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종말론적 윤리 (13:8-14)
              

신앙과 윤리
신앙과 윤리의 관계는 당연시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신적인 현실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윤리를 뛰어넘지만 신적인 현실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윤리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말씀과 삶' 2004년3월호의 '신학단상' 꼭지에서 나는 이것을 기독교 윤리의 이중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기독교 윤리가 단지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가치만을 다루는 게 아니라 신앙과의 변증법적 관계 안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메타 윤리'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 더 기독교적인 용어로 바꾸어본다면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종말론적 윤리'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이 끝나는 종말에는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윤리도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종말에 집중하지만 그 종말의 지평에서 오늘의 윤리를 해석하고 참여합니다. 이렇게 윤리를 종말의 지평으로 견인해 내다보니까 기독교 신앙이 자칫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종말론적 윤리의 관점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과 율법
바울은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10절에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라고 명백하게 진술했습니다. 아마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소위 '사랑예찬'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복음과 율법의 긴장 가운데서 결국 믿음의 우월성을 그렇게 강력하게 선포한 바울이 사랑을 예찬함으로써 낭만주의자처럼 보인다는 것은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비의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요소가 있기도 하고, 그 낭만이 단순히 감수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합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합리적인 낭만주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선으로 이런 율법(윤리)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가족 사이에, 친구 사이에, 연인 사이에 무언가를 해주기도 하고 상대방이 해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생일을 기억하고 선물을 준다거나, 또는 특별한 이벤트를 꾸미는 것으로 서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외로울 때 따뜻한 말 한 마디 듣는 것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매우 큰사랑입니다. 특히 여자들에게 그런 경향이 많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듣고 싶어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민족의 특성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니까 제 삼자가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 깊은 곳에 외로움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벤트나 달콤한 속삭임을 통해서라도 위로를 주고받는 것도 그런 대로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사랑은 결코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똑같겠지만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는 상반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용돈을 많이 주는 것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어떤 부모는 인색할 정도로 적게 주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태도를 보이든지 사랑의 토대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상대방을 의미 있게 만들 것입니다.

사랑의 빚
그런데 바울의 표현 중에서 '사랑의 빚'이라는 용어가 흥미롭습니다. 일견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랑을 의무로 생각하라는 뜻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기도드릴 때마다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고 하고, 실제로 이렇게 봉사하는 사람들과 그런 단체가 적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삶에 젖어버려 삭막해진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들만이라도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아마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뒤돌아보면 아무리 사랑의 마음과 실천을 안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별로 큰 성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 사심 없이 봉사하는 이들이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정도에 머물러 있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경구의 리얼리티를 확보하지 못합니다. 결국 사랑은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빚'을 완전히 갚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빚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즉 우리에게 사랑의 빚이 있다는 말은 사랑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고전 13:3).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자기 재산을 몽땅 털어 넣고, 또는 장기를 기증하는 일 보다 더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런 것이 곧 사랑 자체는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식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전자는 사랑을 자기의 능력이나 자기 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후자는 전혀 다른 사랑의 리얼리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빛 자체이고 우리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빛을 받아서 다른 물체에 비출 때 그것은 나의 능력이나 기능이 아닙니다. 그 능력의 근원은 태양 빛입니다. 우리는 단지 반사의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선한 행위들은 우리가 아니라 사랑에게서 발현되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때, 카이로스
바울은 사랑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언급한 다음에 이어서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때'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아야 합니다."(11절). 지금은 곧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며, 동시에 구원이 가까이 다가온 때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이 '때'는 신구약성서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카이로스'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태양력에 의해서 흘러가는 연대기(크로노스)만 의식하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다른 시간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구원의 시간이며, 의미 있는 시간이며, 거룩한 시간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제 나름의 시간표를 갖고 살아갑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시간표에 묶여 있습니다. 졸업식, 취업, 적금, 결혼과 얽힌 시간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적인 시간표를 의식합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시간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시간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올려놓는다면 '구원의 시간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우리가 해결해야만 할 현안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두 삶의 차이를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느 가족이 세계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들이 겪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늘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인터넷 게임만 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부모들은 낮선 장소와 낮선 풍물을 경험함으로써 앞으로 인생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주려고 합니다. 똑같은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아이들과 부모 사이에는 전혀 다른 시간표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오직 크로노스이고, 부모에게는 카이로스입니다.

종말론적 윤리
바울은 영지주의의 흔적으로 보이는 '낮과 밤'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서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윤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열거된 몇 가지 부정적인 요소는 이렇습니다. 술취함, 음행, 방종, 분쟁, 시기. 결론적으로 14절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씀을 표면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기독교인의 윤리를 청교도적인 '금욕주의'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쾌감은 모두 악한 것이니까 일체 억압하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처럼 '모범생 만들기'로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모범생으로 살려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이 땅에서 생존하려는 오랜 진화의 과정 속에서 터득된 기질이 본능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현상을 '리비도'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주어진 기질을 강제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억압하게 되면 위선으로 빠지고, 그게 심해지면 노이로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무슨 이유에서 이런 금욕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종말론적인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을까요? 그가 로마서 앞부분에서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분명하게 진술한 마당에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읽기에서 해석학적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길을 잘못 들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특히 그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즉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게 기독교인의 목표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시각을 갖는 게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시각이 열린 사람은 자연스럽게 술취함, 방종, 시기 같은 요소들이 아주 시시하게 여깁니다. 자기 욕망을 자극하는 이런 요소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이 그의 내면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그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의 존재론이라 할 사랑이 그의 삶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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