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정치와 신앙  (13:1-7)
                

세상의 권위에 대한 복종
교회가 세속 정치에 참여해야만 하는가, 또는 그런 세계와는 담을 쌓고 순수한 종교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늘 신학적 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도 역시 세속권력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예를 하나 들면 히틀러 치하의 독일교회입니다. 히틀러의 광기 앞에서 교회가 어떤 존재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을까요? 고백교회에 속했던 칼 바르트는 히틀러의 제삼제국 이데올로기가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피력하다가 결국 본 대학교 신학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급기야 독일에서 쫓겨났습니다. 디트리히 본훼퍼 목사는 훨씬 과격하게 투쟁했습니다. 많은 승객이 타고 있는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가 술 취해 있다면 서로 힘을 합해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논리로 히틀러 제거 결사단체에 가입했다가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독일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군사독재 치하에서도 이런 문제는 매우 첨예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가 그 마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70대 초부터 한국 교회는 반정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런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다가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런 정치 문제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한쪽은 독재정권과 분연히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오히려 그런 정권을 비호했습니다. 아마 그 중간의 입장을 선택한 사람들이 훨씬 많기는 했을 것입니다. 군사독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과격하게 정치투쟁에 나서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말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올 피해를 두려워하기도 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을 정치와 구분해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극단적인 정치투쟁으로, 다른 한쪽은 극단적인 무관심으로 치닫던 와중에서 후자에 속한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은 성서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13장입니다. "여기를 보시오. 사도 바울도 세상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니까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까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복종하는 게 우리 기독교인의 바른 자세요." 대충 이런 논리를 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본문에서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이렇게 까지 엄격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진술을 있는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독재자의 횡포 앞에서도 '끽' 소리 못하고 우리의 운명을 그들에게 맡겨두어야 합니다. 이게 옳은 일인가요? 혹시 우리가 바울의 생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복종'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요?

정치의 잠정성
오늘 본문은 로마서 전체만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 전체와 비교할 때도 상당히 특이하고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대개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아주 담백한 서술로 그치고 있습니다. 흡사 목욕탕에 들어갈 사람이 수납창구에서 목욕비를 내야한다고 말하듯이 정부와 기독교인의 관계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본문의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케제만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이 단락에서 헬레니즘의 행정적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지금 로마 권력 전체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맞상대해야 할 행정관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복종하라'는 표현도 따지고 보면 행정관료들이 하는 일에 단지 협조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바울은 정치와 행정권의 문제를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울은 별로 큰 무게를 두지 않은 채 사무적인 차원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치적인 일은 '잠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로 어떤 큰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훨씬 가치 있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통해서 독재 권력에도 복종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현령비현령 식의 해석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제국들처럼 자신들에게도 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삼상 8장).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군인을 만들고 궁녀를 만들며, 그들의 재산을 세금으로 빼앗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왕이 있어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는가?"라면서 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성서가 정치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치가 생명의 본질과 깊은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오늘의 시대는 정치적이지 않은 사건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겠지만,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정치가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농사일과 고기 잡는 일에 정치가 필요할까요? 물론 좋은 정치가는 농부가 농사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만 농사 자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질서의 악
사도행전에 보도되어 있는 바울의 선교활동은 유대교에 의해서 방해를 받은 반면에 로마 정부에 의해서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이지 모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비록 근원적으로 악한 질서라고 하더라도 무질서보다 낫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정치의 기능을 축소시킬 수만 있다면 비록 그것이 악하다고 하더라도 무질서로 인해서 파생되는 악보다는 약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악한 권력을 비호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그것대도 대처하고 풀어나가되 생명의 질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방법론적 차이로 인해서 격한 투쟁에 빠지는 것보다는 그런 차이를 뛰어넘음으로써 훨씬 풍요로운 생명의 세계를 앞당겨 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어느 누가 봐도 악한 독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물러나면 당연히 이라크 민중의 삶이 새로워져야 할텐데 현재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가 사심을 버리고 이라크 문제를 처리했다면 지금과는 사정이 달랐겠지만 말입니다. 이라크는 후세인이라는 악한 질서가 물러가고 대신 또 하나의 악한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무질서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민중들에게는 이런 무질서보다는 오히려 독재자의 질서가 생명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낫다. 후세인을 대놓고 비판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먹을 것은 있고 나름대로 미래를 건설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두 왕국설
교회가 세속 질서에 얼마나 관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마틴 루터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문제에서도 혁명적이고 과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루터는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주를 편들었다고 해서 자주 교회사가들의 구설수에 오르곤 합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세속적 권위와 영적 권위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부언 설명할 필요 없이 사람들의 영적인 일에서 최종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정부는 세속적인 일에서 최종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여기까지는 인간 역사에 드러난 구체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그 두 권위의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생각이 갈립니다. 대표적으로 칼빈은 이 두 권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하나의 사실로 본 반면에서 루터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독자적 영역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칼빈을 따르게 되면 세속 정치에 훨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루터를 다르게 되면 한 발 물러서 있게 됩니다. 칼빈은 스위스의 제네바를 완전히 신적 통치의 질서로 만들어보려고 한 반면에서 루터는 농민정쟁이 일어나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판단할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 두 입장의 차이를 약간 더 설명하는 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치분야라고 해서 교회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칼빈의 주장은 원칙적인 면에서는 일단 옳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가 직접 정치적 헤게모니를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도 역시 옳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치를 비판한다고 할 때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감안해야만 한다. 예컨대 이라크 파병 문제만 놓고 본다하더라도 교회가 이런 구체적인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신학적인 접근을 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 결단으로까지 확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현실적인 국제질서에 적용시켜서 지금 당장 우리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권위의 본질
바울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단지 세상의 모든 권력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권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통치자들이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면, 결국 선을 행하는 자에게 두려운 통치자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새로운 삶'을 설명하는 12장과, 그리고 깨어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설명하는 13장8절 사이에 끼어든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지나가는 차에 한 마디 던진 언급입니다. 세속 권력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독교인이 세금을 내고 사회 질서를 지켜나가는 일은 사회악을 묵인하는 게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적극적인 사회참여이며 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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