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악과 싸우는 방식에 대해      (12:9-21)

              
악과 사랑
바울은 12장1-8절에서 기독교인의 은사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에 오늘 본문에서 그런 은사를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모든 이들의 카리스마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삶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 카리스마가 삶에서 증거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이런 삶의 태도가 기독교인답지 못하다면 그가 고백한 신앙은 '무늬'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악'이 가장 어렵습니다. 다른 문제들, 예컨대 고독, 불안, 또는 질병과 취미생활 같은 것들은 자기 형편에 맞도록 적당하게 처리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악만큼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성이 그렇게 강조되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 세상에 여전히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악이 준동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어떤 독립적인 세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양들의 침묵'이라는 영화는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매우 세밀한 심리묘사를 통해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천재로 태어난 이 주인공은 감옥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을 통해서 감옥 밖의 세계를 파괴합니다. 악에 대해서 일말의 가책도 없이 흡사 악을 즐기는 듯한 이 주인공의 태도에서 우리는 악한 세력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영화가 가상이긴 합니다만 인간의 악한 경향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사실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악을 하나님과 비등한 또 하나의 근원이거나 실체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능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악은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으로 인해서 불거지는 결과에 대해서 결국 하나님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일까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악과 정반대에 놓여 있는 절대선(善)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악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악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는 이유와 토대에 대해서 우리는 완전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종말이 와야만 완전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겠지요. 우리의 인식으로 모두 담아낼 수 없는 문제들은 그대로 놓아두는 것도 일종의 신앙입니다. 흡사 자기에게 매를 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철부지 아들처럼 우리도 그런 정도의 인식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악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질문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사랑이 바로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9절). 우리 자신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우리의 생각이 이기적이고 파괴적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악한 세력을 우리 자신의 인격만으로 제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일은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속한 삶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즉 악은 우리가 맞서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맞대응을 피하고 대신 사랑의 능력이 작용할 수 있도록 길을 내야 합니다. 악과 직접적으로 싸우려면 우리도 똑같은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그 싸움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의 방식을 버리고 맞대응 하다가는 싸움을 해보기도 전에 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악을 상대하지 말고 오히려 선을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 이런 바울의 가르침은 소극적이거나 옹졸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군사독재를 대항해서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맞부닥쳐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이라도 빨리 이 땅에 실현되는 것 아니냐 하고 주장합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해서 교회가 앞장서서 투쟁해야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당겨진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일단 동의합니다. 그리고 가능한대로 그런 노력에 힘을 보태고 싶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악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런 전사들과 어깨동무를 할 수는 없습니다. 악은 우리가 아무리 깨부순다고 하더라도 흡사 여름철 잡초가 계속 돋아나듯이 존재론적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양만 바뀔 뿐이지 근절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사회변혁론자들은 상당히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예수쟁이들이 그렇게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이 세상이 이 꼴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런 비판이 옳을 때가 많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우리 기독교의 신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잘못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악의 현상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근원을 파고들기 때문에 투쟁 방식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피범벅이 되어서 악과 직접 '맞짱' 뜨는 게 아니라 사랑의 능력에 의지할 뿐입니다. 이런 싸움을 피상적으로만 보면 아주 소극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훨씬 적극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의 부활로 종말론적인 승리를 선취한 그 사랑의 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싸움
그래서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라"(17절)고 호소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라"(19절)고 말합니다. 악과의 싸움이 하나님의 몫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악과 직접 싸워서 해결될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잘 살펴보십시오. 인간이 악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한 적이 있는지를, 또는 약간이라도 축소시킨 적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2천년 전에 비해서 지금은 악의 현실들이 줄어들었을까요? 우리의 싸움은 결국 십자가 사건에 볼 수 있듯이 악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은 본질적으로 그런 싸움에 능숙하기 때문에 우리를 조롱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결국 마지막 때까지 악이 지배하는 상태로 유지되고 마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역사가 눈곱만큼도 좋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 책임이 아닐까요? 물론 악한 현실만 보면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미 하나님의 싸움은 시작되었고 승리의 나팔소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단지 수사적인 게 아니라 실질적인 것입니다. 단지 그런 하나님의 싸움과 승리를 해석할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부족할 따름입니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악과의 투쟁이 바로 하나님의 몫인 것처럼 선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우리는 자주 선교사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선교할만한 능력과 자질이 별로 없습니다. 선교라는 미명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17,18세기에 유럽이 무력을 통해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넓혀갈 때 기독교가 신앙적으로 뒷받침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선교라고 착각합니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교회라는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입니다.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다른 학문을 통해서도, 심지어는 박테리아 같은 세균활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 운동을 가열차게 넓혀 가십니다. 교회는 단지 그런 거대한 생명 운동에 한 모퉁이를 감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의 징표를 부단히 심화시켜나가기만 하면 그 어떤 집단이나 이념에 비할 바 없는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을 토대로 한 사도의 신앙이 여기 기독교 공동체에 전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과 선
결론적으로 바울은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라"고 말했습니다. 악에게 굴복한다는 말은 악한 방식으로 그들과 싸운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싸우면 그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악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방식으로 싸우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악으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느낌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말썽을 피운다고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악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있습니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며, 잘난 체하지 않는다"(16절)면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분노에 차거나 같은 방식으로 원수를 갚겠다고 이를 갈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원수를 갚아봤자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본훼퍼의 예를 들면서 히틀러같이 파괴적이고 악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확실하게 처단하는 게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사회악에 대해서 무조건 침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가 최소한 상식적으로라도 판단해서 잘못된 질서는 바르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더구나 구약의 예언자들의 전통을 보면 사회정의가 바로 하나님 나라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사회참여와 역사변혁은 기독교 신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가 지성인으로서, 또는 휴매니즘에 근거해서 최선으로 헤쳐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철저하게 선(善)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악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원수를 갚는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그것은 오늘 바울이 말하는 길이 아닙니다. 요즘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테러와 반테러의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최선으로 정의를 실현시키되 우리의 목소리는 가능한 낮추고, 즉 우리 행위의 잠정성을 전제하고, 대신 생명과 사랑의 참된 능력인 하나님이 나설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그게 이기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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