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과: 법을 넘어서     (7:1-25)
          

기독교인의 실존(1-6)
로마서 전체는 상당히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일상적인 예를 도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남편에게 법적으로 묶여있지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묶인다느니, 벗어난다느니 하는 바울의 표현이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못마땅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바울의 관심은 인간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이나 분석이 아니라 종교적 이해와 해석에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문제삼을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바울은 지금 '법을 아는 사람들'(1절)에게 그 법의 본질을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부 사이의 법 문제를 거론한 것은 적절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바는 기독교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6장에서 언급한 세례의 의미를 여기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사람인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더 이상 죄를 규정함으로써 그것을 인식하게 하는 율법이 효력을 미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대신 기독교인은 이제 '영의 새로운 것'(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법의 지배를 받는 삶이 곧 '육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전에 우리가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공동번역). 우리가 바울의 이런 표현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먹고 마시며 아기를 낳는 등의 이런 일련의 삶을 바울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런 육적인 생활이라는 것을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설명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남편과의 법적인 의무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 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욕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성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헬라어를 자세하게 살펴보지 못했습니다만 '탐욕' 정도로 이해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려는 바는 율법에 묶인 삶은 우리를 구원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원래 법은 인간 개인과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조치였는데, 오히려 그것이 인간 삶을 훼손시켰다고 보았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계 기독교인들과 로마계 기독교인들은 아마 '법'(노모스)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나 로마의 법은 인류의 정신 문명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자랑거리였던 그 법을 가리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논리의 정당성을 7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단락으로 들어가기 전에 7장 전체의 결론이라 할 수도 있는, 또는 로마서 전체의 핵심이랄 수도 있는 한 구절을 잠시 검토하는 게 좋겠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제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 기독교인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로워진 아내처럼 자신의 법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의 힘인 성령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삶입니다.

율법의 기능(7-12)
바울은 앞서 설명한대로 5절에서 율법 때문에 우리가 욕정에 사로잡히고, 따라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단언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바울은 다시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죄냐?"(7절). 당연히 율법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율법이 죄일 수 있겠습니까?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합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후). 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하지도 않고 그것에 대한 인식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학생들은 학칙이 있기 때문에 학생으로서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세법이 있기 때문에 탈세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 그런 법이 없다면 무엇이 옳은지 깨달을 수 없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그런 법이 없어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의식이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법보다 훨씬 근본적이긴 합니다만 그 양심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종족에게는 일부다처가 정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딸이나 아내를 주어 그들과 동침하게 하는 일도 정당합니다. 또한 어린아이였을 때는 자기의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다가 사회생활을 통해서 그것을 배움으로써 윤리적 판단이 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간의 죄 인식에서는 양심보다 법이 훨씬 중심적으로 작동한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자기 관심으로서의 죄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게 한다면 도대체 율법의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에 대한 설명인 8절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여기서 계명은 율법과 거의 똑같은 뜻입니다. 굳이 구별한다면 율법은 좀 큰 틀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인 반면에, 계명은 약간 작은 틀에서 구체적인 규칙을 의미합니다. 모세오경은 율법(토라)이지만 십계명은 계명입니다.
바울은 계명(율법)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들이 탐욕에 빠지게 되었고 증언합니다. 원래 율법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결국 죄로 빠지게 했다는 이 바울의 주장이 논리적입니까? 여기서 루터는 '탐심'을 'jegliche Lust'라고 번역했습니다. '루스트'는 호기심, 흥미, 욕망 등의 뜻이 있습니다. 결국 계명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에 대한 관심, 흥미, 호기심을 발동시킨다는 뜻입니다. 성서는 일반 윤리에서도 이미 파렴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그런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문제삼는 바는 단순히 실정법이나 윤리와 풍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뿌리가 되는 인간의 자기 흥미, 자기 집중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율법의 본질과 인간의 자기 집중을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이 관점은 아주 정확한 인식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으로 세련된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최소한의 길이었던 율법이 어느 사이에 인간이 자기를 확신하고 자기를 성취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흡사 모범생이 자기 자신에게 흡족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대개의 교회 생활은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거의 모든 교회 일들이 신앙적으로 칭찬 받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각종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이나 헌금, 봉사 등, 모든 게 그렇게 굴러갑니다. 결국 계명을 지킴으로써 종교적인 모범생이 되려는 노력입니다. 이게 아무리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기에 대한 집중이며 집착이기 때문에 탐심입니다. 사실 이런 신앙의 깊이를 이해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들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지만 계명 중심의 교회 구조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상실해버립니다. 죽을 때까지 조금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조금이라도 모범적으로 살아야 하고,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이게 죄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아주 엄격하고 날카롭습니다.
바울의 생각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라는 진술을 다시 한번 더 봅시다. 모범적인 삶을 규정하는 법이 없다면, 그것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국 자기를 정당화하거나 더 나아가서 앞세우는 일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능시험의 결과에 의해서 자기의 운명이 갈라진다고 생각하니까 거기에 집착하게 되지만, 만약 시험과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고, 대신 은총과 사랑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바울의 인간론은 단지 책상머리에서 나온 관념이 아니라 자기 삶의 철저한 반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리새파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율법에 엄격했던 바울은, 그래서 율법을 상대화한 예수와 그 일당을 제거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바울은 그 율법의 내면적인 작동원리를 정확하게 파악한 이후에, 전혀 다른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율법과 복음이 계속해서 교차되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둘 사이의 어중간한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극단적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전에는 율법의 극단이었다면, 이제는 복음의 극단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좀더 따라가 봅시다.

죄의 작용
바울은 계명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어야 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10,12절). 14절에서도 역시 '율법은 신령한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그런데 죄가 그 계명을 이용해서 사람을 속이고 죽인다고 보았습니다(11절). 계명은 좋은 것이지만 죄가 그것을 이용해서 인간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죄의 실체를 인격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죄가 계명을 이용해서 사람을 속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만약에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계명을 지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명을 통해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죄의 속임수입니다. 자기에게 집중하게 함으로써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곧 죄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는 도저히 생명을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데 빠지는 것이니까 결국 속임수입니다. 바울은 죄가 그런 속임수를 통해서 우리를 죽인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진단을 정확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면 결국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허물어집니다. 이렇듯 생명과의 단절,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인격체로서의 죄(13-25)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게서 온 율법이 우리를 죽음에 빠뜨린다는 이 딜레마를 바울은 '죄론'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유명한 '나'(I) 문장을 통해서 그 죄의 실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설명하고 있는 죄는 어떤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실체입니다. 그 죄가 작동됨으로써 영적인 율법마저도 우리를 죽음의 상태로 몰고 갑니다.
우선 바울은 이런 죄의 작동 상태를 가리켜 우리가 죄의 종으로 '팔렸다'고 표현합니다(14). 팔렸다는 말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래의 주인은 하나님인데 죄에게 팔렸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 또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 여기서 '나'라는 표현은 바울 자신이기보다는 보편적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 기울어져 있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원하는 바의 선을 따라가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따라가는 것을 보니 결국 자기의 내부에 자기를 움직이려는 다른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를 속이고, 결국 죽게 하는 죄입니다.
바울의 이런 인간론은 오늘의 심층심리학이나 사회심리학에 비추어볼 때도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인드 콘트롤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지배하는 그 어떤 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경상도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집단적 무의식도 비슷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웬만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지역감정 같은 것에 휩쓸리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힘에 종속됩니다. 오늘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이념은 개인들을 철저하게 물질 중심적 사유방식에 묶어놓습니다. 개인소득이 1% 줄었다는 통계만 나와도 세상이 큰일 날 것처럼 두려워하고, 민심이 사나워집니다. 이렇듯 개인이든, 사회이든 그 대상을 노예로 삼는 힘을 성서는 죄라고 부르고, 때로는 귀신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절망
이런 죄, 또는 귀신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을 가리켜 바울은 이렇게 탄식조로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이 문장에 한정해서만 본다면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치우치는 현실을 보면 그런 절망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케제만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경건한 인간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고, 반항적이고, 도착되고, 상실된 피조물의 본성을 실증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교회 안팎, 양측으로부터 제기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런 바울의 증언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죄의 숙명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의 노예가 되어 있으니까 회개하고 양심을 되찾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이런 교회의 입장을 가리켜 일종의 노예근성으로 비판합니다. 양쪽 모두 한결같이 바울과 기독교의 인간론과 죄론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도덕성 회복 운동을 벌이는 게 아니며, 인간을 죄의 노예로 재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 현실을 명확하게 분석함으로써 훨씬 풍요로운 절대적 생명의 세계로 끌어내려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이 분석한 인간 현상이 옳다고 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경건성으로부터 시작해서 문화적 교양이나 학문을 비롯하여, 모든 정치와 예술이 인간만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만 집중하는 한, 더 정확히 말해서 자기 자신의 성취에만 집착하는 한 아무런 창조적인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른 분야는 접어두고 우리 종교 문제에 한정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기에게만 집중해 있기 때문에 싸우고 갈라지고 상처를 냅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없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자기 안에 한정되어 있는 한 허무한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허무는 곧 죽음입니다.
오늘 공부의 제목은 '법을 넘어서'였습니다.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법의 본질은 원래 선하고 영적인 것이지만 그것의 작용과 현상은 악하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용하는 탐욕이라는 힘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곧 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치부심 한다고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이 탐심이라는 죄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것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것과 아무런 상관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는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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