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선택과 유기의 변증법 (9:6-33)
              

하나님의 약속
9장1-5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자신의 마음과 그 민족의 우월성을 비장한 어조로 서술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왜 실패했는가?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한 것인데, 그렇다면 원래 세워졌던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된 것인가? 바울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서 이런 질문에 대답합니다.
우선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에게만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창 21장 12절을 인용한 후에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정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8절).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에 얽힌 고대 사회의 가족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아마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자는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적자에 맞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이런 서자, 또는 적자이라는 가문 개념보다 '하나님의 약속'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형식적인(율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복음적인)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손이라야 실질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은 원래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둘째, 야곱과 에서입니다. 리브가가 임신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구약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는 인간의 선행과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말합니다. 이미 이런 사상은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말라기서 1장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2,13절).

하나님의 섭리
이런 주장은 옳습니까? 표면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이런 주장은 억지에 가깝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자기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바울이 19절에서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듯이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자체 모순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단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두 가지 대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사상은 숙명주의가 아닙니다. 만약에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성서의 가르침을 피상적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사상과 섭리사상을 이런 숙명주의와 일치시킴으로써 탈역사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현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1919년 삼일운동이 실패한 이후 점차 일종의 역사 초월주의에 흘러들었으며, 또한 1960년 대 중반 이후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극단적인 개인구원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사상에 근거하면서도 우리의 역사 의식을 투철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사상은 도덕주의와 인과응보사관을 극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12절). 여기에 상당히 미묘한 갈등이 있습니다. 성서는 자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합니다. 현실적으로도 신자들이 도덕과 윤리 면에서 세상에서 본을 보여야만 기독교의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윤리적 범주 그 이상의 세계를 말한다고 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그것 자체로 절대적인 토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공간적 한계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가치규범이 우리 인간 사회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도덕적 행위만으로는 존재와 생명의 신비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위에서 제시된 대답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모순이 모두 해명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논리로 끝나게 된다면 서로 다른 논란이 계속됩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사회학이나 역사학의 관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각주일 뿐이지 결국은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해야만 합니다. 즉 성서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이 역사를 해석할 때 작용하는 핵심 개념은 역사학과 사회학, 또는 인간학이 아니라 계시론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밝혀보려는 사실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14-18절에서 모세와 바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을 동정한다"(출 33:19). 바울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16절). 이어서 하나님이 바로에게 하신 말씀이 인용됩니다. "내가 너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너를 시켜서 내 힘을 드러내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출 9:16). 바울은 이 구절을 결론적으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하십니다"(18절).
바울이 여기서 전하려는 핵심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역사의 모순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틀에서 간단하게 해명해버리려는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모순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라는 일종의 신앙적 역사철학입니다. 선과 악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이 역사는 곧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계시입니다. 그게 현재 우리 눈에는 모순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언젠가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바울에 의하면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곧 그분의 '자비'입니다. 15절에 인용된 출애굽기의 말씀이 19-29절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옹이장이' 비유는 이미 이사야(29:16, 45:9)와 예레미야(18:6)가 언급한 것입니다. 질그릇이 옹이장이에게 자기를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게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도 읽기에 따라서 인간의 자유를 손상시키는 것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 로마서에 이르는 이 '옹이장이' 비유는 하나님의 난폭성을, 따라서 그것에 당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불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자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장 깨뜨려버려야 할 질그릇을 깨뜨리지 않고 받아주는 옹이장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옹이장이의 비유에서 우리는 성서의 독특한 역사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가장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만든 분이 인격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단지 자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질그릇은 나름대로의 쓰임새가 있습니다. 밥상에 오르든지 뒷간에 쓰이든지 그것은 옹이장이의 뜻에 따라서 결정되지만, 모든 질그릇이 필요 적절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그런 쓰임새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셋째, 옹이장이는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주셨습니다"(22절).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내는 힘입니다. 만약 그런 자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당장 죽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조건을 직관할 수 있다면 그 토대가 얼마나 부실한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접어두고, 생태계가 약간만 변하면 인간은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축이 삐끗해서 빙하기가 훨씬 빨리 시작되면 어떻게 될까요?
넷째, 나쁘게 쓰이는 질그릇까지 결국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성서의 역사 이해는 악까지 포함합니다. 악의 장본인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 악까지도 역시 자기의 자비를 나타내는 데 쓰십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역사관은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다섯째, '남은 자'들이 곧 옹이장이인 하나님이 만드신 '자비의 그릇'입니다. 바울은 결국 역사의 흐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은총
이런 점에서 바울의 역사관은 은총론과 동일한 지평에 속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역사가 선과 악의 대립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하나님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바울은 9장 초입에서 제기했던 이스라엘 문제를 30-33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바울은 이제 이방인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되었고, 거꾸로 이스라엘이 그 법을 찾지 못했다는 이 현실을 인정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32절). 이스라엘이 '믿음'이 아니라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은총이 아니라 업적에 의존했다는 말입니다. 질그릇 비유와 연결해서 설명하자면, 질그릇은 만들어진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기만 하면 옹이장이의 마음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술잔이 술잔 역할만이 아니라 밥그릇에다가 물그릇 역할까지 모두 하겠다고 설친다면, 그리고 그런 자기의 넘치는 역할을 통해서 옹이장이의 마음에 들겠다고 나선다면 결국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릇에 담긴 옹이장이의 자비를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주인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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