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총과 평화의 인사 (1:1-7)

오늘 우리는 2천년 전 바울이라는 한 인물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가 어떤 경유를 통해서 기독교의 경전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약간 전문적인 것이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바울이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 로마서가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무게를 감당하게 되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약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사건은 단순히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해석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했기 때문에 단번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서 읽은 초기 기독교가 그 말씀을 진리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원래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영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었고, 마침내 기독교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도 역시 그것 자체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또한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리론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 사건은 명실상부하게 구원사건으로 깊은 의미를 얻게 됩니다. 앞으로 로마서 읽기를 위한 하나의 지침을 이 문제와 연관해서 드린다면, 오늘 이 로마서를 읽는 우리는 원래의 로마서가 가리키고 있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종말론적인 진리의 지평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로마서를 해석해온 2천년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
바울은 로마서를 자기에 대한 소개로 시작합니다. 소개라고 해도 어떤 이력서 같은 게 아니라 자기의 내면적 정체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아직 한번도 로마에 가 본적이 없으며, 이 편지를 받아보아야 할 사람들과도 별로 깊은 사귐이 없는 상태입니다. 9장에서 구체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바울은 로마 교회 전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바울의 고백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애매 모호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그 유명한 '다메섹 도상의 바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부활 승천한 예수가 바울에게 현현하는 특별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이후로 바울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각됩니다. 우리는 다메섹 도상의 사건에 얽힌 실체적 진실을 잘 모릅니다. 다만 바울이 그런 한 순간의 비상한 현상 때문에 자기의 소신을 바꿀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사건 전후에 본인이 다 밝히지 않는 어떤 일들이 분명히 놓여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의 회심을 위해서 다시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말이 되며, 또한 이렇듯 지상으로의 강림이 유독 바울에게만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이 경험이 승천했던 예수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에 대한 경험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그만 둡시다. 우리가 모르는 문제는 그냥 덮어두는 게 좋습니다. 신앙적 편이주의에 빠져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 문제는 로마서를 읽는데, 또한 기독교의 본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결국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 모든 기독교인들도 역시 사도라고 한다면(롬 1:6 참조)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낱말은 기쁜 소식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만 성서에 의해서 이 낱말은 훨씬 심원한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유앙겔리온은 우리의 구원과 연결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관계된 일만이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차원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차원에 속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말씀은 이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명에 관계된다는 사실입니다. 개역성서는 '택정함'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공동번역은 '사명'이라고, 루터 번역은 '부르심'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거의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확실한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간증하듯이 자기의 소명의식을 열정적으로 외치는 것으로 이 사명 문제가 해결될 듯이 생각합니다만, 이런 열광적 상태는 그것 자체로는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별 의미 없는, 때로는 매우 부정적인 광기를 이런 사명감과 혼동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명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완전히 휩싸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는 점점 사라지고 그 영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영의 의지가 주체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흡사 어떤 위대한 작곡가가 음악적 영감에 완전히 빠져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는 사명감이 투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탐욕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이것을 사명감으로 호도 합니다. 교회를 쪼개면서도 이것을 신앙적 결단으로 간주합니다. 담임목사 세습문제는 가장 전형적인 자기 기만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면서 겉으로는 사명감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 젖어 있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명감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과연 내가 하나님의 복음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3,4)
바울은 하느님의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 짧은 구절에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의 '컨텐츠'입니다. 이 예수는 육체적인(Fleisch) 면에서 다윗의 후손이며, 영적인(Geist) 면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인정)된 분입니다. 바로 이 서술에 기독교의 본질이 거의 모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또한 이게 왜 복음입니까? 이게 그렇게 중요한 사건입니까? 바울의 모든 증언은 이 사실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도 역시 그렇고, 사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이 사실을 도와주는 각주일 뿐입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도 신학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이 주제가 한 두 마디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이면 인간이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지, 역으로 신이면 신이지 어떻게 인간이기도 하다는 말인지. 성서에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순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초기 기독교도 이 문제로 3백년 동안 격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일단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습니다만, 종말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논의되어야만 합니다. 이 말은 기독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훨씬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이 문제는 계속해서 다루어지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사건인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르트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부활은 계시이며,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발견이고,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인식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필연성의 등장이고, 예수 안에서 알려지지 않은 자, 그리고 비명시적인 자를 예기(豫期)하는 것이요, 예수를 시간의 끝으로서, 역설로서, 원역사로서, 그리고 승리자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로마서 주석, 8).

은혜와 평강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바울은 위에서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자신의 입장을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에 정식으로 축원 인사를 보냅니다. 아마 그 당시에 이런 인사법은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거룩한 백성'이라고, 루터 번역에서는 'Heilige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의미의 이 단어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에 보면 성도는 순교 당한 후 하늘에 올라간 성자와 동일한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예배는 이런 성자들과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까지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현재 살아있는 성도들은 영적인 면에서 성자들과 같은 차원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라고 일컬어지는 우리는 순교 사건과 직간접으로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성자들과 영적인 교제가 가능하니까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순교는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기 때문에 당하는 죽음을 뜻하는데, 초기 기독교는 이런 순교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그런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은 신앙 때문에 순교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순교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순교보다는 이 세상에 어떻게 영합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살아갑니다. 시대정신과의 결탁입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계에 "청부론" 문제가 불거져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독교인들도 깨끗한 부자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로 노골화되어 있는 우리 국민의 의식세계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이 청부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오랜 전부터 교회에서는 노골적으로 부자 되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부자로 사는 게 죄라거나 가난하게 사는 게 무조건 선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기독교인 개개인의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객관적 기준으로 계량화하거나 재단할 수 없고 개인의 신앙적 양심과 자유 안에서 처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가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물량적인 이 시대정신에 빠져들었다는 사실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상실되는 위기를 직감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실제적인 순교가 지나간 시대에 살지만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순교를 그 바탕에 놓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순교 정신은 인간, 권력, 물질을 절대화하는 시대정신과의 결탁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의 역사적 순교 사건도 사실은 그 시대가 당연한 것으로 요구한 것을 저항하기 때문에 당한 일들입니다. 로마 사회는 어떤 민족의 문화나 종교 때문에 박해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로마 체제의 안정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종교적 차이는 용납되었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자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로마 황제의 권위만 손상시키지 않으면 괜찮았습니다. 로마인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바로 여기,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로마 황제를 본뜬 동상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오직 예수만이 "퀴리오스"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알력 가운데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화형을 당하거나 맹수들의 밥이나 검투사들의 칼에 희생되었습니다.
과연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이 시대정신에 저항하고 있습니까? 물질이 신처럼 작용하는 이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이 전혀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적당하게 기독교 신앙이라는 허울만 갖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과 처세술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기독교인이 매사에 세상과 싱갱이를 벌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허망하고 순간적인 것을 절대시하는, 즉 우상 숭배하는 이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바울의 축원 인사는 은혜와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 은혜와 평화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축원 형식이 그 당시 일반 사람들도 사용하던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보편적인 관용어였을 가능성은 많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의 일상적 인사인 '샬롬'에서 근동지역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일반적 관용어였다고 하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이 개념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보편적인 용어에 기독교적인 세례를 주는 것 말입니다. 이런 작업은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은혜라고 확실하게 알기만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확연하게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인간이 조성할 수 있는 작은 것들에만 마음을 쏟아 붓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렇듯 복잡합니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만, 속으로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가 얼마나 자기업적에 도취해 있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자기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지 모릅니다. 교단적인 차원에서부터 개교회 차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우리 자신의 몸집을 불리느냐에 모아집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의 일에만 마음을 쏟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입니다.
평화는 모든 종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가장 근본에 놓여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금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불안과 전쟁에 휘말려 들고 있습니다. 부시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엔 안보리 국가들이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교황도 반전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만약 이라크를 공격하면 후세인은 몰아낼 수 있겠지만,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부녀자들과 비전투원들이 죽겠습니까? 카터가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전쟁은 평화적 수단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직 이라크에 대한 무기사찰을 계속해야지 전쟁을 벌일 단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03년 3월 당시의 상황).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도 역시 평화는 참으로 요원한 것 같습니다. 소유는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평화는 별로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은혜와 평화가 사람들에게서 오는 게 아니라 아버지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한다고 증거 합니다. 인간들끼리의 평화회담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가능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에 마음을 여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주어질 수 있는 은혜와 평화가 왜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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