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편지라는 걸 거의 쓰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전화로 또 SNS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형식을 갖춘 편지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편지가 멀리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자주 편지를 썼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편지를 종종 썼습니다. 편지를 쓸 때는 보통 상대방에게 인사말을 먼저 건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 무더위가 극성인데 댁내 두루 평안하신지요?”라고 인사말을 건넨 후에 용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나마 먼저 말하고 난 후에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사랑이 낳은 새로운 피조물

 

바울이 건넨 인사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v.7). 바울은 “건강하기를 원한다”, “하는 일이 잘 되기를 원한다”고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 그렇습니다.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복 받은 자입니다. 구원 받은 자입니다. 진리에 눈 뜬 자입니다. 회심한 자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이전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있다’는 이 인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근원 인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구원받은 자’라는 인식을 먹고 살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자’라는 인식을 먹고 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 자’라는 인식을 먹고 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불렀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것 같고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처럼 완고하고, 사람처럼 자기 안에 갇힌 존재가 없습니다. 사람처럼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최우선순위는 항상 자기 자신입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사랑이 많고 긍휼이 많은 사람이라도 최우선순위는 항상 자기 자신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갇힌 자폐적 존재이고, 철저하게 자기를 섬기는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은 절대 순순히 예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보통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엄청난 이변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것을 다 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자기를 섬기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자기 이익(유익)을 위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의 영생복락을 얻는다고 하고,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지켜주신다고 하니까 그런 복을 받기 위해 예수 믿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 앞에 무릎 꿇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천국의 영생복락을 얻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내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이지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외형적인 기독교인일 뿐이지 내면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닌 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까요? 진정한 그리스도인, 내면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절대 탄생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훌륭한 도덕인, 훌륭한 종교인, 훌륭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탄생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탄생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 앞에 무릎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 앞에 감사의 무릎을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없이 완고하고 어리석고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자기를 섬기는 우리가 주일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예수 앞에 감사의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재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복을 받은 자이기 이전에, 구원 받은 자이기 이전에, 진리에 눈 뜬 자이기 이전에, 회심한 자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 보았습니다(마3:17). 바울 또한 자기를 예수의 종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를 알고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당시의 로마는 인구가 백만 명 정도였다고 하고, 예수 믿는 자들은 100여명 정도였으리라고 추정함)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v.7)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아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아인식의 핵심이자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증거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 하는 것을 잘났냐 못났냐, 부유하냐 가난하냐로 판단하곤 합니다. 자기를 판단할 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나 거의 그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그런 것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부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가난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만사가 뒤틀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모든 것이 캄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예수 앞에 무릎 꿇느냐 꿇지 않느냐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눈이 뜨이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누가 설득하지 않아도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습니다. 당연히 억지로 꿇지 않습니다. 천국의 영생복락을 얻기 위해 꿇지 않습니다. 그냥 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더욱이 그분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냥 무릎 꿇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형편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형편이 궁색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투성이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실패를 거듭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막힘없는 성공가도를 달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처한 형편은 정말 제각각 달라요. 그런데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그분 앞에 무릎 꿇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설사 찢어지게 가난하고 온갖 시련이 끝없이 밀려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기도하는 것마다 놀랍게 응답이 이루어진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최고의 증거는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온갖 시련이 끝없이 밀려오는 현실 속에서도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눈 뜨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다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눈 뜬 자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어떤 형편에 처해도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있다는 근원 진실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인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인식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눈 뜬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다는 사랑받음의 인식에서 나옵니다. 감사도 사랑받음의 인식에서 나오고, 헌신도 사랑받음의 인식에서 나오고, 순종도 사랑받음의 인식에서 나오고, 믿음의 신실함도 사랑받음의 인식에서 나오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음의 인식에서 나옵니다.

바울의 삶을 들여다봅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로마에 가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로마에 가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허심탄회하게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어떤 곳입니까? 로마는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황제의 권력 중심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의 중심지입니다. 예수와 로마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로마에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퍼붓고 침을 뱉어야 마땅하지 가고 싶어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보고 싶어 했을 뿐만 아니라 간절히 기도하며 여러 번 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바울은 왜 그토록 간절히 로마에 가려 했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다.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롬1:11-15). 절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내용은 사실상 같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로마에 있는 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니까 보고 싶었던 것이고, 사랑하니까 소중한 복음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이름 한 번 불러본 적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니까 그토록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읍시다. 로마를 향한 이 열정과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인류애가 뜨거워서였을까요?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감이 뜨거워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것이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사랑받을 자격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저주받아 마땅한데, 그런 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면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 또한 사명감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것이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2박3일 동안 여행예배를 다녀왔습니다. 동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창의 백운산 자락으로 여행예배를 다녀왔습니다. 함께 머물렀던 백운산장이 참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펜션 같지 않고 가정 같아서 한 열흘 이대로 같이 지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장소 때문에 좋았던 건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라서 즐겁고 행복했던 겁니다. 사랑하니까 함께 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고, 사랑하니까 좀 더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던 것이고, 사랑하니까 좀 더 많은 얘기와 맛있는 것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각자 필요한 것을 분담하여 성심성의껏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원하여 수고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모든 선행의 근원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진실로 온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낳은 피조물입니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나무도, 꽃도, 짐승도, 곤충도, 벌레도, 사람도 다 하나님의 사랑이 낳은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낳은 매우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이전의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되지 않는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고, 태초의 창조를 넘어서는 위대한 창조, 종말론적 창조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빚을 수 있는 최상의 결정체, 최후의 결정체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여전히 어둡고 좀스럽고 자폐적이고 허접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빚어낸 최상의 결정체요 최후의 결정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고, 하늘을 두루마기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받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출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 의지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다는 인식이 깊을수록 감사가 깊어지고, 헌신이 깊어지고, 순종이 깊어지고, 신앙의 신실함이 깊어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깊어집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랑받음을 아는 것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받음의 인식이 희미하면 희미하고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사랑받음의 인식이 명확하고 깊으면 보다 선명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십시오. 세상살이의 번잡함에 쫓기거나 휘둘리지 마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라는 근원 진실에 머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