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인권이 존중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고,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 속에도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이 있습니다만 과거에 비해 인권이 존중받는 시대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권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 더 소중하고 위대한 가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존재와 삶은 권리이기 이전에 빚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홀로 생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부모인 너, 청소부인 너, 스승인 너, 친구인 너, 옷 만드는 너, 영화를 제작하는 너, 농사를 짓는 너, 판매원인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어디 너뿐입니까. 하늘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벌이 있고, 호랑이가 있고, 태양이 있고, 달과 별이 있고, 지구가 있고, 바람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빚진 자로소이다

 

여기 빚 안지고 살아가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순전히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산다는 것은 빚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다 빚이에요. 숨 쉬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빚이고, 보는 것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빚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몇 년 전에 지금은 천재 한 사람이 수만 명,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시대라고 했는데, 설사 한 사람이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주는 것이 하나라면 받는 것은 아흔 아홉입니다. 어떤 천재도, 어떤 능력자도 남에게 빚지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아니,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모든 생명, 모든 인간은 빚짐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고, 빚짐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빚진 자입니다. 그것도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타인에게 빚진 자이고, 세상만물에 빚진 자이고, 창조주 하나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은 권리이기 이전에 빚입니다. 권리이기 이전에 빚이에요. 이것이 존재와 삶의 근원 진실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근원 진실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빚진 자라는 걸 깨우쳤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진 자입니다.”(v.14) , 만인에게 빚진 자라는 것이 바울의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자기 인식은 정반대입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빚진 자라는 채무의식에는 눈을 감고 권리의식에만 눈을 부릅뜬 채 삽니다. 채무의식은 없고 권리의식으로만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권리와 너의 권리가 곳곳에서 충돌합니다. 갑과 을이 충돌하고, 을과 을이 충돌합니다. 시장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인권을 교묘하게 짓밟습니다. 물론 인권은 중요합니다. 인권은 보호받고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우리의 인권의식은 더 깊어지고 성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권리의식에만 눈을 부릅뜨면 서로가 자기 권리 찾겠다고 아우성치게 되고,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게 되고, 그래서 사는 게 팍팍하게 됩니다. 삶이 온통 지옥이 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도 바로 권리의식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라는 말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권리가 너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네 권리를 제한 없이 사용해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권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권리의식을 추동한 겁니다(3:5). 하나님은 이미 최상의 권리를 선물했는데 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령을 들어, 하나님이 인간의 권리를 제한한 것인 양 살짝 비튼 다음 하나님이 제한한 권리를 제한 없이 사용하라고 꼬드긴 겁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출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죄의 뿌리를 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죄의 뿌리는 악이 아닙니다. 죄의 뿌리는 선물의식 없는 권리의식입니다. 인간의 죄악을 깊이 살펴보십시오. 모든 죄가 선물의식 없는 권리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권리의식이 선물의식을 앞지르는데서 모든 죄악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도 선물의식 없는 권리의식에서 비롯됐습니다(3:7).

복음은 바로 이 문제와 연결돼 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선물의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복음입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선물의식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구원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빚진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나는 빚진 자입니다. 몇몇 사람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입니다. 헬라인에게도, 로마인에게도, 어리석은 자에게도, 지혜로운 자에게도 빚진 자입니다.”(v.14) 바울이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복음에 빚진 자라는 자기 인식 때문이었습니다(v.15). 그리고 또 하나, 바울이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그토록 원한 것은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었습니다(v.16).

 

세상에 들끓는 구원의 소식

 

물론 세상에는 구원의 소식이 들끓습니다. 시한부 종말론부터 남태평양의 피지 섬이 지상 최후의 낙원이라며 이주하는 것까지, 삿된 욕망에서 해방되는 것부터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까지, 죽으면 천당에 들어가는 것부터 세포의 노화를 막아 영원히 사는 것까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부터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세상까지,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부터 뜻밖의 행운으로 인생 역전이 일어나는 것까지 실로 다종다양한 구원의 소식이 들끓습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구원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정치, 과학, 예술, 문학, 종교, 섹스, 마약, 의술, 기술, 문화 등등 모든 인간의 활동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구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들끓는 이런저런 구원 소식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세상에 들끓는 구원 소식은 기껏해야 상대적 구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정적 구원, 부분적 구원, 세계 내 구원이라는 한계를 지닌 상대적 구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적 구원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 구원도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 같은 것은 새빨간 거짓이기 때문에 말할 가치가 없지만 삿된 욕망에서 해방되는 것, 세포노화를 지연시키는 것, 힘겨운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 정치를 민주화하는 것, 부의 편차를 줄이는 것, 가난과 무지에서 해방되는 것 등등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비록 잠정적 구원이라는 한계, 세계 내 구원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원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소식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이 모든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렇게 작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잠정적이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 물질적인 차원, 정치적인 차원, 문화적인 차원, 종교적인 차원, 윤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것보다도 더 위대하고 더 근본적이고 더 결정적이고 더 궁극적인 변화와 관련된 그 무엇입니다. 피조세계 전체의 체질이 새로워지는 종말론적 변화와 관련된 그 무엇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땅이 만나고 통합되는 것과 관련된 그 무엇입니다(1:10).

 

그렇다면 그 무엇이 무엇일까요? 두 말할 것 없이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한 바로 그 생명이 구원이고, 그 생명을 사는 것이 구원이고, 그로 말미암아 펼쳐진 부활의 세계가 구원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이 구원이고, 예수에게 일어난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이 예수를 믿는 자 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에게 일어난 일이 오늘 예수 믿는 자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른 것은 일체 구원이 아니에요. 아무리 기상천외하고 천지가 개벽한다 하더라도 다른 것은 일체 구원이 아니고, 오직 이천 년 전 예수에게 일어난 일이 오늘 예수를 믿는 자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구원입니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 구원입니다(6:4-5).

하나님의 복음은 이처럼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한 후 기막힌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v.17) ! 이 말은 정말 구원의 핵심을 꿰뚫는 말입니다. 구원을 설명한 말 중에 가장 탁월하고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고, 하나님의 구원과 여타 구원의 차이를 가장 명증하게 드러낸 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 짧은 한 마디에 기독교의 생사가 달려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이 한 마디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요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한 말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일까요?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말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세 갈래 관점으로 나뉩니다. 법적인 측면에서 보는 관점,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는 관점, 언약적인 측면에서 보는 관점, 이렇게 세 갈래 관점으로 나뉩니다. 각각의 관점을 아주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법적인 측면에서 의는 정의(justice)입니다.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 공정하게 판결하는 것, 법에 부합하게 행동하는 것, 법적으로 옳다는 판정을 받은 것 등등이 법적인 의, 즉 정의입니다. 이 관점에서 바울의 말을 해석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최고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의는 성품으로서의 의(righteousness)입니다. 항상 바르고 옳은 것만을 추구하는 것, 품행이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것, 악과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것,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의롭게 행하는 것 등등이 도덕적인 의에 해당합니다. 이 관점에서 바울의 말을 해석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은 본질상 의로우신 분이시며 복음에는 그분의 의로움이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뜻이 됩니다.

언약적인 측면에서 의는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으로서의 의(faithfulness)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변함없이 부부의 도리에 충실한 것, 한 번 약속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키는 것,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지 않고 항상 관계에 충실한 것 등등이 언약적인 의에 해당합니다. 이 관점에서 바울의 말을 해석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다. 인간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변함없이 신실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 셋 중에 무엇이 바울의 관점일까요? 법적인 관점일까요, 도덕적인 관점일까요, 언약적인 관점일까요? 언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했다고 봐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복음 속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을 포함해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등을 돌렸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변함없이 신실하셨다는 사실이 복음 속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3장까지의 구조를 보면 이 사실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18절부터 320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불의에 대하여 작심한 듯 세세하게 고발합니다. 인간의 불의에 대하여 가감 없이 고발한 후에 321절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의를 꺼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여기서 바울이 고발한 것은 인간의 도덕적인 불의가 아닙니다. 법적인 불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불의를 고발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하기는커녕 마음이 어두워져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짐승이나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1:21-23),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다(1:25),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1:28),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3:10-11),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세세하게 인간의 신실하지 않음을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발을 하는 바로 앞 절(1:17)과 뒷 절(3:21)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구성이라고 봐야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글을 구성한 것은 인간의 신실하지 않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대비시키기 위한 전략이라고 봐야하고, 인간의 신실하지 않음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포위하듯 감싸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또한 법적인 성격의 의(justice)나 도덕적인 성격의 의(righteousness)라기보다는 언약적인 성격의 의(faithfulness)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앞으로 로마서를 읽어가다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 어떻게 신실하신지가 더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자기 믿음을 믿지 마라

 

결국 복음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잊지 않으셨다, 창조주는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칼 바르트. 로마서. 165).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도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세상의 어떤 방해 공작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믿음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자기 믿음에 집착하는 것을 봅니다. 구원이 마치 자기 믿음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믿음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 믿음을 믿지 마십시오. 자기 믿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믿을만한 게 못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영원히 신실할 수 없어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믿음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믿음을 믿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참된 안식, 궁극적인 안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야말로 궁극적 안식의 근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