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몸으로 드리는 예배  (12:1-8)
                  

로마서 11장 마지막 단락에서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과거)이고 유지시키는 힘(현재)이고 목표(미래)라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기독교 사상의 우주론적 깊이를 그런 철학적 표현 방식으로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에 근거해서 바울은 이제 기독교인들의 예배가 단순히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삶 자체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권고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우선 몸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몸으로 드린다는 말은 초기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됩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서 몸까지 포함한 기독교인의 삶 전체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그리고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영혼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통전적 존재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도 로마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헬라의 영지주의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몸(소마)을 구성적인 요소로 생각했다는 말은 곧 그들이 거룩과 세속을 공간적인 차원에서 구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야만 거룩해지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 놓여 있는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거룩해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제 인간 삶의 종교적 영역과 일상이 일치됩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설화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구성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흙이며, 다른 하나는 영입니다. 흙은 인간이 자연의 소산물이라는 점을 가리키며, 영은 그것을 초월하는 인간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간혹 창조과학회에 속한 학자들이 진화론을 무조건 공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접근하고 그 근본 의미를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 문자적 의미도 놓쳐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성서의 증언은 곧 인간의 몸이 자연의 소산이라는 뜻입니다. 진화론이 말하려는 핵심도 역시 인간은 자연의 진화과정을 통해서 생성되었다는 이론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합니다. 다만 창조론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연적 속성 안에 '영'의 힘이 개입했습니다. 하나님의 '숨', 또는 '바람'을 의미하는 '루아흐'가 인간 내부에 투입됨으로써 이제 인간은 명실상부하게 살아있는 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재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자연을 초월하는 영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창조론과 진화론이 굳이 상대방을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몸)과 초월(영)이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인격
그런데 인간의 몸과 영은 어떻게 결합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개념적으로 그 두 요소를 구분할 뿐이지 실제로 구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떠난다고 말합니다만 죽음이 반드시 그 둘 사이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죽은 몸은 몸이라기보다는 단지 단백질 덩어리(사르크스)에 불과합니다. 영의 활동이 없으면 인간의 몸도 더 이상 인간의 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돼지의 몸이나 사람의 몸이 똑같이 단백질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주장하겠지만 분자와 세포구조가 비슷하다고 해서 무조건 똑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몸에 영이 작용함으로써, 또는 몸과 영이 결합됨으로써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동물과 인간이 이렇게 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지, 양적인 차이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입장이 상대방의 논리를 완전하게 극복할 만큼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런 논쟁은 '생명'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종말에 가서야 끝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근거해서 인간의 영이 어떻게 초월적인 생명현상인지 해명해나갈 뿐입니다.
인간의 몸과 영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습니다.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에서 몸을 분해해보았자 거기에서 영이 손에 잡히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몸과 영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서 어떤 식으로의 결합인지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생명은 신비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르는 방식의 몸과 영의 결합체가 곧 인간이며, 이런 성격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개념이 곧 '인격'입니다. 우리는 몸과 영이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인격이라고 부릅니다. 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인 영이 결합됨으로써 우리 모든 이들은 각자가 고유한 인격체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인격은 단지 영이나 몸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동시에 갖춘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의 몸은 곧 인격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일컫습니다. 단순히 예배 시간을 지키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기 인격 자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게 곧 '영적 예배'입니다.

마음
바울은 그런 영적인 예배를 2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마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서 '누스'의 번역입니다. 누스는 마음, 정신, 이성이라는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낙사고라스는 누스를 가리켜 물질보다 우월하고 물질에 운동, 형태, 생명을 부여하는 원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빌려서 '누스'를 새롭게 자리매김 함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성)이 종말론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 우리가 새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착한 마음을 갖고 착한 행동을 한다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이성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늘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자기의 삶을 확대시킬 수 있는가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참된 것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한 '절대의존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에 토대를 둡니다. 일견 기독교 신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무조건 믿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정이 상위로 작용할 것 같지만 사실상 초기 기독교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헬라철학에서 사용되던 용어인 '누스'를 빌려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옳고 그름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중요한 인식론적 토대로 삼았습니다. 교부들도 주변의 철학이나 사상들과 끊임없이 진리론 논쟁을 전개해왔는데, 그 논쟁에는 이성의 인식론적 토대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카리스마의 원리
바울은 신앙의 차원을 전체 삶의 영역으로 확대시킨 다음에 구체적인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의 삶은 은총론에서 해석됩니다. 자연의 소산인 몸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며, 영은 더 말할 나위 없이 그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은총은 다시 은사론(카리스마)으로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3절 후). 바로 여기에 카리스마의 본질과 원리가 다 포함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선 카리스마는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봉사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이 카리스마를 정당하게 사용하지 못할 위험이 늘 따라다닙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자기를 과대 평가하게 됩니다. 아마 로마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봉사의 기회로 알기보다는 자랑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거꾸로 사람들은 남에게 나설만한 카리스마가 없을 경우에 불안하게 생각하고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자기를 과대 평가하는 것 못지 않게 위험합니다. 만약 카리스마를 순전히 봉사의 기회로 안다면 그것이 뛰어나건 못하건, 드러나건 않건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사도들의 일과 일반 신자들의 일이, 또한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의 일과 단순한 사람들의 일이 구분되었겠습니다만 그것은 오직 서로에게 봉사하는 카리스마로만 사용되어야 했습니다.  
카리스마의 원리에는 다양성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6절). 바울은 여기서 카리스마의 높고 낮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다르다는 뜻으로만 말합니다. 다원성 가운데서의 일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런 '다름'으로 인해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구 안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보십시오. 서로 다른 식물, 동물, 곤충, 미생물이 함께 생태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이 지구에 한 가지의 생명체만 있다면, 비슷한 종류만 있다면 이 생태계는 쉽게 허물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사연들은 대개가 카리스마의 오용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의 직분을 단지 봉사의 차원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면, 교회 공동체를 꾸려나가면서 그렇게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생각과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카리스마의 근본원리로 여길 수 있다면 교회 안에서 다투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겠지요.  
6-8절 사이에서 바울은 대표적인 카리스마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함, 구제, 다스림, 긍휼. 여기서 제시된 일곱 가지의 은사에 대해서 조목조목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단, '예언'은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는 주술이 아니라 그 시대에 적합한 설교라는 의미입니다. 어쨌든지 여기에 제시된 모든 항목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작용하는 봉사와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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