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채식주의에 대해  (14:1-12)
                

로마 교회의 자리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 교회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를 어느 정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앞 부분에서 다룬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기독교 도그마에 대한 보편적인 해명인데 반하여 이제 로마서 끝자락에 해당되는 14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사안은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참고적으로, 바울의 서신은 일반적으로 수신자의 구체적인 정황을 확인한 다음에 기독교 복음의 원리를 제시하는 방식이었는데, 로마서는 그게 정반대의 수순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아마 로마 교회는 바울 자신이 설립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직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복음의 큰 그림을 우선 제시하고 이에 근거해서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사안을 다룬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선 로마 공동체는 가장 대표적인 이방인 교회입니다. 바울의 모(母)교회라 할 안디옥 교회도 역시 이방인 교회이지만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인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이방인 공동체였습니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주류이거나 그 영향력이 상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율법 문제가 현안이겠지만 로마 교회는 이방인들의 생활습관이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고급한 문화 시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모든 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토템 신앙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절기에 따라서 고사를 지낸다거나 이사를 할 때 손 없는 날을 찾는 습관과 비슷합니다. 이제 예수를 믿기로 작정은 했지만 여전히 그런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한 이방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회 안에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사실 한 인격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형성된 다음에는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기독교 세계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그 이전에 형성된 세계관입니다. 아마 로마 교회의 사정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채식주의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채소만 먹는 이유는 로마 문명에 대한 적대감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먹거리 문제에 대해서 훨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8장에 따르면 그 당시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는 헬라 신전에 바쳐졌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인해서 상당히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아마 로마 교회에서도 이런 갈등이 똑같이 재현된 것이 아닐까요? 엄격한 기독교인들은 로마 사람들이 먹는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순전히 채식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도 이런 채식주의 전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한 세력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세계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은 거의 채식만으로 최소한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절에서는 기본적으로 채식만을, 그리고 양념도 담백한 것을 사용합니다. 불교의 고승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식을 합니다. 기독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수도원에서도 아마 이런 정도의 식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집중적으로 종교적 영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의 먹거리가 채식 위주로 짜여진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능인 식욕을 억제함으로써 영적인 감수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채식을 고집하는 이들의 또 다른 특성이 '날'에 대한 구분이라고 설명합니다(5,6). 이들이 날을 구분한다는 것이 로마의 종교적 습관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안식일 개념에서 주일 개념으로 넘어오는 그 과정의 한 현상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이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골라서 먹듯이 어떤 특정한 날을 구별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지금 거론하고 있는 로마 교회 내의 채식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사회의 먹는 습관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복음와 문화의 관계를 적대적으로(Christ against culture) 보는 입장입니다. 이런 배타적인 전통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안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보통 '근본주의'라고 합니다. 가능한대로 이 세상을 멀리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종교적 형식의 삶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아마 지금도 술, 담배를 적대시한다거나 영화나 스포츠 등, 세속문화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삶의 차이를 넘어서
로마 교회에는 채식주의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업신여기나 비난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채식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특성을 망각한다고 비난했으며, 거꾸로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들을 복음의 능력을 훼손시킨다고 무시했겠지요.
어떤 공동체든지 일단 조직되고 무슨 사업을 펼치다보면 사소한 문제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듯이 교회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이런 인간적인 한계를 안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방향으로 나갈 때도 있고, 또는 그런 차이가 극복됨으로써 그 본질이 유지되는 때도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먹는 문제와 날에 대한 평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정리합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날을 따로 정해서 지키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으니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가려서 먹는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으니 그 역시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론적인 토대에서 이런 갈등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소한 차이를 첨예화해서 서로 비난하고 상처를 줌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서 배타적인 입장을 취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와 다른 대상을 무조건 배타적으로 밀어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일치를 이루어내는 게 바로 기독교의 훨씬 적극적인 본래의 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 형식을 어느 정도 구분하고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당하는 경우라고 한다면 타협할 수 없지만 복음의 형식이 다른 경우라면 그 차이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기독교인들 중에서 사회구원의 문제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개인구원에 치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구원이 사회와 개인으로 엄격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각자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면 상호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을 국가 이데올로기나 시장 이데올로기와 일치시키는 집단이 있다면 그들과 결코 타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과 형식이 늘 명쾌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라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화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까지 대신해서 기도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바울은 기독교인이 서로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기독론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이제 더욱 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 따라서 남을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12). 기독교인이 이웃과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사건도 이런 마지막 심판 앞에서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백히 인식한다면 자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매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득이 판단해야 할 경우라도 조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드러난 모든 악에 대해서도 그 심판을 종말로 미루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누가 보아도 분명한 독재자, 가정 파괴범, 사이비 교주들도 역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요?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책임을 묻고 비난할 수 있는 범위를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정확하게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역사에서 교황청이 종교재판을 통해서 출교 하거나 심지어 처형한 이들 중에서 억울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 중에는 소종파, 집시,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국가의 헌법 기관에 의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소위 사상범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장기 투옥시킨 우리의 '보안법'도 대표적인 것 사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한 실증적인 대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역사 안에서 벌어진 상황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종말론적 하나님의 심판 개념을 통해서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우리의 모든 판단이 결국 잠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완료형으로 결정되지 않은, 그래서 미래로 돌려져야 할 그 판단의 잠정성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모든 판단의 미래적 성격은 인간의 역사만이 아니라 사물에도 적용됩니다. 사물의 실체에 대한 물리학적 판단까지도 역시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미래로 유보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판단이 잠정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판단을 내려서도 절대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는 그 잠정성까지만 말할 뿐이고, 그것을 전해들은 인간은 자신의 역사 안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판단은 한편으로 소극적(negative)이며, 다른 한편으로 적극적(positive)입니다. 이런 변증법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계 안에서 다른 이와 차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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