 오히려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바울의 교회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큰 교회는 선이고 작은 교회는 악이다.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지 못한 목사는 교회 정치에서 발언권도 없거나 약하다. 실제 노회와 총회의 정치는 대형교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다. 한 마디로 대형교회에 돈이 많기 때문이다.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라는 신을 섬기는 집단이 되고 말았다.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도 심각하다. 한국사회의 빈부격차 문제가 한국교회에 그대로 나타난다. 교파 별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대다수가 한국에 자리한다. 교파 불문하고 세계에서 가장 교회를 순위를 매기면 50개 중에 최소한 25개는 한국에 있을 것이다. 그걸 우리는 자랑한다. 동시에 한국 교회의 30%는 미자립이다. 대형교회는 한국의 재벌처럼 자신들의 몸집 불리기에 매진할 뿐이지 미자립교회 해결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다. 바울의 교회론에 비춰보면 한국교회는 비성서적이다. 자체적으로 개혁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바울은 왜 작은 교회, 약한 교회가 더 귀한다고 말하는가?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모두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작은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고, 큰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으로 비교한다면 큰 교회는 튼튼한 다리이고, 작은 교회는 발톱이다. 발톱이 병들었다면 발톱만이 아니라 다리도 똑같이 고통스럽다. 만약 다리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다리는 몸에 붙어 있는 게 아니다. 한국교회에는 연봉 2천만 원도 받지 못하는 목사가 있는 반면에 1억 원 이상을 받는 목사가 있다. 이런 상황은 죄악이다. 이런 상황을 아무런 불편 없이 받아들이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목사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대형교회가 보란듯이 해외선교사 파송에 천문학적인 헌금을 쓴다는 것은 위선, 아니면 신학적인 무지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작은 교회가 더 소중하다는 말을 공허한 신학 이론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분명한 관점이 없으면 교회의 본질은 훼손되며, 본질이 훼손되면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개교회주의가 한국교회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는지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너무 자주 언급되어 상투적인 것처럼 들리겠지만, 교회성장 만능주의가 지금 한국교회를 귀신처럼 음습하게 지배하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용납되고 성장하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목사는 자신의 영성을 돌볼 틈도 없이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에 내몰리고 있다. 이런 현상이 기독교 신앙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솔라 피데의 영성!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 프로그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향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그 갈망은 영혼의 자유에 대한 것이다. 22살의 젊은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가 되었다. 철저하게 금욕과 절제, 고도의 도덕성과 경건훈련을 통해서 영혼 구원에 이르려고 했으나 그런 노력이 가중될수록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강의를 하면서 전혀 새로운 영적인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야말로 큰 깨달음인 돈오(頓悟) 경험이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는 구절에서 루터는 영혼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크게 경험한 것이다.

오늘 목회 현장을 이 오직 믿음개념과 연관해서 설명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은 목회 성공, 교회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일치에 놓여 있다. 목사도 물론 그렇고 일반 신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목사와 신자들이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도 믿음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조심해야 한다. 교회 생활 자체를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교회 생활은 루터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가,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가 잘했다. 이런 교회 생활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에 자신의 영혼을 맡길 수 없었으며, 예수님도 유대교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늘날 최소한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의 근본만 확실하게 붙든다면 개교회주의를 넘어서 교회의 공공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는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에는, 아니 재림한 후에도 극복되기 어렵다. 이런 개념의 교회가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개교회주의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공공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을 나는 모른다. 어느 누구도 뾰족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방법은 다 알지만 한국교회에서는 그게 현실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예를 들면 같은 교단에 속한 목사들의 연봉을 호봉제로 운영하면 어떤가?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구분하지 말고, 그리고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를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 담임 목사에게는 수당을 좀더 제공할 수 있다. 교구 제도가 자리를 잡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인데,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여기에 따라오는 부작용도 없지 않겠지만, 사례비의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 한 교회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어렵기에 하는 말이다. 사례비를 많이 받는 교회에서는 앞으로도 부자 세습이 부단히 시도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이 여러 가지로 암담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카이로스)에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역설적이게도 교회의 힘이 크게 떨어지는 순간이 갱신과 회복의 순간이지 않겠는가. 교인 숫자가 지금보다 50% 이상 줄어든다면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교회의 교회다움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때가 멀지 않아 올 것이라는 조짐도 나타난다. 여기에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지성적인 젊은 기독교인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가 오래 된 교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노인들이기에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가면 어쩔 수 없이 교인이 대폭 준다는 사실이다. 교인 수의 감소를 불안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순간에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복음과 상황, 2018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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