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 복음은 하나님의 의인가?   (1:8-17)

              
우선 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심리적 상태를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잠시 지적한대로 바울의 사도성은 초기 교회에서 그렇게 확고부동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 공동체 앞에서도 이런 점에서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오늘 본문에서도 자기를 변호하는 대목들이 등장합니다. 더구나 풍문으로만 전해들었지만 아직 한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는 교회를 향해서 아직도 사도성이 확보되지 못한 사람이 편지를 쓴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움추러 들고, 때로는 과격해질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기독교의 교리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 다른 목소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외쳐졌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논쟁이 적지 않지만 기독교가 체계를 잡아나가던 초기이기 때문에 훨씬 투쟁적인 요소가 강했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할례당)와 기독교의 주변환경이라 할 헬라사상(영지주의)이 나름대로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고 애를 쓰던 시대라는 점에서 상당히 혼란스러운 격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격랑의 한 가운데 서 있던 바울은 교회 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투쟁하면서, 이제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희망에 젖어 있었습니다. 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로마 공동체가 바울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마당에 우선 편지로나마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로마 교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번에 걸쳐서(10, 13, 15) 로마 공동체 방문이 지금껏 막혔지만 불원간 가겠다는 뜻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마음을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로마 공동체 앞에서 느끼는 바울의 불안감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이 결국 로마를 방문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습니다. 사도행전(28:16 이하)이 서술하고 있듯이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체포당하여 황제에게 직접 재판 받기 위해서 피고인으로 로마에 끌려갔다는 증거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실제로 로마에서 어느 정도 활동했는지, 사도들 중에서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도 잘 모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베드로 이야기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실증은 없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유대교의 박해 앞에서도 굳건히 예루살렘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결국 세계 교회사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의 모(母)교회가 세계 교회를 끌어가는 중심에 섰어야 했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유명무실해지고 로마 교회가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이런 역사의 흐름이 잘 된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만, 저는 한 가지의 관점만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종교는 문화를 수용함으로써만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루살렘 모교회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사도 베드로를 비롯해서 내노라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즐비했습니다만 유대교라는 특정한 종교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던 지역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꽃을 피우기 힘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교는 배타적인 종교였던 반면에 로마의 종교(신화)는 포괄적이었습니다. 로마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를 생산해낼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자연스럽게 세력을 펼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로마 문화의 옷을 입고 유럽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문화라는 것이 단순히 어떤 삶의 형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형식들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인 정신, 또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는 헬라 철학이라는 문화의 옷을 입고 로마 사회에 뿌리를 확고하게 내리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오늘 우리의 선교적 사명과 연결해서 생각해본다면, 그 당시의 이런 노력이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모교회처럼 근본적인 교리만 붙들고 있습니다. 그 기독교의 교리가 오늘 이 시대의 언어로 해석되는 작업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껏해야 예배를 시청각적 감각으로 드린다거나 복지관을 세우는 것뿐이지 긍정적, 또는 부정적 시대정신과의 치열한 논쟁을 기피하고 두려워합니다. 로마의 기독교는 늘 주변 세계와의 이런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기독교 선교는 독선적입니다. 대화는 없고 자기 주장만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로마 교회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교회사는 잘 된 일인가요, 아니면 잘못된 일인가요? 로마 교회를 둘러싼 이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 가치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이미 로마라는 사회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순리이며, 당연한 귀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훨씬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하고, 391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국교로 승인한 다음부터 기독교가 제국의 유일 종교로서 정치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이 필요합니다. 제국의 속성은 외부적 힘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간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선악의 기준입니다.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가 세계의 평화와 직결됩니다. 요즘 미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라크를 공격하려는 태도가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4세기 이후의 기독교는 유럽에서 이런 로마 제국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한 하나님, 한 교황, 한 황제에 의해서 전세계가 질서를 잡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정치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어떤 논리나 진리보다는 교권으로 기독교를 지켜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가 문화의 옷을 입기는 입어야 하지만 그 본질을 왜곡시키는 데까지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어쨌든지 바울이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로마 교회는 이렇듯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갖춘 교회로 역사에 등장했는데, 바울은 그런 역사적 교회를 기대했을까요?

구원
로마를 방문하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여러 번 표명한 바울은 그곳에 가서 자신이 전하고 싶어하는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16,17절에서 명확하게 규정합니다. 이 두 구절에 등장하는 용어인 믿음, 구원, 하나님의 능력, 유대인, 헬라인, 하나님의 의가 아마 로마서의 전체 주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몇 가지 용어만 대략적인 개념정리를 함으로써 앞으로 로마서 읽기의 방향을 잡아보겠습니다.
우선 헬라어로 "소테리아"라고 불리는 '구원'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표현한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을 자주 듣고, 또 그렇게 전하기도 합니다. 너무 자주 그렇게 노골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함으로써 오히려 구원의 현실성(reality)들을 훼손하는 일이 있습니다. 흡사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됨으로써 사랑이 무엇인지 모호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절대명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이 일단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어떤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지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 없이 기계적인 의미에서 구원 운운하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론을 싸구려 상품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본훼퍼가 그런 말을 했지요? 값싼 은혜를 그만 구하라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값싼 구원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대형매장에서 정가 이하로 상품을 팔 듯이 구원을 팔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품은 싸서 좋기는 한데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상관없는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구원은 일종의 교양이나 윤리와 비슷한 차원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저는 지금 교회 안에서 구원론이 실종되었다고 봅니다. 구원은 우리의 모든 존재가 담겨져야 할 절대적인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복음 공동체인 교회가 이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 반증입니다. 예컨대 당회원들이 이 구원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보다는 교육관이나 수양관, 복지관을 짓기 위한 방법만 찾을 것입니다.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자신과 교회의 구원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이번 공동의회 때 있게될 장로투표에 온 신경을 쏟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교회의 예배를 참석하면서 참 낯설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불필요한 것에 대해서만, 또는 상대적인 것에만 그렇게 열을 올릴까 하는 낯섬입니다. 물론 교회의 관리와 운영에 관계된 일들이 전혀 필요 없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복지관도 짓고, 장로도 피택해야 하고, 성가대 수련회도 다녀와야 하겠지요. 다만 그런 것들은 각 교회의 사정에 맞추어 필요한 것만큼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는 그런 것에 거의 교회의 생명을 걸어놓습니다. 그런 것을 절대적인 것처럼 밀고 나가니까 그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회가 갈라지고 믿는 사람들끼리 멱살잡이까지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을 준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에게서 오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발생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구원을 일으킨다는 주장이 곧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무력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키를 한 치도 키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일단 접어두고 하나님의 능력이 활동하시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한 관심이 우선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중심으로 작동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두 가지로 상반됩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인간의 교만입니다. 과학자들도 그렇게 될 수 있고, 경제인들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과학적 연구를 통해서 생명의 비밀을 모두 파헤칠 것처럼, 또는 기업활동이나 주식투자 같은 일을 통해서 인류의 복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여깁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의 의식를 자세하게 들여다본다면 그들이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얼마나 큰 자만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절망입니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업적이 성취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기독교인들은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별로 중요한 주제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또는 구원을 자기의 능력으로 이루어낼 것처럼 착각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이 시대의 사이비 메시아니즘과 투쟁하는 중입니다.

믿음
바울은 구원이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단순히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으로만 따지면 우리 정통 교인들보다 이단들이나 소종파 신자들이 한 수 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어떤 태도라 할 수 있는 믿음 자체보다는 믿음의 대상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믿을만한 대상을 믿어야 그 믿음이 정상적인 것이지, 무조건 믿는 것은 미신이나 광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우리가 믿는 그 대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변증학(apologetics)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이지 믿을 만 한지 아닌지 따지는 것과는 다른 게 아니냐, 하고 질문할 분이 있을 겁니다. 성서의 내용 중에는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많고, 그런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들이 증거 되기도 했습니다. 홍해 사건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가, 동정녀 탄생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가 안되지만 믿어야 하는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의 과정을 거쳐서 믿어야 할 것과 우리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는 사건에 대한 믿음을 구별하는 게 바람직 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의 것은 주로 과거의 사건이고, 뒤의 것은 주로 미래의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과거로 흘러간 사건들은 우리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믿을 만하다는 증거가 제시되어야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는 사건은 여기서 제외됩니다. 굳이 교의학적 주제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창조사건은 이해의 과정을 통해서 믿어야 하지만, 종말사건은 그것 없이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종말론적으로 계시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부분적으로는 이해의 대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비입니다. 따라서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반대로 실증적 이성의 검증을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는 양극단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의
로마서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개념은 바로 "의"(디카이오수네)입니다. 이제 바울은 17절에서 일종의 맛보기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고 진술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여러 번 다루어질 예정이니까 간단히 이것이 복음에 나타났다는 바울의 진술만 검토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그의 이 주장은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십자가에 죽고, 삼일만에 부활했다는 사건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는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명한 주장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것이 전도이고 설교라는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특별한 사건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평에서 풀어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다른 것은 접어두고 십자가 사건만 간단히 해석하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우선 인간이 판단하는 의와 하나님의 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의 종교와 로마의 정치가 예수를 불의한 사람으로 선고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판단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인 십자가의 그리스도가(고전 1:23)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생명이라 할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판넨베르크가 언급했듯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그 어떤 인간적 실패와 절망도 더 이상 실패와 절망으로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과 윤리가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세상 사람들의 의와, 또는 타종교와 선한 경쟁을 벌여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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