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구원의 보편성  (10:5-21)

                  
구약성서의 해석문제
로마서 10장에는 유달리 구약성서가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미 구약성서 중에서 율법서와 예언서가 정경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성문서를 포함한 모든 구약성서가 공식적으로 정경의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기원후 70년에 열렸던 얌니야 회의 때였습니다. 참고적으로 신약성서는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정경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왜 구약성서를 읽어야 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근본적인 긴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앞에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은 유대인들과 신약성서의 기독교인들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약성서를 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읽어야 한다거나, 또는 구약성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경전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문제가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교 학자들의 구약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우리의 구약해석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연루된 전반적인 사태를 이 자리에서 검토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두 가지 관점만 명확히 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한 가지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관계입니다.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형성된 신약성서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약성서를 그 바탕에 놓아야 합니다. 예컨대 현대의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도 역시 뉴턴의 기계적 역학이론을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열매이기 때문에 구약성서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즉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부분적으로 긴장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계시와 구원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지평에 속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가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인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긴장을 '알레고리칼'한 방식으로 해체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모든 구절이 바로 역사적 예수를 지칭하는 것처럼 비약시키지 말고 오히려 그런 긴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기독교가 진리 지향적인 공동체로 살아남기 위해서 훨씬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우리에게서의 근본문제는 모든 진리를 너무 성급하게 확인하려는 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놓아두어야만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라는 바울의 고백도 이런 차원입니다.

율법의 길과 믿음의 길
바울은 레위기와 신명기의 말씀들을 연이어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 율법의 길과 믿음으로써 얻는 길에서 선택을 잘못 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의 길은 인간의 노력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의 길은 인간의 노력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설명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기점으로 율법과 복음의 시대로 구분합니다만 바울은 이미 구약성서에 믿음을 통한 길이 주어졌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율법 시대가 따로 있고 복음 시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주신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할 뿐이지 실제로는 같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신명기 30:12-1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 말라.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가서 그 법을 가져다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율법의 행위와 복음의 믿음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다른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율법과 복음, 즉 행위와 존재를 이원론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주로 율법과 행위로 치우치거나, 또는 정반대로 무율법주의에 빠져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사람들은 어떤 리얼리티를 보이는 것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리얼리티도 여전히 그런 가시적인 율법에서 확인하려고만 합니다. 그런 종교적 행위를 강화시킴으로써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율법을 수행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위 '값싼 은혜'에 심취하게 됩니다. 힘든 일이지만 금욕적으로라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 업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나, 아니면 삶의 무게가 담기지 않은 신앙편이주의에 빠져있는 상태는 결코 건강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한결같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다른 방식이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만 합니다.

배타적 구원을 넘어서
율법과 복음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은 단지 인간의 노력에 무게를 둔 율법에 치우쳤다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율법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들의 구원도 역시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구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을 통한 구원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믿음을 통한 구원이 있다고 상당히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율법 구원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이라고 한다면 믿음 구원은 포용적이고 보편적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예수를 주(主)로 고백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욜 2:32).
여기서 '주님'이라는 단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롬 10: 9). 신약성서에서 '주'는 우선적으로, 원칙적으로 나사렛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오늘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를 '주'이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점에서 타종교와 구별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언해야 하며, 그것의 상대화와 투쟁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가 우리와 모든 인류의 주라는 사실의 내용을 충실하게 채워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던 한 유대인 남자가 자동적으로 '주'가 된 게 아니라 그가 그렇게 될만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록 타종교일지라도 그들에게도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주님'을 향한 기다림과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예컨대 불교의 정토진종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 신앙은 아미타의 도움으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합니다. 즉 그들에게는 아미타가 바로 '주님'입니다.

계시의 보편성
바울은 검사가 피고를 다루듯이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반론을 펼칠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한 길을 알려준 사람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구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는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반박합니다.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시편 19:4).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논리는 아주 명백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있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있다고 이미 로마서 2장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할 뿐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신앙은 일종의 밀교적 차원이 아니라 보편적 계시의 차원입니다. 즉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전하시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전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의 보편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보편적 특성은 바울만이 아니라 교부들에게도 여전히 지속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 사상을 과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의 하나님을 훨씬 풍부하게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주의 이후로 기독교는 이런 보편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매우 협소한 영역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과학과 사회, 역사 전반에 연결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개인의 심리나 도덕성 안으로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현상이 훨씬 심각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축복을 받아야되겠다는, 아주 이기적인 차원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온 땅'과 '땅 끝'에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고 사람들의 욕망만 우리의 신앙을 끌어가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묘(妙)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비판은 이사야를 인용한 말씀에서 최고조에 달합니다.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21절). 하나님이 기다리는 이스라엘은 거역하고 대신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이방인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사 65:1,2).
이게 바로 인간 역사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역사를 끌어가는 절묘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보다 훨씬 빨리 진리의 길에 들어설 수 있고, 이 결과로 인해서 잘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자신의 미련함을 깨달음으로써 다시 진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생각을 계속해서 뛰어넘는 역사가 곧 하나님의 활동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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