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사도 바울의 조국 (9:1-5)

                
경계인(境界人) 사도 바울
바울은 8장31절-3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흡사 헬라 시대의 뛰어난 웅변가처럼 열정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편 다음, 오늘 본문에서 느닷없이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을 끌고 들어옵니다. 전체가 16장인 로마서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정확하게 후반이 시작되는 9장에서 이스라엘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따라잡기는 힘듭니다. 글의 흐름만 본다면 이미 8장으로 로마서를 끝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할말은 다 한 셈입니다. 아마 바울은 본인이 전하려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좀더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 1-8장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9-16장은 그것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이 적용의 단초는 곧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지난 삶을 감안한다면 그가 이 중요한 대목에서 '이스라엘'을 거론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이외에 다른 사도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들은 없습니다. "나는 내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3). 이렇게 절절한 심정을 담은 문장이 바로 앞서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8:39)라고 말한 사람의 것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일종의 과장법으로서 민족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긴 했지만 민족을 향한 정서적 농도라는 점에서 바울과 구별됩니다. 일반 사도들은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반면에 바울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토대인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벽하게 실천해나갔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의 종교적 특심은 그가 원시 기독교 공동체를 박멸하는 데 앞장섰다는 데에 잘 나타납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을 지킨 사람이고 예루살렘의 원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다마스커스까지 출장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인물이 갑자기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자기 민족을 향한 고민이 왜 없었겠습니까? 어떤 점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경계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은 당사자가 아닌 한 주변에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요즘 우리사회에 가장 큰 논란거리로 등장한 사람이 경계인으로 자처하는 송두율 교수입니다. 현재 독일의 뮌스터 대학교에서 사회학 관련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송 교수(59세)는 지난 9월22일 입국한 후 국가정보원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후 지금은 검찰에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노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했으며, 그 동안 혹시나 했던 대로 김철수라는 인물과도 동일 인물이고,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그를 초청한 단체에서도 약간 당혹해하는 눈치입니다. 한쪽에서는 송 교수를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대의 간첩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좀더 정확한 범죄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는 노무현 정부 이후 전개된 보수와 진보의 갈등 국면과 맞물려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한 여야간 정쟁도 역시 송 교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것입니다.
송 교수와 연관된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일까요? 구속 수사하라는 이들의 말처럼 그는 간첩인가요? 아니면 북한과 연계되긴 했지만 본인 스스로는 간첩으로 활동할 의지가 없었던 것일까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더 이상 말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남쪽이나 북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한민족 전체를 자기 삶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했던 한 지식인의 고뇌와 한계가 송 교수에게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할 뿐이다. 물론 그는 지난 유신시절을 거치면서 북한으로 경도되긴 했지만, 그래서 북한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살아왔겠지만 무조건 그쪽을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남한으로부터 배척 당한 처지에서 호의적으로 대우해주는 북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활동하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어쨌든지 요즘의 이런 세태가 우리의 미성숙을 드러내는 단면인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말씀과 직접 관계되지 않은 이야기가 길어진 것 같습니다.
다시 우리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 바울도 역시 유대와 기독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정체성과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극심한 정신적 아픔을 겪은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와 기독교 중간에 놓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만 믿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연민과 연대의 끈을 놓치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특권
바울은 4,5절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우월성을, 또는 특권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2)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 3) 하나님과 맺은 계약, 4) 율법, 5) 예배, 6) 하나님의 약속, 더 나아가 7) 훌륭한 선조를 두었으며, 8)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다고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단순한 한 민족이라기보다는 인류를 대표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계시하셨을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한(韓)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계시의 보편성이 설득력을 잃습니다. 로마서 1장19,20절에도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라고 진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계시의 보편성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율법과 예배와 약속이 구체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계시되었습니다. 이런 우주론적인 역사의 전모를 우리가 모두 밝혀낼 수는 없지만 소극적으로 이런 정도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냈지만 오직 이스라엘만 그것에 반응을 보인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특히 예언자들의 활동과 역사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세계에 훨씬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영적인 세계의 원리가 아닐까요?

그리스도를 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우월성에 대한 변증은 이제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사실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영원토록 찬양합시다"(5)고 외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자신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는데도 정작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역사에서 증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말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가 오신지 2천년이 지났습니다만 인류 역사에는 여전히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에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폭력을 행사합니다. 우리는 무죄한 사람들이 왜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지 아직 잘 모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구원의 증거들이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그 구원 사건이 '은폐'의 방식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사랑의 질서가 인류의 역사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런 역사는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기 때문에 실증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과 기독교는 구원론적 차원에서 선의의 경쟁, 또는 상부상조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담겨 있는 기다림이며, 그들의 메시야 대망은 바로 기독교의 그리스도 사건에서 현실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책임은?
여기서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책임을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찾는 것과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 책임은 빌라도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한 유럽의 역사는 이런 책임 공방에 근거한 반이스라엘 정서가 지배했습니다.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나치가 6백만 명의 유대인을 처형했습니다. 물론 히틀러의 광기가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확실한 근거 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싫어한 유럽인들의 정서가 간접적인 원인이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에 살거나 자기들만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유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돈 버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어한 것 같습니다. 쉐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수전노가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럽 사람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을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몰아붙였습니다.
요즘 팔레스틴 지역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이에 맞선 군사공격을 보면서 도대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인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지금 벌어지는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평화와 어긋나긴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스라엘과 기독교는 하나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명백합니다. 여전히 기다리는 그들의 메시아와 이미 오셨지만 다시 오실 우리의 메시아인 예수가 왜 동일한지를 해명하고 증명해야만 합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