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생명과 평화(8:1-17)

                  
죽음의 법과 성령의 법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1). 바로 앞장에서 "나는 참 비참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던 바울이 이제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삶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성령의 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의 삶은 이런 차원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2) 법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단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법'과 '죄와 죽음의 법'을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를 아는 것으로, 또는 이 개념을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이런 개념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는 그 실질(實質)성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무슨 이유와 근거에서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줍니까?
여기서 말하는 '죄와 죽음의 법'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노력과 업적에 철저하게 묶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일종의 '에로스'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구현해보려는 모든 열망과 욕망이라 할 에로스가 절대화되면 거기서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억압됩니다. 예를 들어 인류 평등과 해방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갖고 20세기초에 등장한 사회주의가 겨우 70년을 채우고 사망선고를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수많은 지성인과 노동자들이 피를 뿌려가며 세운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자신들의 이념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사회주의라는 일종의 정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정체가 담아내야 할 훨씬 심원한 생명의 힘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그 어떤 사상이나 조직은 관료화(율법화)되며, 따라서 생명을 담아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런 경직성은 새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아두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은 터지게 마련입니다.
이에 비해서 '성령의 법'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지켜냅니다.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킨다는 말은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욕망과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냥 무기력하기 때문에 아무 의욕도 없다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생명을 생산해낼 수 없다는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은 자기의 계획과 실천을 절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일에 생명이 담기게 됩니다.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마음을 두기 때문에 자유롭기도 하고,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닫아두지 않는 사람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에게 마음을 열어두는 사람은 결국 생명의 세계에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 그렇게 활동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분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우리와 별 상관이 없는 분일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
바울은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5,6). 앞 단락에서 설명한 '죽음의 법'이 육체적인 것이며, '성령의 법'이 영적인 것입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막 8:35,36)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이런 맥락과 닿아있습니다.
바울이 보는 인간학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매우 구체적입니다. 심리학적인 차원에서도 역시 옳습니다.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대한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말처럼 사람은 어떤 마음을 먹고사는가에 따라서 모든 게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결과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정치적으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학교 총장이 교육의 본질보다는 그 운영에만 마음을 둔다면 결국 그는 교육자가 아니라 사업가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정치가이지만 정치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실제로 국민들의 평화로운 삶에 목적을 두고 그것만 생각한다면 그는 일반 정치가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리 매김될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온다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닙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리가 위태로워지면 결국 자기 자신이 흔들리게 됩니다. 대학을 기업처럼 생각하는 총장이 있다면 입학생이 줄어들거나 대학운영이 어려워질 때 두려워할 것입니다. 자신의 외모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자기의 외모가 시들어 가는 것과 더불어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육체적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영원한 게 아니기 때문에 로마서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 율법처럼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동네 꼬마들이 하루종일 놀다가 집에서 부르면 그 모든 것을 접어두고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그 마지막은 '없음'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바울은 율법주의적인 삶의 실체를 아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원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로 보이지만 율법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을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게 곧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인간을 살리는 길이었지만 인간이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왜곡되었습니다. 이렇듯 육체적인 것에만 마음을 쓰는 사람들은 사람을 초월하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순종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겉으로만 순종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 중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준엄한 기준으로 다가옵니다.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처하는 우리가 육체적인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만약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훨씬 마음이 쏠려 있다면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육체적인 것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개교회와 노회, 총회, 에큐메니칼 조직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갈등은 바로 이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
이에 비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첫째, 그 안에서 이미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으며(4), 둘째,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며(5), 셋째, 생명과 평화를 얻습니다(6).
율법의 요구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겉으로 율법을 따르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마음 속에서 이미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율법의 요구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역시 이것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절대적인 존재로 삼는 일이 그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를 목적으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기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그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이 사회가 정의로워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여러 인간적인 한계로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시험에 들리기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쓴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꾸로 영적인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무엇인 영적인 것일까요? 흡사 구름을 타고 다니듯 현실의 삶을 떠나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영이 우리를 초월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내재적 초월'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 현실, 이 역사에 내재해 있으면서 초월해 있다고 말입니다. 예컨대 '사랑'은 우리의 삶에 내재해 있으면서 또한 초월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끌어가는 힘이라는 점에서 내재해 있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월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연극 예매권을 사듯이 사랑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삶에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체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질문은 살아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마음을 써야 할 영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생명'에 관계된 것이라는 말 이외에는 아직 우리가 여기에 더 적합한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생명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우리가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우리는 여기서 막다른 골목으로 빠져들 염려가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이 생명이라고 한다면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냥 이렇게 먹고 숨쉬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 것 자체가 생명인지, 이런 외형적인 삶을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의 토대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으며, 오늘도 이 지구의 모든 생명을 끌어가신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명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 영적인 것, 생명, 그리고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근원이며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지게 될 것이며, 마찬가지로 생명이 무엇인지 밝혀질 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물학이나 철학도 나름대로 하나님과 생명을 밝혀내는 일에 일조를 합니다. 오늘의 생명공학이 생명의 신비를 상당히 밝혀내고 있으며, 현대 철학도 역시 그 과정에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신학(신앙)은 생명을 추구하는 주변의 학문과, 또는 그런 종교와 끊임없는 대화를 전개시켜야 합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하나님과 그 생명의 비밀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밖의 세계와 단절하게 된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과 생명이 밝혀지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존재가 스스로 드러낼 때 우리가 존재를 알 수 있다는 하이덱거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스스로는 드러낼 때 우리는 그 계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시를 인식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이미 선취된 계시 사건에 의해서 이 역사를 해석하면서 종말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여기서 바울은 왜 생명과 평화를 동격으로 놓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으로 말해서 생명은 형상이고 평화는 질료라는 뜻일까요? 이 문제는 잘 모르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또한 앞에서 생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으니까 평화와의 연관성만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은 몰라도 바울이 이렇게 중요한 대목에서 생명과 평화를 병렬시킨 것은 나름대로의 깊은 뜻이 있긴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생명의 세계를 맛본 사람은 평화를 얻는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불안하게 산다는 것은 생명과 끊겨져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흡사 홍수에 떠내려가듯이 생명의 근원과 단절되어 있으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구조 헬리콥터가 밧줄을 내려주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가 잡았다면 아직 육지로 옮겨지지는 않았어도 불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헬리콥터가 구조활동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확신할 수 있다면 생명을 건졌다는 생각으로 평안해지겠지요.
이런 점에서 평화는 생명과 깊숙이 연관됩니다. 만약 생명의 깊이를 알게 된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평화를 얻겠지만 사회적인 차원이나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역시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국제간의 끊임없는 분쟁은 그들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북문제도 역시 그렇습니다. 만약 북한이 자기들 체제가 보장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쓸데없는 위기를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 미국이 보이는 심리적 불안 증세도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평화의 삶을 보장합니다.

아빠, 아버지
이미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하신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평화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마가복음에도 나온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고유한 호칭을 다시 언급하면서 이 평화 문제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빠 호 파테르". 우리말의 발음으로도 거의 유사한 '아빠'는 아버지에 대한 히브리 사람들의 친근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빠 호 파테르'(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마음 속에 그런 '확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확신은 곧 성령의 작용입니다.
바울의 이런 주장에 좀 신비주의적인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인 세계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경험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데도 무조건 믿는다는 게 아니라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지만 절대적인 대상과의 조우에는 결국 믿음이라는 비약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쉬바이쩌의 사상을 '생명 경외'라고 하는데, 불가지론자들은 냉소적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생명을 경외할 게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것을 분석하고 이용하고 누리면 되지 경외할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생명은 신비이기 때문에 경외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인식하고 믿을 수는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지평에서 이 세계와 하나님은 새롭게 열립니다.
바울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상속자'(17)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17).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영광은 곧 생명의 리얼리티인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자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서 부활을 상속으로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상하고 잠정적인 생명 현상에 불과한 이 세상에 살지만 결국 우리는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성령의 작용으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안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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