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신이 인간이 된 이야기, 예수 안에 신과 인간이 공존하고 하늘과 땅이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를 살펴봤고, 오늘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이야기가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이 없잖아 있습니다. 먹고살기 바쁜 성도들의 생활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고, 그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단순하게 신앙생활 하면 되는데 예수 믿는 것을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서도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 힘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하면 좋지 않을까, 바르고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이야기, 믿음으로 살면 영생 복락을 얻는다는 이야기,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 고난에서 피할 길을 내신다는 이야기를 하면 더 큰 힘과 위로를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설교를 하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저와 여러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이나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펜을 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 하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예수만이 진짜 복음이니까 그 복음 들려주려고 선지자들을 부른 것이고, 바울을 부른 것이고, 저와 여러분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쉽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머리가 좀 복잡하더라도 참고 인내하면서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복음의 능력과 은혜의 역동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 충만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부활, 하나님이 약속한 최종적 실체

 

신약성경이 전하는 복음,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고 전한 복음은 한 마디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고 전한 복음의 전부였습니다. 바울 또한 부활의 복음을 믿고 전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부활의 삶이 없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할 만큼(고전15:14,19), 로마서 서두에서는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됐다고 말할 만큼 부활의 복음을 믿고 전했습니다(롬1:4).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왜 이렇게 부활의 소식에 집중했을까요?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왜 꼭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됐다고 했을까요? 사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소식 자체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최고의 계시이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죽음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죽음이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잉태로 말미암은 성육신이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됐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됐다고 했을까요? 왜 하나님의 아들 됨을 굳이 부활과 연결시켰을까요?

그것은 부활이 성육신이나 십자가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훨씬 더 풍성하고 온전하게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취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것의 궁극적 실체, 종말론적 실체가 예수의 부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약속

 

사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부터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고, 하나님이 하신 약속과 깊이 연루되어 있는 아들입니다(v.2).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예수님이 왜 성령으로 잉태되셨는지,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왜 부활했는지가 제대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한 죄 용서일까요? 단순한 화해일까요? 예정된 몇몇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세계 열방을 복 되게 하는 것,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세계 열방이 의의 통치를 받는 왕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창12:2-3).

 

이 약속은 다윗 왕 때에 좀 더 구체화됩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모든 원수를 무찌르고 온 나라가 평안해졌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는 백향목으로 만든 궁전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초라한 천막에 있는 것이 영 불편했습니다(삼하7:1-2).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의 마음을 꿰뚫어 아시고 나단 선지자에게 임하여 묻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어느 지파에게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짓지 않았다고 나무란 적이 있느냐?”(7:7) 그리고는 생뚱맞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다윗)를 위해 집을 짓고,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고,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7:11-13,16). 참으로 의표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첫째, 다윗과 같은 왕을 나 여호와가 세울 것이다. 둘째, 내가 세운 왕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다. 셋째, 나 여호와의 아들이 그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시편 2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이 시온에 세우신 왕에 대한 노래입니다. 시인은 2절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이 메시아는 6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 즉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운 왕’이라고 언급됩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낳은 아들’이라고 언급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이방 나라들을 유업으로 줄 것이고, 그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8절). 이방 나라들을 질그릇 깨뜨리듯 깨뜨려 부술 것이라고 말합니다(9절).

여기서 말하는 것도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세상의 군왕들과 군주들이 음모를 꾸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자를 대적한다. 둘째, 하나님이 시온에 왕을 세우는데 그 왕이 이방 나라들을 쳐부술 것이고, 그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셋째, 그 왕은 나 여호와의 아들이다.

이처럼 시편 2편이나 사무엘하 7장이나 똑같은 걸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과 같은 왕을 세우겠다. 하나님께서 세운 왕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약속한 것도 그거였고, 다윗 왕에게 약속한 것도 그거였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요엘과 에스겔과 다니엘 선지자에게 약속한 것도 그거였습니다.

 

약속한 아들의 성육신

 

이처럼 이스라엘은 세계 열방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선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현실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로 이스라엘은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고, 북이스라엘은 얼마 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 유다는 이방 제국의 지배를 쉼 없이 받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벨론의 지배를 받았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헬라의 지배를 받았고,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것이 BC 721년이니까 700년 이상을 힘 센 제국들의 압제 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왕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에게 절망하고 더 이상 약속을 기다리지 않을 것 같은데 유대인들은 시편을 노래하고 선지자들의 외침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약속한 왕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 영원히 다스리는 왕, 이방나라들을 철장으로 깨뜨릴 왕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이 약속한 왕이 오기를 간절히 열망하던 때에 성육신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육신한 예수를 보고도 그가 하나님이 약속한 왕이요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열망하며 기다리던 왕이 왔는데도 그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가 육신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즉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몸을 가진 자가 어떻게 온 세상을 다스리겠습니까? 이내 곧 죽음에 잡아먹힐 몸을 가진 자가 어떻게 영원히 다스리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시편 2편이 노래한 왕이 되려면 적어도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몸이어야 합니다. 죽음에 잡아먹히지 않는 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 세상에 편재하며 온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영원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그런 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육체 안에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예수의 권세와 능력이 여느 선지자들과 같지 않다는 낌새는 챘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그리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부활의 이면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몸으로, 죽음에 잡아먹히지 않는 몸으로 부활했습니다. 부활을 말할 때마다 항상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한 마디로 죽음을 죽인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짓밟아 무너뜨린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 이전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몸, 즉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몸, 죽음에 잡아먹히지 않는 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권세는 죽음입니다. 이 세상을 살펴보십시오. 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모든 권세는 죽이는 힘에서 나옵니다. 중국의 마오쩌뚱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는데 세상의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한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정말 죽이는 힘에서 나옵니다. 죽이는 힘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로마의 평화도 죽이는 힘에서 나왔고, 미국의 평화도 죽이는 힘에서 나옵니다. 북한이 그동안 굶주려가면서도 핵무기 개발에 매진한 것 또한 미국과 대등한 협상을 하려면 미국에 버금가는 죽이는 힘을 가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옳습니다. 죽이는 힘이야말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권세입니다. 로마 황제도 이 권세로 세상을 지배했고, 이 권세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지금 미국의 대통령도 이 권세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대기업의 회장이나 작은 가게의 사장도 사원들의 밥줄을 끊을 수 있는 권세로 아랫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예수님도 이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의 권세에 짓밟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3일 만에 부활시켰습니다. 예수를 집어삼킨 죽음을 죽이고 다시는 죽이는 권세에 짓밟히지 않는 생명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를 집어삼킨 죽음의 권세를 깨뜨려 부순 것이고, 예수를 죽인 로마 황제의 권세(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권세, 최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궤멸시킨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할 수 없도록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 무저갱에 가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를 심판한 자들을 하나님이 역심판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 애굽(이집트)은 단지 애굽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 표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로마는 단지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온 세상을 가리키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로마 황제에 의해 처형된 것은 단지 로마 황제에 의해 처형당한 게 아닙니다. 단지 로마 병정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은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의 군왕들에게 처형당한 것이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처형한 자들을 하나님이 역심판한 것 또한 단지 저들만을 역심판한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역심판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오만과 악한 권세를 질그릇 깨뜨리듯 깨뜨려 부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숨겨진 이면이자 근원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부활이 아니에요. 예수를 심판한 세상 권세를 하나님이 역심판한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세상 권세를 하나님이 질그릇 깨뜨리듯 깨뜨려 부순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현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예수가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역심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죽음의 권세가 활개치고 있습니다. 돈의 권세, 어둠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힘 센 놈이 큰 소리 치며 온갖 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폄하하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그만 하라고 귀를 막습니다.

그러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엄연한 사실이자 진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만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고 오묘합니다. 솔직히 눈에 보이는 것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사실과 진실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성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확인되거나 증명되지 않습니다. 근원 진실일수록 그렇고, 하나님의 행하심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의 성육신과 부활은 사람이 행한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가 무너진 것, 로마 황제의 권세와 세상 군왕들의 권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 또한 사람이 행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지도 않고 증명되지도 않고 이성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 다윗에게 약속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역사 속에서 구체적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투사가 아닙니다. 비현실적인 공상과학이 아닙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육신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지극히 높이셔서(부활과 승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빌2:8-11).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시편 2편이 노래한 그 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 왕에게 약속한 그 왕, 선지자들이 예고한 그 왕, 땅 끝까지 다스릴 그 왕,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아들인 그 왕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자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증거가 바울을 통한 이방 전도입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교회도 명백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미 세상의 심장부인 로마까지 들어갔습니다(v.6). 2천년이 지난 지금은 극동의 작은 나라인 한반도에도 복음이 들어왔고, 세계 곳곳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다윗과 같은 왕을 나 여호와가 세울 것이다. 둘째, 내가 세운 왕의 나라가 땅 끝까지 다스릴 것이고, 그 나라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셋째, 그 나라의 왕은 나 여호와의 아들일 것이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 예수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아들은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은 아들을 부활시킴으로써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하나님이 세운 왕이요 땅 끝까지 다스리는 왕이요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나님 스스로 확인 도장을 꽝 찍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됐다는 하나님의 확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시편 2편이 노래한 그 왕이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요엘과 에스겔과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 약속한 그 왕이라는 것, 온 세상을 다스릴 그 왕, 세상의 군왕들을 질그릇 깨뜨리듯 깨뜨려 부수고 영원히 다스릴 그 왕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성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증거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미국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돈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고, 악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확증한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온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시면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깊은 연민을 갖고 바라보시며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흔들려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명예를 걸고 보장한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과 진실 위에 여러분의 인생의 집을 지으십시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강둑이 무너지고 바람이 불어도 이 사실과 진실 위에 지은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마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